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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연구의 선구 로버트 와인버그 Robert Weinberg

평범했던 학생이었지만 외인버그는 성실과 일에 대한 집착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 분자 생물학자로 성장했다.

1978년 겨울,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던 어느날, 눈이 수북하게 쌓인 보스턴 찰즈강을 가로 지른 롱 펠로우교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이있었다.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 30대초반의 이 젊은 과학자의 머리속에서는 뒷날의 암연구에 새로운 경지를 열게 한 위대한 구상이 떠 오르고 있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분자생물학자 로버트 와인버그는 인류최대의 적인 암은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세포속의 유전 암호의 배열순서가 뒤틀려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연구실로 돌아와 이 구상을 이론화 한 뒤 4년만인 1982년 실험적으로 증명함으로써 마침내 암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오늘날 노벨상 물망에 오른 여러 과학자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업적을 올린 과학자로 꼽히고 있는 그는 독창력과 과학자로서 보기 드문 추진력을 아울러 갖춘 세계 분자생물학계의 스타로 평가되고 있다.

특색없던 어린시절

그러나 오늘날 와인버그를 과학계의 걸출한 인물로 만든 그 추진력이나 독창성을 그의 어린 시절에는 좀체로 찾기 어려웠다. 그는 1942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젊은 치과의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학대가 심해지면서 그의 가족은 지구 여러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와인버그의 부모는 간신히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와인버그는 4살때까지 독일어 밖에 몰랐다. 그는 어린 시절 회상하면서 너무나 안일하고 평탄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애들처럼 장난이 심해서 팔이 부러진 일도 없고 병에 걸린 기억도 없으며 별다른 취미도 없었다. 그의 가족은 시간나는대로 고전음악에 심취하고 다른 가족 이야기로 세월을 보냈다. 어린 와이버그는 과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스포츠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와인버그가 15세 되던해에 야구경기장으로 데려가 미국인의 기질을 불러 넣으려고 했으나 그는 야구팬이 되지 못했다. 그는 한때 유태교의 율법박사가 되어 보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이런 생각은 얼마 뒤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 와인버그가 MIT 학부에서 의학예과 과정을 밟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직업이 영향을 미쳤던 것 같고 또 그밖에는 관심이 있는 학문이 별로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시절에 과학을 전공하겠다는 평생의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뚜렷한 목적도 없이 생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시절에 그는 초라하고 행복하지 못한 학생측에 끼었다.

어쨌든 1964년에 MIT를 졸업하고 다시 박사학위과정을 밟기 위해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와인버그는 그가 MIT 대학원으로 진학한 이유는 "그곳이 나를 받아준 유일한 곳이었고 그들은 나를 성적으로 보고 받아 준 것이 아니라 나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수준에서 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와인버그의 이런 자화상은 다른 사람이 본 그의 평가와는 다르다는 것은 학위를 받은 뒤 저명한 연구소에서 그의 포스트닥(박사학위를 받은 뒤의 수련연구과정) 신청을 지체없이 받아 들였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와인즈만 연구소와 캘리포니아주 솔크 연구소를 거쳐 MIT로 돌아 왔으며 연구원으로서 1975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탄 데이비드 볼티모아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발암유전자의 추적

와인버그가 모교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할 무렵인 1970년대 초에 과학자들은 동물의 암 바이러스와 유전자를 연구함으로써 발암(發癌)유전자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결국 이들은 동물세포에서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속에 상대를 가진 유전자를 발견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립암연구소의 '조지 반데우드'와 '에드워드 스콜니크' 그리고 캘리포니아대학(샌프란시스코)의 '해롤드 바머스'와 '마이클 비숍'과 같은 연구자들은 10여개의 이런 유전자들이 물고기에서 원숭이(인간은 제외)에 이르는 거의 모든 척추동물에게 있다는 것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유전자는 그런 바이러스에 특유한 것인가? 또는 세포 DNA(유전자의 본체를 형성하는 고분자물질)조각을 훔친 뒤 이것을 자기들의 유전물질속에 합친 것인가? 오늘날 와인버그등의 실험에서 나온 증거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으며 바이러스가 암을 일으키는 것은 다른 세포로부터 납치한 특정한 유전자를 '태우고'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 단계는 이들이 발견한 유전자들이 바이러스의 도움없이 실제로 암을 일으킬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암 발생원인의 규명
 

