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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 속 거울에 숨겨진 수수께끼

옛날 화가들은 이따금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물론이고 그때 사람들도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던 수수께끼 그림들이다. 화가들은 이런 까다로운 그림에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비밀스런 내용이라든가 자신만의 은밀한 미술 이론을 담았는데….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는 1656년 그림 한점을 완성한다. 제목은 ‘시녀들’. 등장 인물은 모두 열한명이다. 그 가운데 시녀는 둘밖에 안된다. 그림 복판에 다섯살배기 공주님 마르게리타가 서 있고, 옆에 바짝 붙어서 시중하는 젊은 여자 둘이 시녀다. 제목 ‘라스 메니나스’는 포르투갈말로 ‘계집아이들’이지만,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왕궁에서 시중하는 ‘시녀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림 왼쪽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거의 천장 높이로 서있다. 그 뒤에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이 그림을 그린 화가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화가는 왼손에 팔레트를, 오른손에는 가느다란 붓을 쥐었다. 붓끝에 물감을 적신 걸로 봐서 마침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팔레트와 함께 쥔 긴 막대기는 정교한 붓칠을 할 때 손이 떨리지 않게 받쳐주는 받침막대기다. 등을 돌린 캔버스와 화가 사이의 거리는 2-3m 가량. 이만한 거리에서는 아무리 팔을 길게 뻗어도 붓이 캔버스에 닿지 않는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1656년, 310cmX276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화가의 자화상 등장

화가는 그림을 마무리하려던 참일까, 아니면 막 시작하는 순간일까? 마무리 단계라면, 다 그린 그림에다 가느다란 붓을 가지고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을테고, 시작 단계라면 커다란 그림 크기에 걸맞게 시원한 구성을 짜는 자세다. 서너 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재현대상들의 비례 관계와 공간적 좌표를 가늠하려는 동작으로도 읽을 수 있다. 화가가 비스듬히 상체를 젖히고 그림 바깥을 내다본다. 이걸로 봐서는 준비단계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기가 쉽다. 또 하나. 아무 것도 그리지 않으면서 그냥 그림 그리는 시늉만 할 수도 있다. 단순히 ‘나는 이런 곳에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라는 정황을 보여주려고 그린 그림이라면? ‘무엇을 그린다’가 아니라 ‘어떻게 그린다’를 보이는 그림. 또는 그려야 할 무슨 무슨 대상으로부터 몇걸음 물러나서 화가의 작업환경과 작업경과를 솔직하게 터놓고 보여주는 아틀리에 그림이 벨라스케스 그림의 주제라면, 등을 돌린 캔버스는 붓을 전혀 대지 않고 비워둔 ‘회화 예술의 상징’이라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화가는 제 얼굴이 들어간 이런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그땐 카메라가 없었던 시대였으니 틀림없이 거울을 사용했을 것이다. 대개 거울을 보고 그린 화가의 자화상에서는 왼쪽 오른쪽이 바뀌어서 붓은 왼손, 팔레트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게 보통이다.

이상하게 여기서는 거꾸로가 됐다. 그렇다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그리지 않고 상상의 힘을 빌었을까? 혹시 왼손잡이 화가가 아니었을까? 또는 제 모습만 그렇게 그린 걸까, 아니면 그림 전체를 깡그리 상상으로 그린 걸까? 어둑한 그림 뒷벽 복판에는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거울 속에 두사람이 들어가 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왕후 마리아 안나. 국왕부처는 방안 어디에도 없고 어두운 거울 위에만 어슴푸레 비치는 거울의 유령이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풀이가 나왔다. 국왕부처는 지금 그림 바깥에 앉아서 자세를 취하고 있고, 화가가 이들을 바라보면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초상화 모델을 서는 건 무척 지루한 일이다. 때마침 공주님이 시녀들과 어릿광대를 이끌고 이들에게 놀러왔다. 화가는 이 장면을 기억해두었다가 그렸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듣기에 퍽 그럴싸해서 사람들은 드디어 수수께끼 그림의 정답을 알았다고 좋아했다. 내로라하는 미술사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옳다고 맞장구쳤다. 거기에다 나름대로의 해석들도 많이 붙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불거졌다.
 

