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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세계의 생명력 마이크로코스모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했을만한 엉뚱한 상상을 영화로 담는다는 것은 도박사와 벌이는 도박과 같다. 영화가 아무리 기발하고, 화면 속에 아이디어가 생생히 살아 숨쉰다 해도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현실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운 상상력의 열매를 맛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미 감독의 숨겨놓은 패를 훤히 읽고 있을 것이다.

‘투명인간이 된다’거나 ‘몸이 조그만해진다면’ 같은 진부한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질문 자체의 진부함까지 극복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순진한 상상을 스크린 위에 투영했다는 것 이상의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질문 속에 가려진 놀라운 진실들을 드러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기 눈알만한 잠수정을 탄다면

‘만약 우리의 몸이 굉장히 작아진다면’으로 시작하는 몇 편의 영화들이 있다. ‘이너스페이스’(Inner-space)가 그 대표적인 영화다. 조 단테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기발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 편의 유쾌한 오락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인간을 축소시킬 수 있는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초반에 그려진 진지한 연구소 분위기와 복잡한 기계 팔들로 빈약한 과학적 근거를 메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음모에 의해 엉뚱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감나는 인체 내부 묘사는 영화를 보는 이의 기쁨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를 지도처럼 들고 소인국과 대인국을 여행했던 나이 어린 상상력의 순례자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극장문을 나서야만 했을 것이다. 감탄의 탄성과 환호성을 자아내기에 영화적 상상력은 관객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또 아이작 아시모프의 ‘마이크로 탐험대’를 읽어본 독자들에겐 더욱 불만스러운 영화였으리라.

‘이너스페이스’의 많은 부분은 모기 눈알만해진 잠수정을 타고 사람 몸 속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들어가자마자 다시 커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대부분은 ‘내부세계’(in-nerspace)에서가 아니라 ‘바깥세계’(outerspace)에서 벌어지는 일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몸 속으로 들어가 봤으면”하고 벼르던 모험심이 강한 관객들에겐 영화가 줄곧 지루하기만 하다. 그래서 주인공 턱 팬들턴(데니스 퀘이드)이 자신이 들어가 있는 젊은이의 각막과 고막을 잠수정에 연결해 끊임없이 바깥 세상으로 탈출을 꾀하고 있는 동안, 상상력이 풍부한 관객들은 -영화와는 상관없이- 작아진 자신의 모습을 한껏 즐기기라도 하는 듯 인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짓궂은 장난을 일삼고 있었으리라.

젊은이와 팬들턴의 여자 친구인 리디아(맥 라이언)의 키스를 통해 잠수정은 젊은이의 몸에서 리디아의 몸으로 옮겨지게 된다. 어떻게 혈관을 통해 주입된 잠수정이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주인공 팬들턴은 리디아의 몸에서 자신의 의해 잉태된 태아를 우연히 보게 된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자식의 모습을 맞닥뜨린 아버지의 눈망울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덕택으로 팬들턴과 리디아는 화해하게 된다.

만약 이 영화에서처럼 사물을 축소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우리는 많은 일들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수술도 작아진 의사들에 의해 안전하게 수행될 수 있고, 굉장히 무거운 물체도 별로 힘들지 않고 운반할 수 있다. 또 자신이 만든 모형 비행기를 타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으며, 함께 놀던 인형들과 인형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물을 기분 좋게 축소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주는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는 절대 복종해야할 원리에 지배받고 있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어떠한 과정을 거치던 간에 반응 전과 후의 질량에는 변화가 없어야 한다. 질량은 에너지와 등가이므로 만약 에너지의 형태로 많은 질량을 저장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E=mC²)에 따르면, 우라늄 붕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야만 한다. 아이를 인형의 집에서 재우기 위해서 지구를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이저로 사물을 마음대로 늘이고 줄일 수 있다면 식량문제 쯤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엉터리 상상력, 엉터리 영화

우리가 설령 '질량보존의 법칙'을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애들이 6mm로 줄었어요'(Honey, I Shrink The Kids)는 어린이를 위해 만든 만화책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애들을 줄이게 되면 벌어질 새로운 문제들과 부딪히게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과학적인 논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레이저라면 사람들을 6mm크기로 줄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레이저 만능주의'로 영화는 사춘기 아이들4명을 차례로 줄인다. 대중들의 무지를 교묘히 이용한 이 영화에서 엉뚱하게 줄어든 4명의 사춘기 소년소녀들은 자신들의 집앞 잔디 한복판에서 갖가지 모헙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소년은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집안은 화목을 되찾는다는 미국 특유의 가족주의가 이 영화의 주제다.

