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남극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한다” 는 명문으로 시작되는 남극조약은 국가간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영유권 분쟁을 말리는데 성공했다. 남극은 많은 국가들이 새로운 영토 확장을 위해 뛰어들어 2차대전 이후 최대의 무혈전쟁터와 같았다. 이 전쟁에서 표적이 된 것은 남극에 매장된 수많은 지하자원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극이 자기네 땅이라는 주장은 제일 먼저 영국에서 나왔다. 영국은 18세기 말 제임스 쿡이 남극권을 항해한 이후 19세기 남극 발견, 스코트의 남극점 도달, 모슨 경의 남극 생활 등을 공적으로 내세웠다. 남극을 독점하려는 영국의 움직임을 파악한 여러 국가들이 뒤이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뉴질랜드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노르웨이 칠레 아르헨티나 등 그 수가 점차 늘어갔다. 특히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세게 나왔다.
1947년에 남극기지를 세운 칠레는 이곳에 병원 가게 은행 우체국 등을 둔 ‘별의 마을’(Villa Las Estrellas)을 꾸몄다. 특히 군인가족들을 아예 이주시켜 아이들까지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게 했다. 아르헨티나는 국민들이 남극에서 결혼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연고권을 강화했다.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 방문하는 일은 큰 화제도 아니었다. 1938년 나치독일이 철십자 표시를 한 알루미늄 막대를 비행기에서 뿌림으로써 남극에 자기 영역을 그려놓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치밀한 계획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남극이 과열되기 시작하자 남극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나섰다. 그 결과 1959년 미국을 중심으로 12개 국가가 모여 서명함으로써 남극조약이 탄생했다. 이렇게 생겨난 남극조약은 1961년부터 30년 동안 남위 60˚ 이남에 있는 바다와 육지에 대한 영유권을 묶어놓았다. 그러나 1991년 조약이 만료됐는데도 아직까지 영유권에 대한 재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과의 경쟁에서 먼저 설립
우리나라가 남극에 뛰어든 것은 1978년 남빙양에 있는 크릴을 잡고 해양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그후 매년 해양조사를 해오다 1985년 11월 한국해양소년단 연맹이 남극탐험을 실시했다. 함께 나선 전문산악인들은 남극 최고봉인 빈슨메시프(5천1백40m)를 정복해 세계 여섯번째의 주인공이 됐다. 이때 남극탐험대와 인연을 맺은 킹조지섬에는 나중에 세종기지가 세워졌다.
1986년 11월 28일 드디어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했다. 북한도 덩달아 나섰지만 밀려서 1987년에야 세계 35번째로 가입하게 됐다. 남극조약에 가입한 후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남극기지의 설립이 서둘러졌다. 남극세종기지는 1988년 2월 17일 킹조지섬 남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제1차 월동대가 남극에 머물며 본격적인 남극연구를 시작했다.
세종기지에서의 연구는 킹조지섬 근처의 육지 바다 대기 생물 등을 살피는 일부터 시작됐다. 그동안 연구됐던 주요 내용을 보면 석유자원을 비롯한 지하자원, 해수의 특성, 바닷속에 사는 생물과 육지에 사는 동식물, 고층대기 등 다양하다. 지자기와 태양풍에 따라 고층대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는 일은 극지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또 바닷속에 사는 생물을 조사하기 위해서 연구원들은 해빙을 깨고 얼음 밑을 잠수해야 했다.
기자가 해양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마침 96년을 남극에서 지낼 9차 월동대가 떠날 채비를 하는라 매우 분주했다. 일부는 이미 출발했지만 월동대장인 김예동박사는 뒷수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쯤 세종기지에서 남극생물을 연구하고 있을 강성호박사는 “가족과 1년이상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무척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편지 한장이 무척 반가운 남극에 가면 연락할 거죠” 하고 부탁도 했다. 그래서 ‘과학동아’ 독자와 남극연구원 사이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에 따라 세종기지 주소와 강성호 연구원의 인터넷 주소를 27쪽에 게재한다. 독자와 남극 연구원 만남처럼 생생한 남극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남극의 화산, 에레부스
남극점을 찾아나섰던 아문젠과 스코트의 경쟁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들의 경쟁은 국가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했다. 1911년 12월 14일 드디어 남극점이 노르웨이의 아문젠에 의해 먼저 정복됐는데, “우리는 남극점에 도달해 우리의 기를 꽂을 수 있었다” 고 일기장에 적어 놓았다. 뒤늦게 영국의 스코트가 1912년 1월 17일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달 3일 전에 아문젠이 꽂아놓은 깃발만 나부낄 뿐이었다. 실의에 빠진 스코트는 돌아오는 도중 남극폭풍설 속에 묻혀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남극은 수많은 탐험가들이 찾는 도전의 대상이다. 장 루이 에띠엔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운동의학과 영양학을 전공한 의사로 극지탐험을 하는 사람들을 돕다가 본인이 직접 탐험에 나섰다. 그는 1986년 혼자 스키를 타고 63일만에 북극점에 도달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그가 남극에서 도전의 목표로 삼은 곳은 로스섬에 있는 에레부스(Erebus, 3천7백94m)산. 그는 결국 1994년에 활화산인 에레부스산을 정복하고야 말았다. 이것은 1908년 영국의 새클톤이 로스섬에 도착한 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남극에는 에레부스산 말고도 북빅토리아랜드에 있는 맬버른산(2천5백37m), 디셉션섬에 있는 실누나타크산 등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있다. 디셉션섬에서는 여러차례 화산이 폭발해 영국기지와 칠레기지가 녹아내린 물로 파손된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