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한 시대의 문명이 후세로 이어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인쇄술의 발전 정도가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과학적 우수성은 바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석기시대를 살던 인류는 동굴벽화를 그렸고, 그보다 앞서 사람 얼굴 등을 짐승뼈에 새겨 그들의 존재를 후세에 알렸다. 이같은 '기록 방법'을 생각해낸 것은 인류가 지구에 태어난 이래 가장 소중한 발명 중 하나로 꼽을 만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사시대의 다양한 흔적은 역사시대에 발명된 인쇄술의 뿌리로 풀이할 수 있다. 새겨지거나 그려진 여러 자취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더불어 보자는 뜻이다. 역사시대의 인쇄도 같은 의미를 지닌 창조활동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지구에 존재한 많은 겨레들은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그들 나름의 여러 부호를 고안해냈다. 이 가운데 글자는 언어를 통한 의사전달이 가진 순간성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글자는 어딘가에 쓰여져서 읽혀져야 하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복사되어야 했다. 따라서 문자 기록을 대량으로 재생하는 인쇄술은 문화전승 행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 겨레의 문명과 과학성을 재는 잣대로 인식된다.
동전 제조기술이 금속활자로
우리 겨레의 인쇄술에 관한 역사는 이미 삼국시대 후반부터 목판인쇄술이 실용화됐을 만큼 앞서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 역시 우리나라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사리함 위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이것은 751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11세기의 첫째 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本, 일본 남선사 소장), 13세기의 재조 대장경(再雕 高麗大藏經板木, 해인사 소장) 역시 인류의 귀한 문화재로 여겨지고 있는 우리의 보물이다.
목판인쇄술이 일찍부터 번성했던 것은 불교의 전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한문으로 옮겨진 다음이었다. 물론 이같은 필요성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불경을 돌판자에 새겨 오래오래 보존하려 했는데, 이 일에는 신라와 고려인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목판인쇄는 나무를 자르고 켜서 글을 새기고 찍어내기까지 지루한 시간과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그리 경제적인 인쇄술은 아니다. 책 하나를 만들어내는데도 큰 비용을 들여야만 하고, 책마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 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내용의 다른 책을 찍어내는데는 불편했다.
이에 따라 경제성을 지닌 방법을 찾은 끝에 생각해낸 것이 들자 하나하나를 따로 만드는 활자였다. 활자 인쇄술은 많은 책을 만드는데 드는 자원과 인력 경비 공정기간을 줄이는 방법이자, 수요에 맞추어 인쇄할 수 있는 경제성을 가지고 있었다.
남아 있는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활자는 중국 북송시대의 필승(畢昇)이 만든 흙활자다. 이 흙활자는 찰흙을 아교로 굳혀놓고, 철판 위에 송진을 덮고 쇠틀 안에 흙활자를 늘어놓은 다음 불을 쬐 밀납이 녹으면서 글자판이 고르게 되면 종이를 대고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획기적 발상물인 흙활자는 그리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는 워낙 목판인쇄술이 많이 보급되기도 했거니와, 활자 자체가 잘 부서지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활자가 가진 약점을 고쳐서 놋쇠를 부어 활자를 만드는 과정을 이룩한 것은 우리 고려사람들이었다. 이는 엽전을 부어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엽전의 보기돈 대신 글자의 보기자를 만들어 쓴 것이었다. 인쇄기술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금속활자는 이후 원나라에 아랍의 과학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금속활자는 근대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열쇠요. 현대의 전자 두뇌로 이어지는 다리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금속활자 인쇄는 인쇄술을 쉽게 했고, 경제적이며 생산성 높은 출판을 가능케 했다.
목판인쇄는 목판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장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다른 판을 새겨야 했지만 활자판은 한 인쇄물을 다 찍으면 그 판을 헐어 활자를 골라서 끼어 넣고 새판을 짜면 된다. 당연히 틀린 자나 빠진 자, 비뚤어진 자, 희미한 자, 진한 자를 바로 잡는 일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목판에서는 물먹을 썼지만 금속활자인쇄에서는 기름먹을 써야 잘 찍힌다.
원래 우리 겨레는 청동기시대부터 해감모래 거푸집에 놋쇠를 녹여 부어서 거울이나 단검, 치레걸이 등을 만드는 기술을 크게 발달시켜왔다. 놋쇠로 앏은 동전을 만드는 일은 이미 1102년 고려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이때 제작된 해동통보(海東通寶)는 새겨진 글자가 뚜렷하고 깨끗해 중국에서도 그 이름이 높았다. 해감모래 거푸집을 써서 엽전을 만드는 법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동전부어내기 기술과 흙활자 새기기 기술이 합쳐져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이어졌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고려왕릉에서 나온 것을 일본인 골동상이 덕수궁 왕궁박물관에 1913년 넘겨준 '복'자 활자(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그 금속성분이 해동통보와 같다. 또한 1958년 개성 만월대 북문 3백m 지점에서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고려 놋쇠활자 '전'자 역시 그 금속 성분이 해동통보와 비슷하다.