‘걸리버 여행기’를 그림책이 아닌 소설책으로 읽은 관객이라면 아이들을 줄이는 일이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나단 스위프트라는 늙은 교구신부가 써내려간 ‘걸리버 여행기’는 2백60년 후에 일어난 영화적 실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는 주인공 걸리버가 항해 중에 난파하여 소인국, 대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나라 등으로 표류해 가면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는 가상의 여행기다. 오늘날에는 첫 2권인 소인국과 대인국 편이 다소 고쳐져서 아동물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인간이야말로 모조리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불만으로 가득찬 풍자소설이다.

1726년에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에는 작아진 소인국 인간들의 식사량은 어느 정도이며, 대인국의 대인들이 얼마나 먹어치우는지에 대해 꼼꼼히 기술되어 있다. 그들의 식사량은 소인들과 대인들의 에너지 소모를 정교하게 계산해서 얻어진 것들이다. 만약 키가 1백50cm인 아이가 6mm로, 2천5백배쯤 줄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 아이의 부피는 2천5백의 세제곱인 약 1.56×1010배만큼 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피부면적은 2천5백의 제곱인 6.25×106배만큼만 줄게 된다. 그동안 하루 세끼 식사로 잘 살아왔던 1백50cm 키의 그는 이제 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어진 피부를 통해 빼앗기는 엄청난 열 손실을 감당해야만 한다. 불행히도 그는 체온을 항상 37℃로 유지해야만 하는 인간인 것이다. 만약 약간의 과학적인 그럴듯함을 영화에 삽입한다면, ‘애들이 6mm로 줄었어요’에 등장하는 어린 주인공 4명은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줄기차게 무언가를 먹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잔디에 떨어진 과자부스러기에 환호성을 지르며 만족하는데 그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미시세계의 생명력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작아진 꼬마들이 정글처럼 탐험하는 잔디는 흉칙하고 볼품없는 플라스틱 덩어리들이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잔디 잎사귀와 보들레르나 좋아할 악마적인 인조 꽃들이 화면의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다. 꼬마들을 실어 나르는 개미나 위협적인 벌레들 또한 자연을 닮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또 아이들이 정말로 작아진다면, 6mm 꼬마들은 쉴새없이 날라드는 먼지와 모래들의 소낙비와 발 밑에서 소름끼치도록 스물거리는 박테리아들의 요동을 계속해서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애들이 6mm로 줄었어요’는 한 번도 개미만큼 작아진 몽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임에 틀림없다.

‘애들이 6mm로 줄었어요’의 후속편인 ‘애들이 커졌어요’(Honey, I Blew Up The Kids)는 적당한 레이저와 전자기파만 있으면 아이들의 키가 45m이상 커질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커질 수 있느냐는 순진한 질문은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화면들을 보게 되는 순간 차마 입밖에 꺼낼 수 없다. 킹콩보다 더 철없는 아이가 종횡무진 거리를 활보하면서 벌이는 난장판이 90분 내내 펼쳐진다. 사랑하는 아이가 순식간에 커져버린 한 가정의 난처한 상황이 아이만큼 커진 엄마의 모성애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우습지 않은 코미디를 만들었다는 것은 일종의 비극이다.

물리적으로 보면, 키가 1백배쯤 커진다면 속이 빈 풍선이 아닌 이상 무게는 부피에 비례하므로 1백의 세제곱배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발바닥이나 뼈의 단면적은 1백의 제곱배만큼만 증가한다. 그렇다면 한순간에 커져버린 아이는 뼈의 강도가 1백배쯤 증가하지 않는 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부러진 다리를 움켜쥐어야만 한다. 아이가 커지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다.
 

