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호교수(KAIST 기계과)는 지난 94년 8월 영국의 브라이턴에서 열렸던 제 10회 국제열전달학회에서 현장 연구를 기반으로 한 '얼음골의 현상 분석(Numerical simulation of seaonal convection in an inclined talus)'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해당분야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송교수는 이 얼음골의 생성 원리를 국내 언론 매체에서는 처음으로 과학동아에 소개했다.
슬슬 여름휴가가 시작되고 있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한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얼음 어는 곳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피서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곳이 있다. 그것도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경남 밀양군의 '얼음골', 전북 진안군의 '풍혈.냉천', 울릉도 나리분지의 속칭 '에어콘굴', 그리고 경북 의성군의 '빙혈.풍혈' 이 바로 그곳이다.
그 중 경남 밀양군 천황산 기슭에 있는 얼음골은 천연기념물 2백24호로 지정될 만큼 '더위속의 냉장고' 로 유명하다. 얼음골이 있는 천황산과 주위에 있는 가지산 도립공원, 운문산은 영남의 '알프스'라고 해 좋은 등산 코스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더운 여름에 얼음이 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이제까지의 대답은 '명확한 이유 몰라' 였다. 또 일부 학자들이 구장한 '단열팽창(adiabatic expansion)' 현상이 그나마 가장 유력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단열팽창설은 얼음골의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했다.
단열팽창 아닌 자연대류
최근 송태호교수는 이전의 이론과 다르게 얼음골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먼저 밀양 얼음골의 지형에 대해 알아보자. 화산암으로 이뤄진 산이 풍화에 의해 부서지면서 산기슭에 너덜(talus)을 만들고, 이 너덜은 20~30cm 크기의 화산암이 쌓여 이뤄진 것이다. 이 너덜의 맨 밑에는 얼음골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화산암은 용안이 분출돼 급격히 식으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조가 치밀하지 못하고 미세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다공성의 돌이다. 이런 돌들이 얼키서키 쌓여 있어 공기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너덜을 통과할 수 있다.
겨울이 되면 공기의 온도는 영하인 반면 너덜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여름과 가을을 지내면서 데워졌기 때문에 상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공기의 부력 때문에 차가운 공기가 너덜의 하류부로 유입된다. 차가운 공기는 돌로부터 열을 빼앗아 데워지면서 너덜의 상류부로 올라가고, 돌은 너덜 아래부터 점차로 차가워진다. 그래서 겨울이 끝날 때 쯤이면 너덜의 온도를 외부의 온도와 같게 만든다.
그러다 계절이 바뀌어 초여름이 되면 겨울과는 정반대의 조건이 된다. 즉 너덜 안의 공기는 차갑고 밖의 공기는 따뜻한 것이다. 이젠 겨울과는 반대로, 차갑기 때문에 밀도가 높은 너덜 안의 공기가 너덜 밖으로 흘러나가고 너덜 상류부에서는 따듯한 공기가 흘러들어 온다. 따뜻한 공기는 차가운 돌과 열교환을 하면서 점점식기 때문에 차가운 공기가 얼음골로 계속 나오게 되지만 초가을이 되면 너덜이 따뜻한 공기로 모두 데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은 시원한 공기가 나오지 않는다.
초여름에는 얼음까지 어는 얼음골에서 언제까지 시원한 바람이 나오느냐는 지난 겨울이 어떠했느냐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보통 6월말까지는 얼음골에서 얼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으므로 7월초까지는 얼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송교수는 예상했다.
이런 현상을 송교수는 "자연 대류에 의해 겨울철의 냉열이 돌에 저장돼 있다가 방출되는 재생기 효과(regenerator effect)"라고 설명했다. 즉 온도의 변화에 취약한 화산암들이 다공성 축열조를 이루면서 겨울에는 냉기를 저장하고 여름에는 온기를 저장해, 여름에는 겨울의 냉열을 내뿜고 겨울에는 온기를 뿜어내는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인근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여름철에 비가 오면 너덜 위에는 안개가 서리게 된다는 것이다. 너덜이 차갑다는 얘기다.
