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의 대부분이 몰려 있는 도시 공간은 이미 포화상태. 그러나 공간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방치해두었던 땅 속을 주목하고 있다.
사례 하나. 레알 지하도시
프랑스 파리시 중심부 세느강 오른쪽면의 레알(Les Halles)에서 퐁피두 센터에 이르는 '레알 재개발지구' 는 지하에 아예 도시를 만들었다. 원래 16세기 파리시의 중앙시장으로 개설된 이곳은 19세기 나폴레옹 3세 시대에 건축가 바르탈리가 제안한 계획에 따라 크게 확장돼 파리 최대의 건축물로 변했다. 그리고 1969년 드골대통령에 의해 청과물 유통부문등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이 지역을 상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 조성하기 위한 재개발이 시작됐다. 국가와 시에 의한 계획된 이 재개발은 모든 시설을 지하공간에 건설하고 지상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레알이 건설된 시기는 크게 세단계로 나뉜다. 즉 교외고속철도(RER)의 역을 중심으로 한 포름데알(Forum des Halles)이 완성된 79년까지를 1기라고 한다면 수영장과 체육관을 포함한 문화시설이 완성된 86년까지를 2기, 그리고 해양센터가 개장된 89년까지를 제3기로 구분한다.
레알 제1기에는 교외고속철도의 7개 노선이 지하로 들어갔고 역앞 지하 25m에 길이 3백m의 중앙역이 세워졌다. 그리고 역과 지상까지의 3층 구조물에 쇼핑센터(2백20개 점포, 4만m2), 공공통로(1만m2), 지하도로망(4.5km), 주차장(4만m2, 1천8백50대 수용)이 설치됐다. 지하3층에는 버스플라스라 불리는 1천m2의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와 점포가 배열돼 있으며, 지하1층으로부터 지하3층의 각 층에 자연광이 들도록 설계됐다. 또한 통로부분은 24시간 개방돼 지상의 일반 거리와 같이 사용할 수 있다.
한편 2기에는 녹지공원이 조성된 지상 바로 아래에 음악홀, 극장, 도서관, 수영장, 체육관, 유도장 및 넓이 4백50m2의 열대 식물원이 세워졌다. 이 구조물들은 3층 높이의 천장에서 외광을 채광하고 있어 중세의 회랑을 연상시킨다. 제2기의 지하 1층은 6백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 형태의 오라토리움이 지하 2층은 포름데알과 연결돼 있다. 공공용 통로와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1만2천m2의 점포지역, 체육관, 수영장(50*50m), 사진과 비디오 화랑, 회의실, 과학연구실, 파리 콘세르바트와르 등의 시설이 있는 곳도 바로 여기다. 특히 수영장은 다면을 유리로 만들어 바깥의 식물원(천장을 유리로 만든 지하 온실)을 관상할 수 있다.
레알의 이용객 수는 문화시설이 개장되기 전에는 평일 10만명, 공휴일 20만명이었으나 개장 후 현재느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 지하 도로망 이용 차량만도 하루 7천대 이상을 헤아린다. 사람과 차의 안전을 위해 포름 데알 문화시설, 지하철, 주차장, 지하도로 각 구역마다 방재센터가 있어 중아 컨트롤센터에서 종합 관리된다. 또한 도로감시를 위해 지하도에 38대, 지상에 8대의 TV수상기가 설치돼 7초마다 화면이 바뀐다. 화재에 대해서는 3천-5천m2를 한 구획으로연기 탐지기가 설치돼 화재를 대비하고 있다.
사례 둘. 요빅마운틴아이스홀
지난 94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릴레함메르에서 약 45km 떨어져 있는 노르웨이의 도시 요빅. 이곳의 외곽에 위치한 요빅산 지하에는 지난 93년 8월 세계 최대규모 아이스하키장이 건설돼 동계 올림픽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린 바 있다.