3년이 넘는 촬영기간을 통해 섬세하게 제작된 마이크로코스모스. 미시세계라는 또하나의 세계를 인간들에게 선물했다는 평을 받았다.


자연 다큐의 지침서 마이크로코스모스

미시세계의 생명력을 한껏 드러낸 '마이크로코스모스'(Microcosmos)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개미와 벌들이 우글거리는 곤충들의 세계 한가운데에 우리를 앉혀 놓는다. 그리고는 이슬 한방울에도 폭탄을 맞은 듯 힘없이 내동댕이쳐지는 곤충들의 일상과 소곤대며 피고 지는 꽃잎들의 속삭임과 개미 군단의 힘찬 발자국 소리에 귀기울게 한다.

인기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과는 달리 친절한 해설이 없다는 것은 관객을 객관적인 관찰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배려다. 관객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카메라가 이끄는 작고 재미있는 곤충들의 세계를 염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진의 의도는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다. 우선 관객은 곤충들의 생태계에 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1시간 20분간 펼쳐지는 곤충들의 말없는 사생활에 금새 지루해져버리고 만다. 곤충에게는 일생과도 같은 ‘하루’ 동안 벌어지는 그들의 다사다난이 다소 산만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이 영화의 흠이다. 그래서 관객은 카메라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연출자의 의도와 영화의 일관적인 흐름을 파악하는데 애를 먹는다.

소리를 지르며 곤충들을 하나씩 불러보던 아이들은 이내 영화에 지루함을 느끼고, 동심을 잃은 어른들도 경이로운 자연의 작은 세계를 잠시 훔쳐본 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영화는 동물과 곤충들의 생태계에 진지한 관찰이 담긴 ‘동물의 왕국’이나 아나운서의 재기 발랄한 목소리 흉내가 곁들어져 있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보다 재미있을 수 없다.

하지만 ‘마이크로코스모스’는 수년간에 걸쳐 세심하게 촬영된 장면들 하나하나와 ‘애들이 6mm로 줄었어요’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미시 세계의 경이로운 생명력이 한껏 드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날아가는 노란 나비에도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또 흙더미 위에서 우글거리는 개미떼들을 보기만 하면 습관적으로 짓밟아버리는 어른들에게 이 영화는 더없이 훌륭한 다큐멘터리 지침서다.

데이비드 보다니스의 ‘마이크로 하우스’(Micro House, 원제 Secret House)는 일상의 세계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미시세계의 훌륭한 안내서다. 숫자보다 주변의 사물들에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수학자가 세밀히 써내려간 이 책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작고 일상적인 사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펫 위에 자리잡은 먼지 진드기와 박테리아를 비롯해서 치약, 비누, 침대, 화장품 등 손만 뻗으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일상용품들의 작은 내면이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다. ‘마이크로 하우스’를 읽어 본 독자라면 ‘마이크로코스모스’가 이 책의 ‘자연’편임을 간파할 것이다. 만약 자신의 주변에는 징그러운 곤충들과 박테리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반드시 권해야 할 도서다.

이렇듯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시세계는 종종 우리가 평소에 간과했던 삶의 또다른 진실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미시세계에 대한 신비감과 경이로움이 곳곳에 배어 있는 영화들은 우리에게 일상의 작은 깨달음을 이끌어내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 생활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곤충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할 것이며, 박테리아가 보는 세상도 우리가 느끼는 세상과는 다를 것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는 그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우리가 ‘정적’이라고 부르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명활동을 지속하는 작은 생명들의 우렁찬 울부짖음이 우리의 고막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몸이 작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순진한 상상이 우리를 놀라운 자연의 신비로 눈뜨게 한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쯤이야 기꺼이 무시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마이크로코스모스'의 홈페이지에 가면 영화장면에 대한 설명과 제작과정 등을 알 수 있다(http://www.miramax.com/microc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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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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