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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얼음 사막 위의 안식처에 가다

남극 장보고기지 탐방기



“Stand by, stand by. All Station stand by.”

1월 30일. 선내를 가득 울리는 경보음과 함께 쇄빙연구선 ‘아라온(선장 김봉욱)’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리틀턴 항을 출발했다. 항해 예정 기간은 8~9일. 전체 출장 기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일정이었다.

제발로 얼음감옥에 들어가다

이번 아라온 호 탑승객은 조합이 다양했다. 아라온 호가 지나가는 길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남극장보고과학기지(이하 장보고기지)에 장비를 설치할 연구진이 있었다. 장보고기지 준공식에 맞춰서 홍보대사로 임명된 21C 장보고 주니어 대원(조부현(심석고3), 김백진(서일고1), 이하 장보고 주니어)과 함께 일부 취재진, 장보고기지 추가 건설인력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장보고기지의 첫 번째 겨울을 책임질 제1차 월동연구대가 아라온 호에 타고 있었다.

첫 번째 겨울인 만큼 월동대원의 임무가 막중하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나머지 단추를 잘 낄 수 있는 것처럼, 첫 번째 월동대가 잘 지내야 앞으로 장보고기지가 기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다.

월동대는 남극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두 장보고 주니어의 좋은 선생님이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에서 이미 월동을 경험한 대원들로 구성된 덕분에 ‘세종기지에서는 이랬다’며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곤 했다. 세종기지는 서남극으로 장보고기지와는 정 반대쪽에 있다. 남극반도 끝자락에 있는 킹조지 섬에 있는데, 이 근처에는 함께 겨울을 나는 기지가 8개나 있다. 기나긴 남극의 겨울에 월동대원들은 서로 기지를 오가며 외로움을 달래곤 한다. 이들에게 세종기지는 ‘호텔’로 통한다. 외국 월동대원이 오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잘 대접하고, 무선 인터넷 연결이 잘 되며, 평소 관리를 잘해 생활하기 편하기 때문이란다(남극 최대 기지인 미국 맥머도 기지에서도 외부와 인터넷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동남극에 위치한 장보고기지는 주변에 월동기지가 하나도 없다. 가장 가까운 기지가 약 350km 떨어진 맥머도 기지다. 헬기로 세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지만 시간 단위로 바뀌는 남극의 날씨는 그렇게 먼 거리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한다. 이 때문에 중장비를 담당하는 최영수 대원은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얼음 감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제발로’ 얼음 감옥을 찾아 들어갈까. 1차 월동대를 책임지는 진동민 대장은 “이미 남극에서 한 번 월동을 경험했다면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더 월동을 해보고 싶다고 할 것”이라고 말한다. 1년 동안 혹독한 남극의 겨울에서 월동을 무사히 끝내고 나왔을 때의 성취감을 다시 느끼면서도, 첫 번째에서 가졌던 아쉬움을 만회할 기회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남극을 제 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의사로 1차 월동대에 지원한 신진호 대원은 세종기지에서 월동할 때는 전문의가 되지 못한 인턴이었다. 전문의 시험을 미루면서까지 남극 월동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장보고기지 월동대원으로 돌아왔다. 이미 월동을 다섯 차례 지내고 또다시 남극을 찾는 김홍귀 대원도 있다. 왜 그렇게 남극을 찾느냐는 질문에 그저 웃으며 “남극이 매우 좋다”는 말만 남겼다. 과연 대체, 무엇이 남극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경이롭지만 삭막한 남극대륙

남극을 아는 사람의 경험담과 모르는 사람의 기대감을 태운 아라온 호였지만 실상은 뱃멀미로 시작해서 뱃멀미로 끝났다. 파도가 얼마나 심하던지, 책상이나 탁자에 물건을 둘 수 없었다. 설에는 떡국이 나왔는데 국물이 쏟아질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하던지…! 처음 사흘 간은 멀미를 잘 버텼지만 남위 60°에 가까이 갈수록 심해지는 파도에 결국 하루종일 침대 신세를 져야했다. 남극까지 가는 뱃길이 험한 것은 60° 부근에서 남태평양 해류와 남극 순환류가 만나 부딪히기 때문이다. 두 해류가 섞이면서 날씨와 파도가 격해진다. 기자가 머무는 선실은 3층에 있었는데 하루는 파도가 배의 3층까지 올라와 밤새 창문으로 새는 물을 닦기도 했다.

