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역할놀이 수업
미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역할놀이 학습을 우리가 해내다니. 처음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을 때만해도 별 관심이 끌리지 않았다. 그런데 각자 역할을 맡아 자료를 준비하고 토론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실 그 동안의 토론은 백과사전을 뒤져 거기에 있는 지식만을 바탕으로 하는데 그쳤다. 그처럼 수동적인 우리들이 직접 뛰어다니며 자료를 구한다는 사실이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막상 발벗고 나섰지만 이 분야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들은 불임과 인공수정에 관한 기사를 썼다는 과학동아 기자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드디어 기자와의 만남. 기자들은 예상외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자료를 원하고 왜 그 자료를 원하는지 말씀 드렸더니, 기자는 여러가지 기사와 의학적 설명이 곁들어진 책자 등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토론이 잘 될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5월 28일로 예정된 토론이 왠지 잘될 것이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5월 21일, 수업에 필요한 인터뷰 내용을 VTR로 촬영했다. 먼저 많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배역을 만들었다. 불임부부, 인공수정에 성공한 부부, 대리모, 인공수정에 실패한 부인, 불임증에 걸린 미혼여성, 인공수정에 반대하는 미혼여성, 불임 전문의사(2명), 신학자 등이 그 배역이고,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본을 썼다.
촬영을 실감나게 하기 위해 의상을 준비하고, 남자 역에는 2학년 남학생들을 섭외했다. 역할극에 참여한 학생들은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것이 낯설었지만 안약까지 동원해 눈물을 짜내면서 6분짜리 인터뷰 내용을 4시간에 걸쳐 촬영했다.
5월 24일(석가탄신일), 우리들은 선생님댁에서 22일 촬영한 테이프 시사회를 가졌다. 모두들 웃음이 터졌다. 휴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에 필요한 OHP 자료와 그래프를 만들고, 토론에 필요한 자료들을 정리했다.
토론/불임의 고충, 고귀한 생명
5월 28일 수업종이 쳤다. 반 아이들 모두 정해진 좌석에 하나둘 앉고 선생님들도 여러분 들어오셨다. 드디어 사회를 맡은 이은영이 수업을 진행했다. VTR로 인터뷰 내용을 보던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VTR을 보고난 후 전문의들(윤실비,정상희)은 불임과 인공수정에 관한 자세한 설명으로 이해를 도왔다. 이어 신학자(정연실)도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보는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발표자들은 해야 될 말을 까먹거나 더듬었고 가끔 실수도 했다. 하지만 모두 무사히 잘해냈다. 드디어 토론 시작. 선생님이 미리 생각해보라고 건넨 주제들을 가지고 학생들의 의견을 들었다.
인공수정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이은영) 아이가 없을 때 많은 부부들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이들 부부들에게 인공수정은 희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생명체의 탄생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실시해도 좋을까.
최유정) 난 괜찮다고 봐. 과학이 발전해서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또 인공수정으로 아이가 생긴다면 많은 부부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테고 말야.
배미연) 난 그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공수정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생명의 존귀함을 무시하는 행위처럼 여겨지거든. 인간의 목숨, 그 가치가 이젠 너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박정희) 나도 동감이야. 요즘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는 것 같아. 인공수정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입양이라든지.
마미영) 맞아. 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여러개의 수정란 중 하나만 선택해야 돼. 그러면 나머지는 필요가 없어. 의사의 말로는 필요없는 수정란들을 없애려면 죽지 않으려고 피한다는 거야. 이것을 보면 수정란도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어.
정선화)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에겐 자신의 혈육을 갖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 인공수정이라고 생각해. 부부들 역시 누구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가운데 인공수정을 선택해. 자연적으로만 아이를 탄생시킨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어.
박미란) 인공수정은 종교적으로 보면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아닐까.
김현주) 종교적 윤리적으로 보면 정당하지 않겠지만, 어떤 면에서 종교와 윤리 역시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발생한 것이야. 아이가 없는 부부의 정신적인 고통을 덜어준다면 인공수정은 옳다고 생각해.
수정란으로 의학실험 해도 되나
이은영) 수정란은 의학 연구에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 체외수정을 할 경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정란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여분의 수정란들이 의학실험에 쓰여도 될까.
구아영) 수정란이 이식수술이나 암치료의 연구에 유용하다면 실험을 해도 괜찮다고 봐. 수정란을 그대로 두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마미영) 수정란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된 하나의 생명체라고 할 수 있어. 생명체를 가지고 의학실험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야. 남은 수정란을 체외수정조차 잘 안되는 부부에게 주면 어떨까.
