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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극연구원의 하루

눈 얼음 바람에 묻혀

남극은 인간이 살기에 너무 힘든 곳이다. 그런 곳에서 1년 이상 지내는 연구원들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남극 연구원들의 백인백태는 어쩌면 인간의 진실된 사랑과 감동을 알려줄지도 모른다.

남극으로 먼길 떠나는 제9차 월동대를 배웅하고, 95년 내내 남극에서 생활했던 제8차 월동대가 돌아온다는 반가운 연락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난 94년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보낸 1년이 마치 향수처럼 밀려와 그때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제7차 월동대는 약 15명의 연구원들과 기술직 대원들이 남극에서 1년 동안 한식구처럼 살았다. 연구 과제 때문에,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리고 경제적 이유 등 대원들이 남극 근무를 지원한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각자의 임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었다.

투명한 창살에 갇혀

남극에 갈 때는 뉴욕을 경유해 갔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킹조지섬에서 출발해 푼타아레나스로 나와 산티아고 리오데자네이로 로스앤젤레스 하와이를 거쳤다. 남극까지 비행기를 탄 시간만 36시간이 걸렸는데,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1만7천2백km에 달하는 먼 곳이었다. 그러나 1년 동안 남극기지에서의 생활반경은 고작 7-8km에 불과했다.

킹조지섬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칠레의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을 때부터 남극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날씨가 수시로 변해 비행기의 이착륙 계획이 예정과 틀리기 일쑤여서 우리는 2일 정도의 예비 시간을 두고 비행기 운항에 대비했다.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오는데도 그곳은 평온하기만 했다. 군용 수송기에 탑승해 2시간반 정도 엔진소음을 견뎌내다 보니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남극 대륙의 북단 킹조지섬에 도착했다. 드디어 눈과 얼음과 바람의 나라에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기지 생활은 기상과 취침, 일과의 시작과 종료, 하루 3회의 식사, 당직 근무, 간간이 찾아오는 휴식과 공동작업 등 반드시 지켜야 할 시간으로 짜여진 규칙생활이다. 대원들은 기지 운영에 필수적인 기술 위주로 선발된 만큼 ‘1인 1기의 생활’이다. 그래서 만일 한 대원에게 사고라도 나면 즉각 그 영향은 전기지에 미친다. 유사시에는 합심해 전력투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기지의 정서적 환경은 독특하다. 대원들 모두 고통스러워 한 것은 고립감이었다. 밤낮으로 불어대는 강풍, 해변을 둘러싸고 뱃길을 막아 버리기 일쑤인 유빙, 빠지면 몇분 이내에 의식을 앗아버리는 바닷물 등 투명한 창살에 갇혀서 지내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아는 얼굴들은 멀리 북반구에 있고 돌무더기 위를 스쳐와서 해변을 싸안는 바람소리는 마음을 찢고 피부를 조여온다. 이렇게 쳇바퀴같은 생활 속에서 ‘잊혀져 살고 있다’ 는 느낌이 들고 인근 기지와의 통신과 간헐적인 왕래마저 끊어지면 그 고립감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대원들의 스트레스는 매우 다양하다. 일터와 잠자리와 휴식공간이 함께 있는 생활 공간과 이것에서 파생되는 생활 리듬의 변화, 가족과 친지로부터 별리 상태에서 오는 정서 생활의 불균형, 날씨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한 활동의 제한 등이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먹는 것도 고기같은 것만 먹다보니 싱싱한 야채를 먹는 것이 소원이란 말도 나온다.

이런 이유들로 쌓이는 스트레스는 규칙 생활을 통한 극기 정신, 취미 생활의 개발이나 운동, 야외 활동이나 단체 활동의 개발 등을 통해서 다소 해결될 수 있다. 독서 나무깍기(조각하기) 비디오시청 채소기르기 등의 취미 활동이 특히 보편적이다. 사진촬영과 산책 등의 야외활동도 인기가 높다. 기지 안에 마련된 체련실에서 탁구 역도 권투 샌드백치기 실내달리기 등을 하는 단골 대원도 있었다. 사우나와 운동으로 6-7kg의 체중을 줄인 대원도 있었다. 스케이팅과 스키는 인기가 높지만 빙질과 언덕 경사면의 눈이 좋지 못해서 오래 즐기진 못한다. 때때로 바다낚시와 투망을 하지만 얼음이 수시로 밀려드는 곳에 닻을 내리고 고무보트 위에서 여유를 부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러한 운동과 취미 활동은 월동대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윤활유 역할을 한다.
 

