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놀고 있는' 땅을 일구는 시민이 의외로 많다. 이미 뿌리내린 텃밭문화를 활성화시켜 서울 환경을 회복하자.
서울시는 최근 마을에 방치돼 있는 소규모 시유지나 잡종지를 시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소공원 형태의 마을마당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또한 가족농원 주말농장 등이 서울시민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몇몇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분양할 때 텃밭을 끼워 팔기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가족텃밭으로 불리는 도시 내 주말농장은 어린이의 자연학습장으로서, 그리고 가족의 여가공간으로서 점점 그 인기를 더하고 있다. 한편 도시에 산재한 공한지 상태의 사유지 및 국공유지를 인근 주민들이 무단점유해 채소를 경작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미 많은 시민들은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아파트 베란다나 단독주택 옥상 등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틀어 '도시농업'이라고 한다.
도시농업은 도시생태계를 유지하고 보호한다. 공한지 상태에서보다 표토유실을 줄이고, 도시의 물순환에 도움을 주며, 공한지가 쓰레기 투기장처럼 되는 것을 방지하는 등 도시생태계 순환에 좋은 역할을 한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또한 도시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라는데 필요한 맑은 공기가 충분히 제공된다. 특히 도시농업지가 공장과 주택지 사이, 도로와 주택지 사이, 도시중심부에 위치할 때는 공기정화기능, 소음방지 기능까지 수행한다.
야생동물의 서식지 역할도 있다. 도시농업지가 없었다면 나비 잠자리 등 곤충들을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에너지 절약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도시농업의 수확물은 시장에서 유통되는 농산물에 비해 그 생산이나 유통과정에서 훨씬 적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재활용 가능한 물건들은 임시창고를 만드는데 쓰이고, 잡초나 음식물찌꺼기 등의 유기물은 퇴비로 이용된다. 또한 생산과정에서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수확하고 버려지는 줄기나 껍질은 모두 현장에서 썩힐 수 있다.
최근 서울에서는 광범위하게 도시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서울시 농촌지도소가 주관하는 '시민과 함께하는 농업'은 일종의 주말농장으로서 1992년 첫해 봄에 60명, 가을에 5백 명, 1993년에 3천명, 1994년에는 5천여 명이 참여했다. 한편 사설로 운영하는 주말농장도 자연학습장과 가족의 여가공간으로 인기를 더해 가고 있는데 서초구에만 1만9천여평의 주말농장이 있다. 이곳은 농기구를 빌려주며, 계약기간 9개월에 임대료는 5만원(개인, 3평)에서 33만원(단체, 20평)까지 다양하다.
한국 어린이자연학습연합회도 구로구 항동 등지에 주말 자연학습장을 마련, 회원을 모집했다. 한강관리 사업소는 한강 시민공원에서 보리를 수확해 양로원과 고아원에 보내기도 했다. 1995년 가을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동편의 빈공간에 약 16평의 민속텃논을 조성해 벼를 수확하기도 했다.
최근 모 건설회사는 상계동의 빌라를 분양하면서 가구마다 8.5평의 텃밭과 11.6평을 차지하는 배나무 한 그루씩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다른 건설회사는 도보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10평 정도의 텃밭을 가구마다 딸려 분양하기도 했다.
3만 명이 넘는 서울 농부
각 가정에서는 한두 평의 자투리땅을 이용, 손바닥 정원에 갖가지 채소나 화훼를 기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종암동에 사는 L씨는 1984년부터 시멘트 옥상을 농원으로 개조해 여러가지 과실수와 채소를 길러왔다. 단독주택 30평 옥상을 놀려두는 것이 아까워 자녀들에게 자연도 배우게 하고 농촌생활도 익히게 하려고 시작한 것이 9평의 차고옥상과 0.7평의 대문위까지 늘어나게 됐다.
중랑천 성내천 탄천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도시농업이 이뤄지고 있으며 서울외곽의 버려진 농지에서는 상업농 수준의 대규모 도시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서울시 전체의 공한지를 따로 조사한 통계가 없고, 나대지 유휴지 등 유사개념이 많아 서울시에 어느 정도의 토지가 공한지 상태로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가지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92년 현재 서울시 면적의 5%인 약 30㎢ 정도가 공한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공한지를 무단점유해 이용하는 도시농업자는 대략 약 3만명 정도로 예상된다. 이들은 도심부 및 일부 공업지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구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물론 자기집 정원에서 채소를 가꾸는 시민, 주말농장에 텃밭을 가지고 있는 시민 등을 포함하면 서울시 도시농업 종사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특히 필자는 1992년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중심축 20개 블럭 중 제4블럭, 서초구 반포동 뉴코아백화점 맞은편의 토지구획정리 사업지구 내 학교용지, 그리고 노원구 상계동의 주공아파트 9단지 인근의 한 종교용지 등 3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3개 사례지역 모두 도시농업자는 대부분 지역 거주민이었다. 목동 및 반포동 경우는 각각 50명 정도의 도시농업자가 경작하고 있었으며 상계동의 경우는 약 20명 정도였다. 경작자는 대부분 노인이었다.
조사결과, 이 지역들에서 도시농업의 환경보전효과가 대부분 확인됐다. 다만 많은 도시농업자가 비료와 농약을 부적절하게 사용해 토양오염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해충의 천적인 새나 이로운 곤충이 거의 없는 도시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서울의 도시농업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예로부터 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급속한 도시화 공업화 과정에서 경시됐을 뿐이다. 이제 환경위기를 맞아 우리 고유의 텃밭문화를 오늘에 되살려, 서울의 도시환경문제도 해결하고 지구환경보호에도 이바지할 때가 왔다.
