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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의 수수께끼' 그 감추어진 이야기들

창간 10주년 특별부록 비디오 프로그램 해설기사

과학동아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독자에게 선사하는 비디오 부록 고대문명의 수수께끼는 이집트의 테베사원, 과테말라의 마야문명, 그리스의 아테네문명, 그리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사원이 간직한 비밀을 담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문명의 수수께끼'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소개한다.

EGYPT
도굴에 난도질 당한 파라오의 세계

 

이집트의 상징물 피라미드. 기원전 2680년경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파라오의 무덤으로, 건축 방법을 둘러싸고 아직은 많은 비밀이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인류 역사상 이집트의 통치자만큼 권세를 누린 절대군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집트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파라오라 부르며 '살아 있는 태양'으로 신격화했다. 이 가운데 제19왕조의 4대 왕인 라메스 2세는 신왕조 시대 최고의 융성기를 구가했던 군주로 꼽힌다. 실제 많은 신전이 그의 재위기간(BC 1290-1223)중 건조됐다. 그는 나일강의 델타 북동부에 왕도 페르라메스를 만들었으며, 아뷰도스, 테베, 누비아의 아부심벨 등에 신전 장례전 신문 등을 세웠다.

'이집트' 하면 떠오르는 피라미드 역시 절대군주의 힘을 읽을 수 있는 증거물이다. 물론 피라미드가 세워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고대 이집트 국왕과 왕비, 왕족의 무덤 중 한 형태라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시기는 라메스 2세 이전인 초기 왕조시대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특히 제 3-5왕조는 '피라미드 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피라미드 건조는 예로부터 이집트에 내려오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피라미드들은 어떻게 세워졌을까. 피라미드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인데, 여기에서 그는 10만명이 3개월을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 정확한 축조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피라미드를 건조하면서 닥쳤던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의 연구는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안쪽 측면에서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정한 높이마다 석재를 쌓아놓고 피라미드의 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이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정상까지 다 쌓고 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해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알려진 피라미드는 80기(基)가 있으나 이 가운데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자연에 의해 파괴되거나 사람의 손길에 의해 부서졌기 때문이다. 특히 도굴꾼들에 의한 훼손은 자연의 힘보다 훨씬 파괴적이었다.

기원전 16세기 이집트를 통치했던 파라오 투트모시스 1세는 왕의 유해를 '왕의 계곡'에 매장한 최초의 왕이다. 그는 1천7백년 전부터 계속됐던 피라미드의 조영을 단념하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산골짜기 암굴에 은밀하게 왕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러나 도굴꾼들은 이 마저도 알아내 부장품을 파내갔다.

투탄카멘 왕의 피라미드가 유명한 까닭은 그가 재위 기간 동안 큰 업적을 이루었다거나(그는 불과 9년간 통치하다 18세에 죽었다) 묘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 아니다. 왕의 계곡에 서 있는 그의 묘는 라메스 6세의 무덤 아래에 위치해 있어 입구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영국인 고고학자 카터와 카나본 경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바로 도굴을 면한 몇 안되는 피라미드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의 이름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쿠푸왕 피라미드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문명의 수수께끼'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테베 사원은 원래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신왕국시대에 들어와 아몬신이 국가신이 되자 역대 왕들이 앞다투어 증 · 개축을 하는 바람에 규모가 커졌다. 여기에는 스핑크스 참배로, 하쳅수트여왕의 오벨리스크, 투트모시스 3세의 축제전 등 수많은 유적들이 널려 있다.

MAYA
하늘의 이치를 꿰뚫은 남미 인디오의 조상


마야는 고대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인디오들이 건설한 문명이다. 마야 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이 가운데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열대우림지역이었다. 마야족의 조상은 북미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해 기원전 3천년 경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야 문명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은 고전기라 불리는 서기 300년 경. 이 융성기는 900년까지 이어지며 600년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마야는 잘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도시간의 교역도 번창했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농업에 종사했다. 평민들은 주로 단칸방의 초가에서 살았는데, 50-1백호마다 제단이 마련돼 있어 하나의 취락단위를 이루었고, 이들 취락은 대신전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의 중심은 다른 고대문명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이었다. 마야의 귀족계층은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에 살며 천문 역법 신학 등 당시를 포괄하던 모든 학문을 독점하고 있었다. 사실 마야 문명이 현대인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부분은 밀림 속에 세운 거대한 건축물만이 아니다. 천체와 우주에 대한 마야인들의 탁월한 식견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당시까지 유럽을 비롯한 세계 어느 지역에서 사용했던 것보다 훌륭한 일력(日曆)을 가지고 있었던데서 잘 드러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마야인들은 세계를 네 방향으로 나누어 각 방향마다 색을 표시해 구분하면서 천공에 13층, 지하에 9층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 천체의 운행을 여기에 맞추어 설명했다. 또한 천체의 위치를 길고 짧은 2개의 일력으로 표시하고 이를 신성문자로 표기했다.

마야의 일력은 2백60일의 단력과 3백65일의 장력에 의해 동시에 표현됐다. 사람의 운명 역시 이를 짝맞추어 나타나는 4개의 부호에 따라 정해진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의례가 이에 따라 시행됐다.