과비례로 그려진 국왕부처^그림 가운데에 국왕부처가 그려 진 거울이 있다. 얼핏 보기에 평범 해 보이지만, 떨어진 거리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과도하게 크게 표현된 형태다. 실제로 관찰자가 바 라본 방 안쪽까지의 거리(시선거리) 는 매우 멀다. 벽에 걸린 그림이나 천장의 샹들리 에를 이용해 소실선을 그리고, 이들 이 만나는 소실점을 찾는다. 미술에 서는 이를 통해 그림에 그려진 거울 이나 사람의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 경우 거울이나 국왕부처가 실제보다 과비례로 크게 그려졌 다는 점이 드러났다.


등돌린 캔버스 너무 크다

그림 앞쪽에서 뒷벽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니 굉장히 멀었다. 의외로 깊은 방이어서 시선거리가 까마득하게 멀었다(그림). 뒷벽까지의 거리 계산에 필요한 단서는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들의 상하 수평선, 그리고 천장에 붙은 동그란 샹들리에 고정장치 두개로부터 필요한 소실선들을 얻어서 해결됐다. 보는 이의 시점과 대응하는 화면 위의 소실점은 뒷벽 거울 오른쪽에 반쯤 열린 문짝 중앙 윗부분께로 확인됐다. 뒷벽에 걸린 거울 크기도 상당했다. 이만한 시선거리, 이만한 크기의 거울에 국왕부처의 모습이 그림에 있는 것처럼 비치기는 어렵다는 결론이 났다. 거울 속에는 공주님과 시녀들의 뒤통수뿐 아니라 등돌린 캔버스도 조금씩 나와야 하는데, 거울에는 과비례로 부풀려 그린 국왕부처 밖엔 없으니 귀신이 기겁할 노릇이었다.

한편, 등돌린 캔버스가 너무 큰 것도 문제였다. 이만한 크기라면 장엄한 종교 제단화나 큼직한 신화 그림이 어울릴텐데, 난데없이 초상화라니? 하기야 멋진 말에 올라타고 번쩍거리는 갑옷을 걸친 기마 초상화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두사람이 사이좋게 곁을 맞대고 앉아 있는 반신 초상화를 이만한 크기로 그린다는 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벨라스케스가 한차례도 펠리페 4세의 부부 초상을 그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헌연구에서 밝혀지자 지금까지의 추측은 전부 허탕이 되고 말았다. 미술사학의 연구가 2백년 넘게 헛걸음을 친 것이다.

이런 풀이도 있었다. 등돌린 캔버스에 부부 초상을 그려놓았는데, 그게 뒷벽 거울에 비쳐서 그림 밖의 보는 이에게 정면으로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캔버스가 비스듬히 놓였고, 보는 이의 시점이 그림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그런 추측이 나왔다. 이 주장도 마찬가지로 거울에 화가의 뒷모습이 안 보이고, 국왕부처의 부부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설득력을 잃었다.

국왕 배려에 대한 감사표시?

그렇다면 화가 앞에서 모델도 서지 않은 국왕부처가 어떻게 거울에 비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뜻밖에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만약 거울이 ‘그림 속의 그림’처럼 기능한다면? 그림을 두고 자연을 비추는 거울로 정의한 건 고대 이후의 오랜 전통이다. 이때 그림과 거울을 경쟁 상대로 보기도 하고, 서로 돕는 우호관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거울이야말로 가장 솜씨 좋은 예술가라고 말한다. 자연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비추어내니까. 어떤 화가의 손재간으로도 거울의 솜씨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림이 거울보다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 거울에는 무엇이든 잠시 스쳤다가 사라지지만, 그림은 칠이 떨어져나가기 전에는 언제까지나 이미지를 붙들어두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거울은 변덕스런 고양이, 그림은 충직한 개에 비유됐다.