MIT에서 암유전자에 대해 토의하는「와인버그」박사


1980년에 이르러 와인버그 및 그와는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던 보스턴의 '시드니 파버'암연구소의 '제프리 쿠퍼'가 이 증거를 제공했다. 이들은 각각 인간의 종양세포에서 절취한 DNA를 정상적인 쥐의 세포에 옮기면 암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이 증거는 세포의 DNA가 암발생 정보의 창고구실을 한다는 것 까지는 밝혀주었으나 이 정보원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혀야 하는 일이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간 와인버그, 쿠퍼 및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마이클 위글러는 인간의 방광, 폐, 결장, 유방 및 임파조직의 암과 백혈병형태를 일으키는 실제 유전자을 가려냈다. 1982년 봄에는 와인버그, 쿠퍼 및 스콜니크는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인간의 암유전자는 동물의 암 바이러스속에 있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같은 무렵 미국립암연구소의 '마리아노 바바시드'와 '스튜아트 아론슨'도 인간의 방광암 유전자를 동물의 암 바이러스와 연계 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깨끗한 원(原)발암유전자와 가공할 발암 유전자로 전환된 것간의 정확한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와인버그는 스콜니크와 미국립암연구소의 '더글러스로위'와 함께 적어도 방광암 유전자에 대한 해답은 얻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유전자를 형성하는 수천개의 유전암호중의 하나인 뉴클레오티드의 변형이었다.

2중나선(나선계단과 같음)DNA에서 하나하나의 사닥다리는 아테닌(A), 티민(T), 구아닌(G) 및 시토닌(C)등 4개의 서로 다른 염기(塩基)중 2개로 이루어진다. 이 염기는 3개의 글자로 된 배열순서를 되풀이 (예컨데 A-T-C, C-T-A)하면서 모든 생물에 공통되는 단백질의 구성블럭인 아미노산을 생산하기 위해 각 유전자내의 암호글자를 제공한다. 와인버그등의 발견은 당초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나의 배열 순서는 정상적인 G-G-C가 아니라 그대신 G-T-C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DNA 염기화학물인 구아민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 변화가 세포의 조절 메카니즘을 교란하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을 생산하는 원인이 되었다. 와인버그는 발암인자가 유전자에 영향을 줄 때 G 대신 T로 대치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와인버그 그룹의 발견은 발암인자가 염색체의 여러 부분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켜 세포의 종양을 만든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일부의 암관계의 문헌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와인버그는 이들의 연구결과로 염색체 위의 수천군데에서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정한 한군데인 DNA의 일정한 길이위에서 변화가 생긴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바이러스의 역할에 관해서도 "미국에서 발생하는 암의 95-98%까지는 바이러스가 원인이 아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의 연구로 암은 흡연, 식품첨가제, 환경오염등 발암물질이 유전자를 손상시키는 결과 생기는 것이며 그의 말을 빌면 "우리의 유전자속에 우리자신이 암의 씨를 나르고 있다는 생각은 옳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철저한 실험생물학자
 

실험실에서의「와인버그」박사


만약에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사람의 세포는 하나하나가 잠재적으로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30-50개(약 5만개의 염색체 중에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1백여 형태의 암에서 그 용의자를 찾는 일은 종전보다 훨씬 쉬어질 것이다. 그래서 발암유전자의 발견과 실질적인 확인은 의학연구계에 커다란 흥분을 자아냈고 암연구의 활성화의 길을 텄다. 수십년동안 이렇다할 성과없이 좌절감에 빠져 있던 암연구계는 와인버그 그룹의 연구로 처음으로 암이 생기는 방법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연구의 범위는 소수의 유전자로 좁힐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예컨대 암 유전자가 만든 단백질을 탐지하는 검사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암을 조기 발견하는 길을 텄다. 이리하여 결국 발암유전자의 무서운 메세지를 방해하거나 또는 봉쇄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내다 보고있다. 와인버그의 이 획기적인 연구결과는 그의 줄기찬 노력외에에도 "실험은 생물학에서 유일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입력이며 모델이나 이론은 가치없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증거서류를 갖출 때까지는 무엇이든지 회의적인 눈으로 본다. 그는 철저한 실험생물학자답게 실험 자료의 제시없는 연구결과에 관한 이야기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

흔히 '현대 생물학계의 귀재(鬼才)'라고 불리는 와인버그도 집에 돌아 오면 몹시 가정적인 한사람의 평범한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 큰 일이없으면 연구실에는 아침 10시부터시작 6시까지 일한 뒤 곧장 집으로 돌아 온다. 그의 가족은 10년전에 결혼한 전직 국민학교 교사였던 애미 부인과 두자녀가 있다. 그의 말은 "자기의 일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어서 아침저녁은 집에서 떠나지 않게 노력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나의 전문분야의 일을 더많이 한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나의 생활이 더 즐거워지는 것은 아니다. 또 나의 과학이 더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족보연구에 남다른 흥미가져
 

딸을 업고 산책


그의 취미라면 추(秋)해당을 가꾸는 일이다. 그는 영화, 연극이나 또는 음악회에가는 일도 거의 없다. "두 아이들이 나를 너무 바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와인버그는 6년계획으로 뉴 햄프셔에 별장을 손수 착공했다. 그는 우선 집터를 닦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계획을 작성하고 집틀을 끼우고 발전기를 만들었으며 정원을 설계했다.