요빅시는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지상에 체육시설을 세우려고 했으나, 지상 토지가 부족하고, 또 자연 경관을 보호하자는 여론이 강해 건설장소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난상토론 끝에 시 정부가 내린 최종 결정은 체육관의 지하 건설. 이 결정으로 시 정부는 무리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었고, 동계올림픽 이후에도 아이스하키 경기가 없을 때면 빙판을 제거하고 공연장이나 민방위 시설로도 활용하고있다. 요빅 마운틴 아이스홀이라 불리는 이곳은 총면적 1만5천m2(5천평)넓이에 길이95m, 지하공동 높이 24m의 규모로 6천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특히 61m에 달하는 내부의 폭은 공공 목적의 지주없는 인공 지하공간으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암반굴착기술, 냉.난방, 환기시설 등 이 분야의 세계 최첨단 기술이 총망라돼 투입된 이 시설은 경기장과 관중석의 온도를 다르게 조절하는 에어커튼(air curtain)이 설치됐다. 물론 유사시 관중들이 대피할 수 있는 대피시설과 소방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다양한 용도, 적은 비용, 높은 효율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외국 사례는 지하 공간이 활용 여부에 따라 삶의 질을 바꾸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협소한 국토면적, 과밀한 인구분포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도 국토의 70%가 산지와 임야로 채워져 가용토지와 에너지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특히 대도시의 경우 가용토지는 극히 제한돼 있으나 하수처리장, 주차장, 상수관련시설 등 도시기반 시설을 포함한 공공시설 확충에 관한 수요는 점차 증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많은 연구자들은 이전까지 무관심하게 방치해놓은 지하공간의 새로운 효용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지하공간은 에너지절약과 환경 및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하공간 개발기술의 발달로 지하공간 건설비가 감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값 상승으로 지하에 구조물을 건설하는 비용이 지상에 건설하는 비용보다 저렴해지고 있어 개발의 경제적 타당성도 높다.
또한 우리나라의 지질적 특성은 지하공간을 활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화성암, 혹은 화강편마암이 전국토의 3분의 2에 달한다. 또한 표토의 연약층도 앏다. 이같은 요소는 지하공간 개발이 활발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지반구조와 유사한 조건이다. 도시 기능을 확대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적인 입장에서 봐도 지하공간은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비산유국들은 지난 1970년대 유류파동을 겪으면서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비축시설을 건설했다. 국내에서도 정부 주도의 유류비축사업으로 79년부터 비교적 조기에 건설할 수 있는 지상 시설 건설에 착수해 81년도부터 원유를 저장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중반에는 지하 원유저장시설도 만들었다. 또한 LPG는 86년부터 국내 민간 지하저장시설에 위탁 저장했고, 88년 정부용의 지하비축기지가 완공돼 비축목표 지속일수를 60일로 유지하고 있다. 지하에 석유나 LPG저장고를 건설하는 것은 공사시간 면에서는 불리하지만, 최근의 땅값 상승을 고려한다면 장기적이 관점에서 지상 건축보다 훨씬 이득이다. 또한 지하공간이 가진 화학적 안정성은 지하암반과의 화학반응속도가 낮은 액체나 고체의 저장에 적합하다.
지하공간은 에너지 비축시설으로서의 활용 외에도 매우 쓸모가 많다. 식품이나 농수산물을 지하에 저장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 대규모 비축시설의 지상건축은 현재의 토지 비용면으로 볼 때 거의 현실성이 없다. 식품 저장고로 지하공간을 활용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으로는 우선 각 저장물에 요구되는 온도조절 및 습도조절이 용이하고 밀폐가 쉬우며 도난이나 해충 등에 의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15-20%의 곡식이 저장중에 손실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지하공간이 지상보다 얼마나 저장조건이 좋은지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혐오시설은 땅 속으로
지하공간은 이른바 혐오시설의 설치에도 좋은 대안을 제공한다. 91년말 현재 우리나라에 설립된 원자력 발전소는 모두 9기로, 이들이 생산해내는 전기는 5백35억kW에 이른다. 전체 사용 전력중에서 원자력 발전량이 차지하는 비중(47.5%)으로 보자면 세계에서 다섯번째 수준이다.
이같은 원자력 발전에 따라 91년 4월말 현재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중.저준위 폐기물은 3만5천8백50드럼, 사용후 핵연료는 1천6백48t에 이르고 있다. 당연히 폐기물처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계획대로라면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시설은 늦어도 지난95년말, 사용후 핵연료 중간시설은 97년말, 연구개발및 부대시설도 97년까지 갖추어야 원자력 산업이 무리없이 추진될 수 있지만, 안면도와 굴업도 등 정부가 선정한 핵처리 시설 후보지는 매년 지역 주민들의 심한 반발로 백지화 되고 말았다.
이같은 폐기물 처리에 지하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지하공간은 암반의 흡착에 의한 지연효과와 이동속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의 저장 및 처분에 적합하다. 핵폐기물 외에도 상품소비활동의 결과로 생긴 일반폐기물과 생활폐기물, 그리고 생산활동으로 생긴 산업폐기물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가 하수처리나 폐기물 처리와 같은 시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공간을 이용하려는 것은 어떤 이유보다 환경보호 측면에서의 장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는 활용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그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외부의 온도변화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단열성과 항온성을 이용해 지하 생물공장이나 암반 냉동창고 등을 건설하면 에너지 절약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지하공간이 가진 방진성과 저진동성을 이용해 진동에 영향을 받는 정밀기계 등을 설치하기 위한 구조물을 건설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