부모가 없는 수정란의 운명
이은영) 수정란은 냉동 보존할 수 있다. 만약 부모가 이혼하거나 사망한다면 냉동 수정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조선희) 어차피 임신 이외에도 많은 정자와 난자가 버려지고 있어. 이런 경우 생명의 기초이지만 부모가 없다면 사람이 되어도 제대로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보관하기 보다 없앴으면 좋겠어.
노진영) 그건 너무 비인간적인 것 같아. 그러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주는 것은 어떨까. 계속 냉동 보관하는 것이 좋겠어.
김현주) 그 수정란은 부모들의 합의에 의해서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고, 법으로 차선책을 마련해 줘야겠지.
송은정) 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나중의 일도 자신들이 책임져야 되겠지. 만약 나중에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이혼녀가 그 수정란으로 임신을 한다면 그건 이혼한 가정 사이에 혼란을 줄 수 있잖아.
정리/학급 전체의 의견은
토론이 끝난 후 전문가들은 계속 학생들과 선생님의 질문을 받았다. 이들은 갑작스레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던지 준비를 철저히 해서 대답을 잘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반 학생들이 인공수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문조사를 했다.
인공수정에 대해서는 찬성 68%, 반대 28.5%를 나타냈으며, 수정란을 의학실험에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64%, 찬성 36%를 나타냈다. 부모가 없는 냉동 수정란의 처리는 의학실험에 이용하자는 의견 27%, 폐기하자는 의견 32%, 부모의 의견에 따르자는 의견 12.5%, 다른 부부에게 주자는 의견 25% 등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정리를 하고 이것으로 우리의 역할놀이 수업은 끝이 났다. 자료를 얻으러 뛸 땐 빨리 끝났으면 했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까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들의 토론을 위해 도와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지도교사 의견
본 수업은 철저하게 학생이 중심이 되어 역할놀이를 통해 배우는 토론식 수업이다. 일찍이 영국과 미국은 과학·기술·사회(STS) 수업의 일환으로 역할놀이 수업을 해왔다. 우리나라 역시 올해부터 6차교육과정에 따라 토론식 수업이 도입됐다.
이번 수업을 위해 학생들은 직접 불임 사례를 모으고, 스스로 배우가 되어 인터뷰 장면을 비디오로 재현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와 신학자 역할을 담당하는 학생은 물론 모든 참여학생들이 자신의 역할에 필요한 자료를 직접 조사했다. 다만 토론해야 할 주제만은 교사가 직접 선정해 주었다.
역할극에 참여한 사람들
불임부부: 아내-노진연, 남편-고현진(2학년,남)
인공수정에 성공한 부부: 아내-박정은, 남편-김윤성(2학년,남)
대리모: 염경아
인공수정에 실패한 부인: 이진
미혼불임여성: 손미영
인공수정에 반대하는 미혼불임여성: 배미연
불임 전문의: 윤실비, 정상희
신학자: 정연실
역할극 대본의 일부(불임여성 인터뷰)
Q: 아이를 가장 가지고 싶은 때는 언제인가요
A: 동창들 모임에서 다들 자식 자랑할 때와 시부모나 남편이 남의 자식을 귀여워할 때죠.
Q: 불임여성이기 때문에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A: 특히, 남편이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하고서 술에 취해 들어와 아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속상하죠. 어쩌겠어요, 참아야지.
Q: 인공수정이 어떤 점이 좋다고 생각하나요.
A: 저같은 불임여성에게 희망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할극 대본의 일부(불임전문의 의견)
불임이란 부부가 피임을 하지 않고 1년간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했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5-20%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불임 부부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10명 정도가 불임부부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탐구노트 에피소드
시험관 아기 하실거예요?
5월 25일 (토). 신설동에 있는 마리아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병원에서 불임여성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날을 맞춰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늦게 도착하는 까닭에 여러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나중에는 의사선생님까지 갑자기 "저기 늦게 오신 분들, 시험관 아기 하실거예요?"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우리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아직 파릇파릇한 고1인데. 그리고 나서 한참을 보더니 "아닌데, 학생인가?"하는 것이다.
그때야 우리가 누구고, 여기에 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여긴 전문적인 용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괜찮아요?"하고 물었다.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전문가가 다 된 우리들인데. 약간은 섭섭했지만 "저희도 다 알아들어요"하고 대답했다.
병원을 찾기 전 솔직히 불임여성들은 풀이 죽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들 자신의 문제에 적극적이었고, 의사에게 궁금한 점을 당당하게 질문했다. 우리들은 강의를 듣고 여러 가지 궁금증을 푼 다음 벽에 걸려 있는 시험관아기들의 사진을 바라봤다. 보통 아이와 다른데가 없는데 '시험관아기' 하면 보통아이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편견 때문일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