"나는 언제나 건축업자나 농부나 또는 정원사가 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판자를 함께 모아 못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구멍을 얼마나 깊게 팔 것인가 또는 나무를 어디에 심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면 나로서는 모두가 과학처럼 흥미 진진한 일들이다."

와인버그의 음악의 취미는 바하에서 브람스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있다. 그러나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작곡가의 것은 하나도 듣지 않는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색다른 취미가 있다. 그것은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는 '족보캐기 작업'이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낀다. 내가 오늘 이렇게 지내는 것은 나보다 앞서 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고 그는 족보캐기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조상추적에서 3백여년전인 167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성공했으며 연구실에서 잡기 어려운 유전자를 추적하는 것 만큼이나 꼼꼼하게 찾고 있다. 가계를 추적하기 위해 독일에도 여러 번 여행하면서 그곳 사료보관소를 헤매고 돌아 다녔으며 독일의 시골 면서기와 자주 서신 왕래를 하고 있다.

"과학은 어떻게 보면 즐거운 지적 게임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역사는 일련의 탐정 놀이여서 즐거운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와인버그는 그의 조상들 중의 과학자 한 사람만 알고 있다. 그의 먼 사촌벌이 되는 '프란즈 보아즈'라는 독일 태생의 체질(体質) 인류학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는데 그는 와인버그의 인격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졌다.

와인버그는 생물학의 앞 날에 어떤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앞으로 생물학자들에게 계속 도전할 3대 과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생물학자의 과제를 제시

첫째, 세포의 형태를 뒤집어서 생기는 매우 적은 변화로 만들어진 단백질의 역할은 무엇인가? 둘째, 발암인자는 어떻게 원(原) 발암유전자를 암유전자로 전환시키는가? 세째, 암발전에 관여하는 다른 단계의 규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생물공학 전반을 내다보는 그의 전망은 매우 낙관적이다. 그는 서기 2000년에 우리가 맞이 할 생명상(生命像)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우선 오늘날의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는 몇가지의 질병은 훨씬 상세하게 해명될 것이며 발암유전자 및 암의 생화학적 기초에 관한 최신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제암제가 개발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년내에 조직의 적은 일부를 시험관내에 넣어서 배양하면 기관 전체를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내다 보인다. 이런 기관배양이 가능하게 될 때 간장이나 신장이 손상된 사람은 장기에서 일부만 적출하여 이것을 배양하면 새로운 건강한 기관을 다시 이식할 수 있게 된다. 종래에는 개개의 동식물의 바람직한 특성을 목표로 하여 수십년간의 세월에 걸쳐 선택적인 육종을 하여 유전적인 개량과정을 밟았으나 최근의 유전공학의 기술로 이 과정을 크게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는 우유나 고기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는 소나 특정한 제초제에 대해서 저항력을 갖는 농작물의 품종이 개발 될 것이다. 유전공학으로 가축용의 백신을 싸게 생산하게 되어 거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래에는 전염병의 만연으로 위험했던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도 소를 방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00년대의 의학과 건강

생명공학의 성공으로 일반인들의 건강이 향상되면 오히려 이 큰 기술혁명의 산물에 대한 요구는 줄어 들 것이다. 예컨대 당뇨병의 원인이 해명됨에 따라 인슐린의 생산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줄어 들고 관절염이나 아테롬성 동맥경화증의 예방이 가능해지면 진통제나 심장약, 인공혈관 등은 새로 개발할 가치를 상실한다. 또 암이나 심장병이 불치의 병에서 벗어남으로서 임상의학의 관심은 아직도 거의 해명이 되어 있지 않은 노인의 퇴행성질환으로 초점을 맞출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공중위생의 대규모 개선은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예방에서 나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생체임상의학의 연구결과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암이나 심장병은 원인의 규명이 진전됨에 따라 발생률도 낮아진다. 이런 경향은 이미 몇가지의 사례에서도 드러 나고 있다. 앞으로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을 통한 예방에 주력하면 이런 치명적인 질병의 발생률은 격감하여 새로 개발된 치료법의 수요도 줄어들 것이다.

한마디로 서기 2000년까지 새로운 생명공학이 생명과 생물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뿌리채 바꿀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종래 생물학적 우연의 희생이 되어 때로는 드물게 찾아 오는 생물학적 기회를 이용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인간이 조작의 주체가 된다. 이로써 식량생산의 코스트를 줄이고 의료 코스트를 낮춰 온갖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의 발전템포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불과 10여년을 앞둔 서기 2000년에 어떤 수준에 도달할 것인가를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은 별세계이며 흥분과 모험이 가득 차있는 곳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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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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