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 4일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들이 서울에 모인다. 10일까지 개최되는 아태이론물리센터(APCTP)의 창립축하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중에는 노벨상을 받은 학자들과 매번 노벨상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물리학자들이 많다.
중국 출신의 양첸닝(楊振寧)은 리충다오(李政道)와 함께 자연의 공간 대칭성 연구로 1957년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R. 슈리퍼는 초전도현상을 설명함으로써 197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밖에도 소립자 실험분야에서 1976년 노벨상을 수상한 S. 차오충팅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 동양권에 처음으로 국제 연구소가 생긴다는 점 때문이다. 유럽대륙에는 유럽핵물리연구소(CERN)가 있고, 아메리카 대륙에는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FNAL)가 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또 하나의 연구소가 서울에 설립될 아태이론물리센터다.
명실상부한 국제 연구기관
아태이론물리센터의 모델은 스위스에 있는 유럽핵물리연구소와 이탈리아에 있는 국제이론물리센터(ICTP). 유럽공동체(EC)에서 운영하는 유럽핵물리연구소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나 입자물리만 연구하고 있다. 또 유네스코 산하에 있는 국제이론물리센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라기보다는 주로 제3세계 학자들을 위한 연구소로서 거의 모든 비용을 이탈리아가 부담함으로써 한 국가의 국제적인 연구소로 전락해 간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비해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아태권에 있는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대만 등이 함께 비용을 내 운영하는 명실상부한 국제 연구기관이다.
오래전부터 아태이론물리센터를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1989년 아태지역의 대표적인 이론물리학자들이 일본 쓰쿠바에 있는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KEK)에 모여 처음 공론화했다. 그리고 1993년 2월 설악산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 이론물리 겨울학교에서 국제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공식화됐다.
한국이 유치국으로 결정된 것은 지난 1994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아과학협력기구(ASCA) 총회에서였다. 베트남의 발의로 많은 국가들이 동의함으로써 일본과 대만 등 유력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는 평소 국제적으로 많은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뒷얘기다.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지난 해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지원받았지만 올해부터 과기처에서 예산 등을 지원받고 있다. 그러나 아태이론물리센터는 아태지역의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국 정부(과기처)는 단지 장소와 일정 예산만을 지원할 뿐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순수하게 진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예산은 계획대로 지급되지 않고, 운영인력 역시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대에 임시 캠프를 치고 각 대학에서 조교들을 차출해 이번 행사를 준비하는 것조차가 국제적인 이론물리센터를 세우는 것치고는 웬지 빈약해 보인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지난 2월 일본에서 재단 설립 발기인대회가 있었고, 4월에는 서울에서 창립이사회가 열렸다. 여기서 창립이사로 양첸닝(뉴욕주립대 석좌교수, 1957년 노벨물리학상), 리유안체(대만학술원장, 1986년 노벨화학상), A. 아리마(일본물리화학연구소장, 전 동경대 총장), G. Z. 조우(중국학술원장), 그리고 한국의 김제완(서울대 교수)과 조용민(서울대 교수) 등 15명이 선출됐다. 그리고 양첸닝이 초대 재단이사장 겸 센터소장을 맡았다.
아태이론물리센터는 고등과학원과 함께 홍릉 과학기술원 자리에 생긴다. 고등과학원이 여러 분야의 연구를 하는 국내 연구기관인 점에 비해 아태이론물리센터는 국제연구기관으로서 이론물리에 한정된 연구만 한다.
아태이론물리센터에서 하는 일을 열거하면 고에너지물리 핵물리 우주론 비선형물리 통계물리 플라스마물리 전산물리 등의 연구부문과 우수 연구인력 양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아태이론물리센터가 서울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얻는 실익(實益)은 먼 외국으로 박사후과정 등을 마치려고 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또 유명한 학자들이 자주 오게됨으로써 그 파급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지난 해 12월 말 서울에서 개최된 응집물리에 관한 국제학회와, 금년 2월 우주론과 중력에 관한 학회가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열려 벌써부터 센터 설립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미나가 이제 연중 행사로 이뤄질 것을 생각하면 아태이론물리센터의 유치가 갖는 의미는 자못 크다.
사무총장으로서 센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조용민교수는 그 의미를 좀더 쉬운 곳에서 찾아 줬다. "이제 서양에 가서 연구하고 공부할 때가 지났다. 그동안 동양권 출신들이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받은 서러움은 매우 컸다. 또 그곳에서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잘못된 편견마저 갖게 된다. 동양에 세계적인 연구소를 만들어야겠다고 의견을 자연스럽게 모으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생각들이 모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