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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종교-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소생

 

죽음에 대한 사실 판단은 신의 영역인가 과학자의 몫인가.


철학적 종교적 입장에서는 죽음을 단순한 소멸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본인의 의지가 존중되는 장기이식은 새 생명 탄생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나 슬픔의 문제를 생각할 때 하이데거를 위시한 유럽의 실존주의 철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 이 사실에 주목해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한다. 개나 돼지와 같이 다른 동물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그 죽음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인간만이 죽음을 이해하고 의식할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 개개인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맞을 것이냐는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철학 일반에서는 인간이 일단 죽는다고 한다면 벌써 죽음은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나에게 결코 죽음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무시하려는 태도다. 이 태도는 앞으로 맞게 될 죽음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게 한다. 그런가 하면, "왜 내가 죽어야 하나" 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맞게 될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공연히 자신을 괴롭힐 따름이다.

죽음에 맞서는 진실된 실존
 

간 이식수술 장면


이와는 다르게 마지못해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괴롭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실존철학은 이상의 태도와는 다르게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진실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는다. 죽음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가장 확실하면서도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가장 불확실하기도 하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한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은 나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서 대신될 수 없는 '나'만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단독적인' 것임을 인식한다.

이 인식 속에서 죽음은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용감하고 진지하게 죽음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미리 현재의 자기에게 끌어들여 죽음과 직면하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철학은 죽음과 직면함으로써 가장 진실하게 자신의 삶을 결단하며 살아가려 한다. 여기에서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진실 되고도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말한다면 죽음은 '나의 실존'을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실존이란 '가장 진실하고 나 다운 존재방식'을 뜻한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결국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진실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하여 무의미하게 되풀이되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으로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죽음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새로운 '나', 다시 말해 진정한 '나'로 비약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입장에서 뇌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실존주의 철학에 따른다면,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평상시에 자기가 "뇌사상태에 있을 때 어떻게 할 것 인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결정 할 사항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국내의 몇몇 철학자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뇌사의 사망판단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철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은 보수적이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다. 극단적인 예로 인간의 장기이식은 결국 "인간이 인간의 고기를 먹는 것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경향은 뇌사현상에 대해 세계 의학계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인가 과학인가

종교는 죽음의 공포와 슬픔의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해결한다. 이 해결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나는 죽어서 과연 어떻게 되나. 영영 '나'라는 것은 없어지고 마는 것인가. 육체는 비록 죽는다 해도 정신적인 그 어떤 것은 죽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종교적 해답에는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과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이라 해도 그 의미는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르다. 한국인의 무속신앙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뒤의 개개인의 귀신을 뜻하는 신도 있고, 그리스의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만 인간보다 월등하게 클 뿐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 인간이 지니는 온갖 부도덕성도 지닌 인간적인 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서양 계몽시대의 이신론처럼 우주 만물의 변화하는 원리를 의미하는 신도 있는가 하면, 유태교나 그리스도교 또는 이슬람교처럼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완전무결한 절대자로서 인격을 지닌 인격신도 있다.

이 가운데 절대적인 인격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인간 개개인의 생명을 포함해 우주의 자연사물이나 인간의 역사 등 모든 것이 오직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 한다. 따라서 죽음 또한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함께 신의 은총을 통해 부활하여 신과 함께 영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부활을 통한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소망과 연결되기도 한다.

뇌사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는가. 카톨릭의 공식 입장을 압축해서 말하면, 생명의 주인인 신의 섭리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면서도 죽음이라는 사실판단은 교회의 권한이라기보다 과학자의 몫이라는 것. 따라서 최근 윤리신학자들 사이에는 뇌사를 죽음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 개개인의 산발적인 육신부활을 믿는 입장과 함께 생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신이라는 점에 유의한다. 따라서 뇌사자의 장기이식은 많은 논란을 야기 할 수 있다.

절대적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의 종교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봄과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런 종교들 가운데 불교에서는 죽음이 아주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불교는 인간 개개인과 자연사물을 포함해 모든 것이 다 무수한 상호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존속하며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나라는 것도 정신적 그리고 물질적 여러 차원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러한 변화과정 가운데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수행의길, 희생으로 인식

따라서 불교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호흡이 끊어지고 체온이 사라지며 정신작용이 소멸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3가지는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완전한 소멸이나 정지에 이르면 다른 작용도 곧 소멸해 결국 죽게 된다. 이미 죽은 육체는 마치 돌멩이나 썩은 나무토막과 다를 바 없지만, 일생동안 자신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은 잘·잘못과 관계없이 그 어떤 힘 혹은 세력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이 세력의 작용이 여러 요인들을 끌어당기는 인력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생명체를 구성해 다른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다. 윤회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반복현상이다.

불교는 우주 삼라만상을 전체적인 하나의 생명현상으로 본다. 즉 모든 사물이 전체 생명현상의 연결고리들이다. 따라서 사람은 물론 다른 동물이나 심지어는 산이나 냇물 내지 이름 없는 풀이나 돌맹이까지라도 해쳐서는 안된다. 그래서 죽은 사체라고 해도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는 없다. 불교에서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은 바로 이런 성질의 실천사항이다.

다만 종교에서 자신을 회생해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라는 것은 종교에 따라 신이 기뻐하시는 바에 따르는 신앙적 차원의 윤리 문제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에서 확인되듯이 우주 삼라만상을 전체적인 하나의 생명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모두 나 자신과 하나의 동일체라는 생명관에 따른 윤리적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승불교의 나라인 태국이나 실론에서는 장기 기증이 비교적 보편화돼 있다. 죽게 된 사람을 위해서라면 뇌사상태를 기다려서가 아니라 살아서 스스로 자비심을 발휘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불타는 무수한 윤회의 과정 속에서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에게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중생구제의 수행을 닦았다는 점이 바로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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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선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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