6일 째, 남위 60°를 넘어가면서 파도는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수평선 너머로 얼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는 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얼음이었지만 바다 시야에 익숙해있는 선원들은 저래 봬도 수km에 달한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 드디어 눈 덮인 육지가 보였다. 로스 해에 있고, 황제펭귄이 서식한다고 알려진 화산섬, 쿨만(Coulman) 섬이었다.

최고 높이가 1998m에 달하는 눈 덮인 산은 묘한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산에 눈이 많이 덮여도 나뭇가지 때문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마치 유리처럼 눈이 깨끗하게 덮여있는 산등성이를 보며 정말 남극에 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테라노바 만에 있는 장보고기지에 가는 길에는 해빙을 만났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라온은 얼음을 깨며 헤쳐나갔다. 얼음 위에서 쉬고 있던 펭귄들은 아라온이 내는 거대한 소리에 혼비백산하면서 바닷물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가끔 배 근처를 지나가는 온 몸이 눈처럼 흰 새인 스노우 패트럴을 제외하면 어떤 생명체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눈덮인 산과 얼음, 그리고 바닷물뿐. 괜히 지구상에서 마지막까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아니었다.

테라노바 만에 도착해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이는 파란 지붕 덕에 장보고기지는 쉽게 알아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아직은 공사를 하고 있어 여기저기 세워진 크레인과 컨테이너가 갈색 대지를 잔뜩 메우고 있었지만 배 주변을 날아다니는 남극도둑갈매기(일명 스쿠아)와 손을 흔드는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남극에 생물이 전혀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극의 상징인 펭귄이나 바다표범, 고래 같은 대형 동물도 있고, 물속에 사는 각종 조류나 남극 대륙에서 적응한 지의류도 있다. 그러나 어디서나 봤던 푸른 식물이 없다는 것이 계속 위화감을 만들었다. 세종기지 근처에는 꽃이 피는 식물이 두 종이 있지만 훨씬 남쪽에 깊이 들어온 장보고기지에는 없다. 장보고주니어를 인솔한 김지희 박사는 “이곳에서 현화 식물(꽃 피는 식물)이 발견되면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낼 만한 대형 논문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장보고기지 주변은 황량하다. 게다가 남극 중심부, 그리고 고도가 높은 곳에서부터 불어내려오는 활강풍(katabatic wind)이 수시로 불면서 눈과 먼지를 날린다. 강한 바람 덕분에 공사도 여러 차례 지연됐다. 활강풍이 심할 때면 몸이 밀려갈 정도라 컨테이너나 바위 뒤에서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집도, 나무도, 물도 없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동료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남극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똑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지만, 그럼에도 나가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얼굴을 세차게 때리던 바람이 계속 생각난다. 남극을 두 번, 세 번씩 찾는 월동대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날씨는 우리에게 아델리펭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극은 매우 건조한 곳이다. 눈이 잔뜩 덮여있지만 습도는 낮다. 온도와 습도가 동시에 낮기 때문에 눈은 잘 뭉쳐지는 함박눈이 아니라 부슬부슬한 가루눈이다. 아무리 열심히 쓸어도 바람이 한 번 불면 언제 치웠냐는 듯 바람을 타고 새로운 눈이 쌓인다. 바람 덕분에 이곳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방금 전까지 쾌청하다가도 순식간에 구름이 끼고 바람이 거세진다. 장보고기지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델리펭귄 서식지에 가려고 했던 날도 그랬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장보고기지에서 유일한 이동수단인 헬기가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래도 희망을 갖고 일단 헬기에 탑승하고 날아올랐지만 30분도 안 돼서 기지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도보로 걸어다닐 수 있는 장보고기지 근처는 스쿠아(남극도둑갈매기)의 천국이었다. 기지 근처의 돌밭은 갈색 깃털을 가진 스쿠아가 숨기에 완벽했다. 장보고기지를 나와 곤드와나 기지(독일 하계기지,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철수해 빈 기지였다)를 향해 걷다 보면 돌 사이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곤 했다. 스쿠아의 새끼였다. 이곳에 사는 스쿠아의 영역은 반경 15m 정도라 조금만 걷다 보면 다른 새끼가 보이곤 했다.

스쿠아는 한 쌍이 짝을 이루면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수 년 동안 함께 살아간다. 1년에 새끼를 두 마리 키우는데 ‘남극의 매’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크고 사납다. 세종기지 근처의 스쿠아는 크릴이나 새끼 펭귄을 사냥한다고 알려져있는데, 장보고기지 근처의 스쿠아는 조금 달랐다. 운이 좋게도(?) 스쿠아 서식지를 돌아보던 중 새끼 스쿠아가 삼켰다가 토한 먹이를 볼 수 있었다. 남극해에 사는 실버피쉬라는 물고기의 잔해였다.