카누를 타고 체코인(뒤)이 놀러 왔다. 그는 세종기지에서 돌아가다 불상사를 당해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의사가 우편물 수발

남극기지는 항상 강풍이 분다. 보급선은 멀리 떨어져 있고 위생 시설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최소의 인력으로 기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신경쓰는 일은 대원의 건강유지와 화재예방, 그리고 안전사고 방지이다. 또 에너지 공급원인 발전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급유관은 얼지않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급수다.

기지의 뒤편 산기슭 밑에는 ‘현대소’ 라고 이름붙인 인공호소가 있다. 눈이 녹으면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 두는 곳이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이 현대소가 얼기 때문에 해수를 뽑아 올려서 염분을 제거하고 용수로 써야 할 운명에 처한다. 그래서 꾀를 냈다. 우리는 담수화된 물을 역방향으로 펌프해 올려서 현대소의 얼음층 밑에 저장해 놓고 조금씩 받아쓰는 방법을 도입했다. 우리는 이 방법이 성공하자 자연의 이치를 활용했다는 짜릿한 쾌감을 맛보았다.

외부와 단절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국과의 통신이다. 전화는 빨라서 좋으나 분당 17달러(한화로 1만4천원 정도)나 돼 비싼 것이 흠이다. 그래서 최소 한달 이상 걸리나 값이 싼 편지를 더 많이 애용한다. 편지는 고립된 상황에서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고 활력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의료담당이 타 대원들과 다른 점은 의료담당에게 바쁜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의료사고가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어느 나라 기지에서나 의사는 심심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기지마다 우편물수발 도서관리 페인트칠 컴퓨터작업 통역 등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의료담당 앞으로 분류해 놓았다. 의사는 매력없는 일에 묶이기 싫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게 남극생활이다.

연구원들은 기상관측 지진파관측 지자기관측 생태계조사 등 여러가지 조사와 연구 활동을 한다. 연구활동 중에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기지 주변의 어류생태를 조사할 때의 일이다. 남극 대구를 채집해 조사한 다음 회로 떠서 대원 모두가 애호하는 메뉴가 됐다. 그런데 그 내장에서 기생충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로는 소수 대원들의 독점물로 전락하게 됐다.
 

남극기지의 생활물자를 하역하고 있다.


중국기지의 한방치료

남극의 대원들은 자연스럽게 과학외교를 한다. 외국의 방문객들을 맞이하거나 외국기지를 방문했을 때 민간 외교관으로서 품위와 예의를 갖춘다. 세종과학기지를 소개하고 안내책자를 통해 한국을 소개하는 일은 보람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외국인들과 사진도 찍고 선물도 주고 받았다.

특히 조난자 구조활동에서는 국가간의 긴밀한 협조가 이뤄진다. 1994년 12월 23일 폴란드기지의 대원 2인이 스키를 타고 러시아기지로 떠난 후 연락이 두절된 일이 발생했다. 이때 연락을 받은 우리도 6명의 대원이 3개조로 나뉘어 수색 활동에 참여했다. 다음날 실종됐던 2명의 폴란드대원은 칠레 헬리콥터에 의해 무사히 구조됐다.

이밖에도 우리는 보급에 차질이 생겨 식품 사정이 악화된 중국의 장성(Great Wall)기지를 지원한 적이 있었고, 반대로 환자가 발생해 장성기지에서 한달동안 한방치료를 받기도 했다. 우리는 칠레 프레이(Frei)기지에 있는 병원에서 X선 촬영을 하고 은행이나 우체국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 돌아올 때 날씨가 좋지 않으면 어느 나라의 기지든지 찾아 들어가 며칠씩 묵는다. 남극에선 이것이 상식이다.

우루과이는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자국 기지 뿐 아니라 이웃 기지도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세종기지에도 이들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법학 경제학 생물학 등 전공들도 다양했다. 우리도 우루과이처럼 학생들이 남극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한다. 그와 같은 일은 미래를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보는 안목과 시야를 넓혀줄 것이다.

칠레의 푼타아레나스에 다시 나왔을 때의 감회는 킹조지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는 크게 달랐다. 1년 전 거리는 한적하고 어설프고 쓸쓸해 보였다. 인적이 드문 들판은 버려진 듯 보였고 곧 내려앉을 듯한 낡은 자동차들은 가까스로 움직여 나가는 석양의 군상들과 같았다. 그런데 1년 후 다시 보니 똑같은 계절의 푼타아레나스는 새롭고 화려하고 윤택하고 찬란한 빛 속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 흐르듯 잎 위를 미끄러지는 햇빛과 풀잎 위로 부드럽게 스쳐가는 미풍은 세상의 온갖 것을 다 의미있게 만들었다. 푼타아레나스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든 것만으로도 “잊혀진 삶을 다시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에 충분했다.
 

독일기지. 연구기지를 서로 방문하는 일은 남극에서 즐거운 일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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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남기수 제7차 월동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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