중국보다 앞선 인쇄문화
후세의 평가와 달리 당시의 고려사람들은 금속활자의 발명을 그리 대단하지 않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금속활자란 마치 동전을 만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많은 부수를 찍기보다는 귀한 책을 제한된 부수만큼 찍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부수의 책은 인쇄과정이 편한 목판인쇄를 조선시대까지 내내 써왔다.
고려의 문인 재상 이규보가 엮은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보면 의종 때 학자 최윤의가 왕명을 받아 편찬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을 강화도에서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했다. '동사연표'를 엮은 조선말기의 학자 어윤적(漁允迪)은 이 시기를 1234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수도가 옯겨가기 전에 남명천송증도가(南明泉頌證道歌)를 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진양공 최의가 쓴 글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활자의 발명과 이를 이용한 인쇄는 강화로 피난가기 전 개성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사실 고려는 '장서국가'라 할 만큼 서적의 발행이 성했던 나라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이미 없어진 책을 "고려에 가면 구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1123년에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와 개성을 둘러보았다. 그가 수만권의 책을 갖춘 궁중의 서로를 보고 돌아간 다음 3년 뒤 송은 거란의 침공을 받아 흠종과 휘종 두 군주가 모두 볼모가 됐고,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나갔다. 바로 같은 해 고려도 큰 재앙을 당한다. 이자겸이 군주를 넘보다 궁궐을 불태우고, 이 과정에서 모든 책들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고려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과거를 통해 관료를 뽑고 있어 책이 크게 필요했다. 따라서 고려는 갑자기 많은 책을 찍어내야 할 처지에 놓여다. 송나라에서 책을 들여오는 일도 불가능했다. 결국 여러 가지 책을 찍어내는 길은 활자를 엽전 부어내듯 만들어서 책을 찍어내는 방법 밖에 도리가 없었다.
주자소에서 만든 계미자
고려의 선진 인쇄 문명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했다. 특히 140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해 놋쇠활자 수십만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계미자(癸未字)다. 또한 세종 시대에는 활자모양과 활자판의 짜임새 등 인쇄 방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일어나 기술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금속활자 발명 초기 문제가 되던 판고르기 기술(글자면을 평편하게 하여 먹이 고르게 찍히도록 하는 공정)도 세종 때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크게 발달했다. 당시에는 노인들을 위한 큰 활자를 만드는데 납을 쓴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부수를 찍어야 할 책들은 여전히 목판이 주로 이용됐다. 농사에 필수적인 책력을 매년 5천부부터 1만부까지 목판으로 찍었으며, 책 수송이나 종이 수집 등의 문제로 지방 감영에 내려보내서 그것을 다시 복각하게 하는 목판 인쇄도 이용됐다.
당시의 활자는 구리 합금을 녹여 부어내는 방법으로 제조됐다. 활자를 부어내는데 쓴 금속은 모두가 합금이 었는데, 구리와 주석, 아연의합금인 놋쇠 활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낮은 온도에서 잘 녹는 성질을 가진 아연을 넣는 것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면서도 매우 강한 재질의 활자를 얻는 방법이었다. 유럽에 금속활자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인 구텐베르크는 납과 안티몬 합금을 발명해 그 합금이 지금도 활자쇠로 쓰여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금속활자 뿐만 아니라 무쇠활자 옹기활자 나무활자, 더러는 바가지 활자도 만들어쓴 것으로 알려진다. 나무활자의 재료로는 대추나무 회양목 가래나무 자작나무 배나무 오리나무 등이 쓰였는데, 나무 활자는 18세기에 들어서 민간에서 족보를 찍는데 사용돼 나무활자판을 등에 지고 지방을 돌아 다니며 인쇄해주는 족보찍기 사업이 번성하기도 했다.
우리의 앞선 인쇄술은 다른 나라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간 임오관(林五官)이란 인쇄기술자는 일본에서 권학문(權學文)을 금속활자로 찍는 것을 지도했다. 또 청나라에 잡혀간 할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사람이 된 김간(金簡)은 청의 출판관계 부서인 무영전(武英殿)의 출판 책임자가 돼 활자인쇄의 경제성과 우수성을 주장, 나무활자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찍어내게 했다. 적은 비용으로 훌륭한 인쇄를 이룩한 그는 인쇄왕국의 자손임을 자랑거리로 남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