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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전자발견드라마

전자의 아버지 J.J.톰슨

전자의 아버지인 J.J.톰슨은 어떤 사람인가. 또 그는 어떻게 전자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전자 발견에 얽힌 이야기와 톰슨의 위대한 업적을 살펴보자.

J. J. 톰슨(Joseph John Thomson, 톰슨은 조지프라고 불리지 않고 제이 제이로 불렸다고 함)은 1856년 12월 18일 맨체스터 교외에 있는 치섬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으로 출판업과 서적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4세가 되던 해(1870년)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철도기사가 되기 위해 맨체스터 오엔스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은 것이 계기가 돼 1876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대학으로 전학했다.

대학 성적이 우수했던 톰슨은 1880년 졸업과 동시에 트리니티대학의 연구원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28세가 되던 1884년 존 레일레이(1904년 아르곤 발견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자리를 물려받아 케임브리지 카벤디시연구소의 실험물리학 교수가 됐다. 그는 1918년 트리니티대학의 학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34년 동안 카벤디시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그리고 트리니티대학으로 옮겨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방사성 붕괴이론을 세워 19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물려줬다.

J. J. 톰슨은 1890년 케임브리지 의과대학 교수인 조지 페이젯의 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조지 톰슨(George Paget Thomson)은 벨 전화연구소의 클린턴 데이비슨과 공동으로 193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1927년 각각 독립적으로 전자회절을 발견해 전자의 파동성을 증명한 바 있다. 조지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아버지에 이어 전자의 파동성을 입증한 것이다. 또 아버지(1906년 노벨물리학상)와 아들이 노벨상을 수상한 진기록을 세웠다. 원자의 구성입자가 발견되고, 양자론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물리학을 탄생시키는데 톰슨부자는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J. J. 톰슨이 연구생활을 했던 카벤디시연구소는 내부벽이 노출된 허름한 벽돌 건물이었다. 연구실도 그리 정돈돼 있지 않았다. 같은 때 독일의 빌헬름 오스트발트나 파울 에를리히의 연구실과 비교하면 매우 지저분했다. 그러나 카벤디시연구소에는 독창적인 연구문제와 접근방법이 있었고 목표를 향한 독특한 연구스타일이 있었다.

카벤디시연구소 초대소장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전통을 물려받아 이론물리학을 연구했던 톰슨은 음극선 문제에 착안하자마자 단숨에 전자를 발견해 버렸다. 이러한 깊은 통찰력으로 그는 거대한 산에 터널을 파듯이 모든 연구인력을 원자문제에 집중시켰다. 그가 지도한 러더퍼드와 보어 등의 제자와, 이들의 제자에 의해 원자의 비밀은 벗겨졌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건강유지를 위한 약간의 스포츠 외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톰슨은 실험 물리학자로서 장치를 다루는 재주는 별로 없었다”고 제자들은 회고한다. 그는 항상 잘 되지 않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듯 실험에 임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세미나가 없었다. 대신 자주 실험실을 순회하며 학생들로부터 연구결과를 보고받고 지시를 내리곤 했다.
 

J.J.톰슨은 음극선을 이용해 전자의 전하와 질량비를 구함으로써 전자의 존재를 입증했다.


입자-파동 논쟁

이제 J. J. 톰슨이 전자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살펴보자. 새로운 발견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이뤄진다는 말대로, 전자는 톰슨 이전부터 자연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많은 과학자의 긴 탐구여정 속에서 발견됐다. 이 여정은 1800년 이탈리아인 알레산드로 볼타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볼타전지는 액체를 통한 전기전도, 즉 전기분해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사에서 최고의 실험물리학자로 평가받는 마이클 패러데이는 1833년 전기분해법칙을 발표해 전기화학반응의 정량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전기분해가 일어날 때 각각의 원자가 전극에서 일정한 전기를 주고 받는다는 사실을 알진 못했다. 그는 단지 서로 유사한 물체의 원자가 같은 양의 전기를 가진다는 것, 즉 전기의 기본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파악했을 뿐이다.

원자가 일정한 기본단위의 전하를 가졌다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낸 사람은 맥스웰이다. 그는 전기장과 자기장을 통합한 수학공식을 유도한 1873년의 논문에서 패러데이의 전기분해법칙을 언급하면서 “전기분해시 양이온과 음이온은 음극과 양극에서 각각 ‘한 분자’의 양전기와 음전기를 방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맥스웰은 후에 이 단순한 모형을 철회하고 말았다.

맥스웰의 전기분자를 믿었던 영국 퀸스대학의 조지 스토니는 1874년 수소이온의 단위 전하를 ‘일렉트린’(electrine)이라고 불렀으며, 7년 후 그 값을 추정해냈다. 스토니는 1891년부터 일정 전기량(전기분자)을 전자(electron)라고 바꾸어 불렀다. 톰슨이 발견한 음극선 입자가 전자로 불린 것은 스토니 덕분인 셈이다.

이와 같이 전자라는 용어는 액체를 통한 전기의 전도, 즉 전기분해의 본질을 파악하는데서 나왔다. 하지만 전기의 기본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기체를 통한 전기의 전도, 즉 방전관에서 관찰된 음극선 현상에서 증명됐다. 방전관은 기체를 제거한 관에 전기가 통하도록 만든 장치다.