송교수는 "단열팽창 때문에 얼음골이 생긴다면,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냉기를 뿜어야 하고, 지하에 대단히 놓은 압력원이 있어야하며, 뿜어져 나오는 냉기의 속도가 초속 1백m정도의 고속 제트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얼음골 부근에는 그러한 압력원이나 제트소음이 없을뿐더러 여름에만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얼음골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너덜을 이루는 돌의 크기는 20-30cm가 적당하다. 돌이 너무 작으면 공기의 저항이 크고, 너무 커 버리면 공기와 돌이 접하는 면적이 적어 열전달이 충분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돌의 재질은 계절적 온도 변화에 따른 열응력에 쉽게 쪼개지는 화산암이 좋다.
거기다 어느 정도의 너덜의 깊이와 길이가 확보돼야 한다. 즉 공기와 충분한 열전달이 가능한 체적이 있어야 한다. 송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얼음이 얼기 위해서는 너덜의 길이가 적어도 5백m는 돼야 한다. 너덜의 경사도 중요하다. 너덜의 체적이 작다 하더라도 경사가 작으면 공기가 흘러가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열전달이 충분히 이뤄져 얼음골이 될 수 있지만, 경사가 너무 급하면 공기가 흘러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얼음골이 되기 어렵다. 이렇게 "바위들이 적당한 크기로 부서져 적절한 체적과 경사를 이루고 있다면 다른 어느곳에서라도 얼음골은 생길 수 있다"고 송교수는 주장한다.
자연산 냉장고
한편 얼음골과는 약간 다른 메커니즘으로 생성되는 얼음굴이라는 것이 있다. 산기슭에 깨진 바위층 계곡이 얼음골이라면 얼음굴은 비탈진 언덕 지하에 생성된 동굴로 외부와 통하는 통로가 있을 때 생성된다. 즉 굴 주위의 땅이 열저장매체로 작용해 계절적으로 재생기효과가 나타난다. 얼음굴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모두 차가운 현상이 나타난다.
겨울에는 차가운 공기가 굴 안으로 유입돼 굴 안을 식히면서 외부보다 아주 조금이나마 더운 내부공기가 부력으로 쉽게 굴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여름이 되면 밖의 온도는 높은 반면 굴 내부의 공기는 차갑고 밀도가 높아 안정하기 때문에 차가운 공기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고 그대로 굴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런 것을 열 다이오드 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얼음굴은 전국 도처에 있는데, 밀양의 얼음골 근처에도 얼음굴이 있다.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 스승의 몸을 해부하고 사체를 저장했다고 전하는 곳이 바로 그 얼음굴이다.
송교수는 "얼음골이든 얼음굴이든 생성매커니즘을 잘만 이용하면 겨울의 냉열을 적절한 매체에 잘 저장했다가 여름에 냉방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대형건물애 적용하면 경제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송교수가 설명한 얼음골의 원리는 앞에서 말한 전북 진안의 '풍혈 냉천' 이나 울릉도의 '에어콘굴', 그리고 경북 의성의 '빙혈 풍혈'의 원리도 설명 가능하다. 이번 여름에는 자연산 냉장고로 피서를 떠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단열팽창
단열팽창이란 외부와 열교환 없이 부피가 늘어나는 것이다. 부피가 늘어나는 것은 압력이 낮아진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단열팽창현상이 일어나면 온도가 떨어지게 된다. 플라스크 안의 공기를 갑자기 빼면, 플라스크 주위에 하얗게 서리가 끼는 것이 바로 이 단열팽창이다.
자연적으로는 단열팽창이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예를 굳이 찾자면 기상 현상 중에서 산을 넘어가는 기류가 저기압, 즉 높새바람이다. 산을 올라가는 상승기류는 단열팽창해 온도가 낮아지고 이때 공기 속의 수분이 모두 응축해 비를 내린 후에, 산너머로는 메마르고 따뜻한 바람이 분다.
밀양 얼음골 가는길
방법 1
밀양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얼음골에 가는 직행버스를 타면 된다. 약 50분 정도면 밀양군 산내면 남명리 버스 종점에 도착한다. 천황산 쪽으로 가면 얼음골 관리사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3백m를 올라가면 천황사가 있고, 그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가마골협곡, 오른쪽으로 가면 얼음골이다. 얼음골에 접어들면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는데, 여기서 손을 번쩍들어보자. 지상에서 1m정도까지는 차가운 공기지만, 그 위로는 더운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방법 2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언양인터체인지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밀양쪽으로 23km를 가다보면 왼쪽으로 얼음골로 접어드는 길을 만난다. 비교적 표지가 잘 돼 있고 주차도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