스쿠아를 10년 동안 연구한 김정훈 박사는 올해 장보고기지 근처에 스쿠아가 대략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둥지를 파악하고 제법 자란 새끼에게는 발목에 플라스틱 고리를 채웠다. 김정훈 박사는 이 과정에서 곡예에 가까운 연구 방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새끼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근처에 있는 부모 스쿠아가 사람을 향해 위협 비행을 하는데, 이 때 스쿠아의 발을 낚아채 신체 길이와 무게를 재고, 유전정보 수집을 위한 혈액과 기생충을 채집하는 것이다. 마치 매 사냥꾼이 매를 날리는 듯, 손끝이 살아있었다.

스쿠아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작은 행운을 얻기도 했다. 곤드와나 기지 옆을 지나가는 작은 빙하에 황제펭귄이 찾아 왔다. 빙하 끝은 절벽처럼 깎여 있어 평소에는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눈이 온 직후라 얼음이 미끄럽지 않아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남극의 신사라는 별명처럼, 황제펭귄은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 우아하게 움직였다. 신기함과 호기심을 가득 담은 사람을 뒤로 한 채로, 한참 포토타임을 주더니 이윽고 빙하 끝을 향해 서서히 움직여갔다.
 








 

장보고기지, 갈 길은 멀어도 남극점을 향한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황량한 남극 대륙에도 지의류와 이끼가 살아간다. 바위에 얼룩덜룩 무늬를 만드는 지의류와, 바위 틈에서 푸른 색을 내며 자라는 이끼를 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진다(이끼를 자세히 보기 위해 장갑을 뺐다가 손시려워 죽는 줄 알았다!). 특히 지의류는 지표 생물이다. 남극의 춥고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움벨리카리아나 부헬리아 종의 분포에 따라 남극 환경 변화를 알 수 있다.

지의류 전문가인 김지희 박사는 이 곳에 로거라고 불리는 장비를 설치했다. 로거에는 온도, 습도, 광센서가 달려있는데, 지면 가까이에 설치해서 지의류가 실제 느끼는 환경을 기록하는 장비다. 기나긴 남극의 겨울을 거쳐 내년 여름까지 장보고기지 인근의 환경 조건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김지희 박사는 장보고기지 근처의 환경을 연구할 계획이다.

장보고기지를 떠나는 날까지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는 기후와 고층대기관측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준비도 되어있다. 온도, 습도, 기압 등 센서를 탑재한 관측장비를 상층으로 띄울 수 있는 라디오존데를 자동으로 띄우는 오토존데비양동이 들어설 예정이다. 또 오로라가 생기는 수백km 고층대기를 연구할 우주관측동도 들어선다. 두 연구의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 1차 월동대에 대기과학자인 최태진 박사와 우주과학자인 이창섭 박사가 포함됐다.

운석 탐사를 지원할 지질연구실도 장보고기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설이다. 춥고 건조한 남극의 자연 조건 덕분에 지구 밖에서 들어온 운석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있다. 운석을 채집해 습기를 완전히 말린 뒤, 청정하게 보관해야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장보고기지에는 이 운석을 보존하기 위한 1차 저장소가 준비될 예정이다.

사실 전부 ‘예정’이라고 쓴 이유는 장보고기지 준공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기 직전까지 과학자들이 연구 장비의 포장도 뜯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장보고기지 건설 공사가 계속 지연됐고, 3월까지 기지를 완성하기 위해 300여 명의 건설 인력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진동민 1차 월동대장의 마음은 ‘과연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딜 가든 1차 월동대의 목표는 “안전하게 월동을 하며, 기지가 빨리 정상운영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물과 식사도 준비가 안 돼, 건설인력의 샤워실과 식당을 함께 이용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월동을 포기하고 건설인력과 함께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동대는 첫 해를 무사히 보내겠다는 다짐으로 가득하다. 정호성 박사는 “세종기지를 처음 세웠을 때도 과연 무사히 겨울을 보낼 수 있을지 다들 걱정했다”며 “이미 월동을 경험한 베테랑들이 모인 만큼 훌륭히 겨울을 보낼 것”이라고 신뢰를 보냈다.

3월, 장보고기지 건설에 참여했던 인력이 모두 철수한 뒤에는 월동대의 외로운 1년이 시작된다. 근심과 설렘이 공존한 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남극의 흑야를 맞이한다. 서울에서 1만 3283km 떨어진 이들은 과연 어떤 소식을 전하게 될까. 남극 땅을 마지막으로 밟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겨울을 맞이하게 될 이들이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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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오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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