1838년 방전관의 ‘자색 밝은 빛’을 자세히 관찰했던 패러데이는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패러데이가 만든 방전관은 진공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극선 연구에 획기적인 진전이 이뤄진 것은 1855년 하인리히 가이슬러가 효율적인 진공펌프를 개발한 이후다.

1850년대 말 본대학교의 율리우스 플뤼커는 패러데이보다 높은 진공상태에서 방전관 벽이 인광을 발하고 인광의 위치가 자기장에서 휘어지는 것을 관찰했다. 또 1869년 요한 히토르프는 음극과 인광 사이에 딱딱한 물체를 놓으면 벽에 그늘이 지는 것을 발견했다. 1876년 브레슬라우대학에 있던 오이겐 골드슈타인은 밝은 광선(빛살)에 ‘음극선’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후에 양성자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고진공 방전관인 크룩스관을 발명한 영국의 윌리엄 크룩스는 1879년 전기분해현상과 유사하게 음극선이 이온화된 분자흐름이라고 했다. 이를 시작으로 영국과 독일의 많은 학자들이 음극선의 본질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이 해석은 크게 입자와 파동으로 갈라졌다.

영국의 아서 슈스터와 J. J. 톰슨 등은 입자설의 주창자였다. 이들은 이온화된 분자흐름이라는 크룩스의 아이디어를 채택해 음극선이 방전관 내의 잔류 기체에서 나온 전하입자라고 주장했다. 자기장에 의해 휘어지고, 석영과 같은 비금속 고체층에 대해 불투명하고, 바람개비를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들이 입자설의 증거로 제시됐다. 물론 이것은 전기장에 의한 휘어짐으로 보아 음전하 입자였다.

오이겐 골드슈타인과 구스타프 헤르츠 등은 파동설을 주창했다. 음극선이 얇은 금속필름을 통과하는 현상이 그 증거였다. 결국 음극선(전자)이 “입자인가 파동인가”라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계속됐다.
 

(그림1)방전과 내에서 전자기장에 의해 휘어진 음전하 입자


음극선이 입자임을 증명

입자설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운동하는 전하입자가 자기장에 의해 휘어지는 현상을 이용해 전하 대 질량비(e/m)를 구했다. 그러나 측정된 운동속도의 값이 입자가 되기 위해선 지나치게 컸다. 그렇다고 광속도는 아니었으므로 입자와 파동 중 어느 쪽인지 결론짓지 못했다. 이때 입자설 주창자들을 구해준 사람은 J. J. 톰슨이다.

1895년 프랑스의 장 밥티스테 페랭(브라운 운동 연구로 192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음극선이 음극으로부터 절연 금속원통으로 이동할 때 음전하가 원통에 전달되는 것을 발견했다. 1897년 톰슨은 이 실험을 다시 실시해 페랭의 결과를 확인했다. 또 가속된 음극선을 전기장과 자기장에 통과시켜 얼마나 휘어지는지를 분석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를 고안해 운동속도를 모르고도 전하 대 질량비를 구할 수 있도록 했다.

톰슨은 실험을 통해 음극선 입자의 전하 대 질량비가 수소이온의 1천배 정도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음전하 입자의 질량이 수소이온보다 대단히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방전관 내의 기체가 무엇이든, 전극이 어떤 것이든 결과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그의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 음전하 입자는 모든 원소에 공통적인 근원 물질인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 톰슨은 이 입자가 잔류기체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후에 이 사실은 부정됐고 전극의 필라멘트가 전자를 방출한다는 사실로 정리됐다.

톰슨은 전자를 발견해 파동설을 침묵시켰지만 전자의 전하를 정확히 측정하는데는 실패했다. 톰슨의 측정치는 재현성이 없었다. 결국 정확한 측정은 로버트 밀리컨의 손으로 넘어갔다. 밀리컨은 1908년 기름방울법에 의해 전자의 전하가 4.06×10-10 esu(정전단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밀리컨은 이 업적으로 192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톰슨은 1904년 ‘건포도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균일하게 분포된 양전기의 구(球) 안에 음전하 구형입자가 묻혀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때 독일의 필립 레나르트는 원자의 빈공간에 전자들이 양전하들과 쌍을 이루고 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러한 이론은 레나르트에게 1905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줬다. 톰슨의 건포도 모형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직계 제자인 러더퍼드의 핵원자 모형과 보어의 양자모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조지프 톰슨은 1940년 8월 30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그는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아이작 뉴턴의 곁에 묻혀 입자설의 영원한 주창자로 남아 있다.
 

고진공 방전관을 발명한 윌리암 크룩스(1832-1919)는 음극선이 이온화된 분자흐름이라고 설명하면서 음극선의 본질 연구에 불을 붙였다.


J.J.톰슨의 학문적 업적

1881년●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물체가 전하를 띨 때 질량의 변화를 추론하여 전자기의 질량 개념 제시
1884년●왕립학회 회원이 됨
1894년●광속도에 비해 음극선의 속도가 아주 느린 것을 발견
1897년●전자 발견.
1899년●전자의 전하량 측정. 전자와 수소이온의 전하량이 동일함을 발견. 전자와 광전효과에서 방출된 입자의 e/m이 동일함을 증명
1903년●'기체를 통한 전기전도' 출간.
1904년●원자의 건포도 모형 제시
1906년●노벨물리학상 수상.
1908년●작위를 수여받음
1910년●양극선 장치를 사용한 원자량 결정.
네온 동위원소의 발견.

199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강건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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