우리에게 땅을 달라
서울의 도시농업을 활성화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적절한 장소를 확보하는 일. 이상적인 도시농업지는 인구밀집지역에 가까우면서 규모가 어느 정도 커야 한다. 독일의 여러 도시들은 소위 '유모차 거리' 개념을 바탕으로 각 가정에서 1-2㎞ 거리 이내에 상당한 규모의 도시농업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서울시 농촌지도소 등에서 추진하는 '외곽의 농지를 이용하는 도시농업'은 앞으로 도심부까지 확대될 필요가 있다.
한편 서울시내 공한지는 대부분 개발 유보지이며 그나마 계속 감소되고 있다. 따라서 놀고 있는 시유지 뿐 아니라 사유지도 임시적으로 도시농업지로 사용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리고 서울시는 영구적인 도시농업지를 시민에게 공급하기 위해 도시에 산재한 여러 형태의 공한지를 조사하고 이를 경작 가능지와 경작불가능지로 분류하는 등 공한지 관리를 체계화해야 한다.
도시농업은 도시계획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미 선진국의 도시농업지는 공원 자연림 등과 함께 도시의 공적인 녹지대로 인정돼 도시계획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개별 도시농업지가 생태공원 자연보호지 어린이 놀이터 등과 종합적으로 연계되도록 운영돼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서울의 도시 공간구조를 획기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도시와 농촌이 통합돼 서로의 장점이 조화되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를 검토하는 것이다.
도시농업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시계획 체제가 기존의 성장주의에 입각한 틀을 깨고 환경친화적 사고를 통해 재편성돼야 한다는 점이다. 환경보전이 중시되고 시민이 주인되는 새로운 도시계획 체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도시농업은 결코 활성화되지 못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현재의 도시계획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자연의 요소를 도시 깊숙히 끌어들이는 도시농업이 앞으로 적극적으로 권장돼야 한다. 자동차와 고층건물에게 뺏긴 자연을 되찾아, 서울이 자연에 기생하는 환경 파괴적 도시가 아니라 자연과 공생하는 환경 친화적 도시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 한다
세계는 지금 도시농사 중
녹색게릴라의 빈 땅 찾기 극성
이미 마야문명 시대에 도시에서는 곡식 생선 과일 채소 등이 생산되고 있었다. 유럽 중세도시의 집 뒤뜰에는 채원이 있었고 도시에 살면서 농업이 직업인 사람들이 많았다. 도시는 하천을 끼고 발달하는 경우가 많아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농사짓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현재 도시농업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행해진다. 우선 영국에는 얼로트먼트(allotment)라는 취미농원이 있다. 얼로트먼트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도시생태계 보호차원에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으며 많은 시민들이 얼로트먼트를 임대받기 위해 몇 년씩 대기하고 있다. 또한 얼로트먼트의 전통은 도시농장 동네정원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도 동네정원이 많이 있는데 이미 1983년에 전국적으로 약 3백만명의 시민들이 약 1만여개의 동네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1983년 뉴욕에서는 4백50개소에 이르는 동네정원 경작자들이 새로운 모임(New York City Neighborhood Open Space Coalition)도 결성했다. 또한 '녹색게릴라'라는 단체도 생겨나 빈 땅만 생기면 이를 동네정원으로 만들고 있다.
독일에는 소정원이 있다. 소정원은 19세기 초반 의사 슈레버가 환자들의 치유를 돕기 위해 고안했다. 현재는 도시환경이 점점 악화되면서 소정원의 도시 환경 보존효과가 중시되고 있다. 1992년 뮤니히에는 47개소의 영구적인 소정원과 28개소의 임시 소정원이 있다.
한편 코펜하겐의 시민들은 도시외곽의 취미 농원지를 경작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헤이그나 독일 베를린의 어린이들은 도시에서 농사짓는 일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도시농업은 동유럽과 러시아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전쟁중인 사라예보에서도 사람들은 빈터 아파트옥상 등에서 채소를 가꿨다. 일본 네덜란드 칠레의 경우, 농촌에 사는 농민보다 도시에 사는 농민들이 더 많은 실정이다.
도시에서 넓은 토지를 차지하는 대학 병원 군부대 공원 등의 내부와 그 주위는 도시농업지로 알맞은 땅이다. 이미 카메룬의 공항, 마닐라 대학 구내, 리마의 몇몇 병원, 샌프란시스코의 군사시설부지, 자카르타의 경마장, 상파울로의 고압송전선 선하부지, 방콕의 궁궐 내에서 도시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농업은 도시 내 토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베란다는 물론 단독주택의 옥상에서 채소를 가꿀 수 있다. 미국 샌디에고의 주택 옥상에서는 약초들이 재배되고 있고, 인도 델리의 주택 발코니에서는 누에들이 자라고 있으며, 멕시코시티의 불량주거지에서는 토끼가 사육되고 있다. 캐나다의 맥길 대학은 건물 옥상에 채소밭을 만들어 도시농업의 장단점을 실험하기도 했다.
한편 세계의 많은 도시정부들은 현재 도시농업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카르타 시정부는 공한지를 생산적으로 이용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며, 뉴욕시 정부도 놀고 있는 시유지를 시민들이 채소를 경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