르네상스 이후 거울과 그림은 상호 공생관계로 발전한다. 다 그린 그림을 거울에다 뒤집어보면서 색과 형태의 불균형을 찾아낸다든지, 그림과 거울과 자연을 나란히 맞대놓고 거울에 비친 자연과 거울에 비친 그림을 번갈아 비교하면서 붓의 실수를 잡아낸다는 식이다. 앞 이론은 알베르티, 뒤 이론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내놓았다. 특히 거울을 세워놓고 제 얼굴을 베껴 그리는 화가의 자화상에서는 둘의 관계가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부처가 그림 속의 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그림이 만들어내는 허상 속의 허상이다. 화가가 창조한 새로운 세상 밖, 또다른 차원의 존재인 셈이다. 옛날 사람들은 거울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에게 말을 걸면서 보이지 않는 그림을 띄워 올리는 동화 속 마법 이야기, 페르세우스가 청동방패를 거울처럼 사용해서 메두사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또 메두사를 이용해서 원수들을 처단한 이야기, 미소년 나르시스가 물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전부 거울과 그림이 얼마나 닮았는지 보여주는 보기들이다. 첫째 이야기는 시공을 뛰어넘어 과거나 미래의 장면을 눈앞에 데려다주는 회화의 신적 가치를 말한다. 둘째는 자연과 모방, 실상과 허상의 유비가 화가의 자유자재한 붓끝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셋째는 거울이나 그림을 통해 나를 쪼개어 또 하나의 나를 만들고, 자신의 업적에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순교 행위로 추앙됐다.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은 국왕부처가 기거하던 침실 바로 아래층이었다고 한다. 가끔씩 들러서 화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격려도 했다. 군주가 예술가를 방문해서 어깨를 두들기는 일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화가 아펠레스를 찾은 게 처음이었다. 르네상스 군주 카를 5세가 티치아노에게 금목걸이를 걸어주거나,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뒤러의 그림 시중을 든 일은 모두 회화 예술의 제왕에 대한 응당한 대우로서 화가들의 공방에서 귀에 더께가 앉도록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벨라스케스는 예술가의 수고를 잊지 않고 친히 작업실을 방문한 국왕의 배려를 그림 속의 거울이라는 기억 장치 속에 재워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이 초상>;의 부분 그림|1434년, 1.8cmX59.7cm, 런던 국립 미술관 벨라스케스는 네덜란드 회화전통에서 거울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에이크는 둥근 볼록 거울 위에 붓으로 지은 세상을 가두었다.


화가 자신이 주인공일지도

문제는 거울에 그치지 않는다. 화가가 그림 안에 들어간 것도 이상하다. 물론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궁정 귀족들 가운데 제 자화상을 그려 넣을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정의 일상을 다룬 지극히 평범한 주제 속에 화가가 끼여드는 바람에 갑자기 내용이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림을 그리는데는 조건이 세가지 필요하다. 화가, 모델, 캔버스. 곧 재현주체, 재현대상, 재현수단이다. 자화상 그림처럼 재현주체와 재현대상이 하나일 때도 있다. 그럴 땐 캔버스말고도 거울이라는 작업도구가 따로 필요하다. 작업이 시작되면 셋 또는 네가지 조건이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붙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화가가 붓을 들 때마다 시점이 달라지거나, 모델이 쉴새없이 자리를 바꾼다거나, 캔버스 위치를 매번 옮겨 다녀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일관된 공간에 소재를 짜넣을 수 없는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는 그림 바깥에 서있어야 할 화가가 그림 경계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영화를 보던 관객이 스크린 안으로 첨벙 뛰어들거나, 그림 속 호랑이가 ‘어흥’하고 뛰쳐나오는 식이다. 그림 안팎을 구애없이 넘나드는 화가는 제가 만든 요술 감투를 쓰고 둔갑술을 펼치기 시작한다. 국왕도 마찬가지다. 어디에도 없지만, 도처에 임재하는 절대 권력자라는 점에서 그림 속 세상을 군림하고 지배하는 예술가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뒷벽 거울 위에 걸린 그림 두점의 주제는 마르시아스와 아라크네. 원래 루벤스 그림을 후안 델 마조가 베껴 그렸는데, 벨라스케스가 제 그림에다 다시 따왔다. 마르시아스는 음악의 신 아폴론과 음악 시합에서 이겼지만 살껍질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고, 아라크네는 아테나와 길쌈내기에서 이겼지만 여신의 저주를 받아 거미로 변신한 비운의 여인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 둘을 두고 자신의 예술적 기예만으로 신과 겨뤄 이긴 참다운 예술가의 전범으로 보았다.

또 승리를 거뒀으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예술의 순교자로 보았다. 그들의 순교가 예술의 영광스런 제단에 바쳐졌다고 믿었다. 벨라스케스는 붓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고 한다. 그림 제목은‘시녀들’이지만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벨라스케스 자신이 아닐까? 또는 묵묵히 세상을 관망하며 등돌린 빈 캔버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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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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