천체 관측 역시 엄격하게 실행돼 태양의 방위, 달과 별의 운행은 물론 금성과 화성의 이동법칙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같이 마야인들의 천문학이 놀랄 정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수학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0이란 숫자를 처음 발견한 것은 인도 힌두교인이었지만, 0을 수의 시발점으로 삼아 10진법을 사용한 것은 마야인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0을 얼굴 눈동자 꽃 그림 등으로 표시했다.

경제조직 천문학 일력 숫자 예술 문학 등의 분야에서 경이로운 발전을 이룩했던 마야문명.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마야는 15세기 중엽 토양 황폐와 부족간의 전쟁으로 쇠퇴하기 시작, 16세기에는 스페인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ATHENE
예술의 극치 이룬 '처녀의 방' 파르테논신전

 

아크로 폴리스^ 아테네시 남쪽 해발 1백56m의 석회암 대지의 세워져 있다.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상공업이 상당 수준으로 발달해 있던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 중 가장 유력한 폴리스였다. 고대 그리스 아타카 지방의 중심지였던 이 곳에서 현대 서양의 과학 철학 문학 등 제 분야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경제적인 뒷받침 덕이다.

아테네 문명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은 기원전 5세기 초 두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부터. 이 이후 자국의 민주정치에 자신감을 갖게 된 아테네는 인접 폴리스를 설득해 '델로스 동맹'을 체결(기원전 478년)하고 그 맹주에 오른다.

델로스 동맹 이후의 약 50년간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다. 여러 나라에서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아테네로 몰려들고,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학자와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작가들이 배출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전 건축이나 조각 회화 등의 예술도 꽃을 피웠다. 이 가운데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극치를 보여준다. 기원전 447년에 기공해 기원전 438년에 완공된 이 신전은 8개의 기둥이 정면을 바치는 직사각형(30.87x69.51m)의 모습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내부는 동서로 나뉘는데, 동쪽에는 전면 6개 기둥의 전실을 두고 3 면을 열주로 둘러싼 본전이 있으며, 서쪽에는 후 실과 이어진 보물 창고가 있다. 그리고 본전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m의 본존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안치돼 있다. 파르테논이란 '처녀의 방'이란 뜻으로, 서쪽에 있던 보물 창고를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

신전을 장식한 조각에는 이외에도 동 서 양쪽 박공(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이나 벽)에 여신 아테나를 칭송하는 군상 조각을 배치하고 위쪽 4면의 외벽에는 신화에 등장하는 태고의 전쟁이 부조돼 있다.

황금비를 구현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인간의 시각적 착각을 이용,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우선 이 신전의 기둥들은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을 향해 약간 기울어져 있다. 놀랍게도 이 기둥들은 하늘 위 17km 지점에서 한 정점으로 수렴되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또 각 기둥의 사이도 일정하지 않아 조금씩 차이가 나며, 그 중심부분이 약 30cm 정도 불룩하게 솟아 있다. 한마디로 이 건축물에는 직선이 없는 것이다.

ANGKOR
신과 하나되기 위한 크메르 건축의 독창력

 

앙코르와트는 애초 힌두교 사원이였으나 나중에 불교사원이 된 석조 건축 유적지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약 2백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앙코르는 고대 크메르왕국의 중심지다. 이 곳에는 동서로 약 20km, 남북으로 10km에 걸쳐 거대한 유적군이 산재해 있다. 앙코르와트(Angkor Vat)는 앙코르톰과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앙코르란 '나라' '도읍'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범어)가 캄보디아 사투리로 변한 것이고 와트란 '왕도'의 의미.

고대 크메르인들은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었던 신과 하나가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왕들은 자신의 사원을 건립했다. 대략 12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리아바르만 2세가 비슈누신과 합일되기 위해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아 세운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바깥벽은 동서 1천5백m, 남북 1천3백m의 직사각형으로 서쪽을 향해 있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1백90m의 너비를 가진 성 밖으로 둘러판 못(垓字)을 건너면 3기(基)의 탑과 함께 기다란 행랑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를 따라 4백75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웅장한 방추형 중앙사당과 탑의 사방에 십자형으로 뻗어 있는 행랑, 그리고 이를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이 이 사원의 주요 건축물. 세계의 중심이자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을 돌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m의 중앙사당 탑 끝에서 행랑의 사각탑 끝을 연결해보면 사각추 피라미드 모습이 된다. 이 사원의 건축 양식은 인도의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을 살펴보면 크메르인들의 독자성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전장 7백60m에 이르는 제1 회랑 벽의 부조나 제2 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기둥, 탑 등은 하늘의 요정 아프살라와 부채처럼 머리를 치켜든 여러 마리의 뱀을 새긴 부조와 함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크메르인만의 것이다. 앙코르 왕조는 13세기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해 15세기에는 밀림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졌던 이 사원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61년 표본 채집을 위해 정글을 뒤지던 프랑스의 박물학자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앙코르와트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에는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차지하는 20년간의 지루한 전화에 시달리면서 거듭 훼손당하는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 82년 이루어진 한 조사는 이 지역의 중요 유물 3백점 이상이 사라졌으며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 불능의 상태로 파괴됐다고 보고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네스코는 92년 앙코르와트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 이 지역의 복구를 지원하고 있다.
 

199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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