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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속성재배' 가능한가

96년 한국고등과학원 출범

고등과학원이 '노벨상의 꿈'을 안고 설립된다. 주연-공개 모집, 제작-청와대, 극본-과기처, 감독-노벨상 수상자, 노연-원로과학자, 협찬-아태이론 물리센터, 제작기간-최소 15년, 촬영장소-과학기술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테마는 이론물리, 이로써 '노벨상 드라마'의 준비는 끝났는데….


노벨상 시상식 전경. 단상 위에 설 최초의 한국인은 누구일까.


올해도 태극 마크를 단 노벨 수상자는 없었다. 노벨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이면 각 신문사의 과학기자들은 분주하다 어떤 사람이 노벨상을 받을까 어떤 연구로 어느 나라 사람이 받을까. 스웨덴에서 날아올 외신을 기다리며 기자들은 밤을 새운다.

외신이 하나 둘씩 도착하기 시작하면 기자들은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 분야, 소속 연구소와 출신 대학을 확인하고 이를 잘 알만한 국내 학자들을 찾아 나선다. 조간의 경우엔 새벽 신문에 소개하기 위해 학자들의 곤한 잠을 깨우기 일쑤다. 노벨상 수상자와 관련된 국내 학자들의 인내도 높이 살 만하다. 한곳도 아니고 여러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하고, 원고를 써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꿈꿔 보는 노벨상. 언제쯤이나 태극 마크가 붙을까.


94년 12월 노벨상 시상장면. 노벨상은 개인에게 더 없는 영광이요, 국가에게 큰 자랑이 된다.


'빠르고 손쉽게' 타는 방법?

노벨상은 결코 꿈이 될 수 없다. 올림픽4위, 세계 무역 순위 12위. "이제는 우리나라도 노벨상을 탈 때가 됐다"는 게 국민적 염원이다. 지난 7월 미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재미 한국인과학자를 모아놓고 매우 뜻깊은 연설을 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 발전을 위한 세가지 청사진을 발표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등과학원의 설립. "젊은 과학도들이 해외에서 초빙된 석학들의 지도 아래 노벨상에 도전하는 실력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한다"는 대통령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하고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왜 고등과학원 설립이 필요한 것일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고등과학원의 설립은 노벨상을 '빠르고 손쉽게' 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동안 노벨상을 받아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 진다.

노벨상을 타기 위해선 탁월한 연구 업적 이외에 중요한 두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나는 어떤 연구를 하느냐다. 숙명여대의 김명자 교수는 "과거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 업적은 특정 분야에 몰려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의 말대로 50년대까지는 물리학에서 양자론 분야가 가장 많은 노벨상을 냈다. 60년대 의학생리학에선 유전자와 분자생물학 연구가 가장 많이 탔다. 70년대에는 물리학의 경우 무선 X선 전자 분야가, 화학의 경우 생화학 분야가, 의학생리학의 경우 신경조직과 유전자 분자생물학 분야가 노벨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노벨상이 특정 분야로 몰리는 현상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90년대 물리학상은 소립자 분야가, 화학상은 생화학 분야가, 의학생리학상은 분자생물학이 차지하는 빈도가 높다. 결국 결론은 하나. 노벨상을 받을려면 확률이 높은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고등과학원 설립 시나리오는 여기서 출발한다.

노벨상을 타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추천을 받느냐다. 김 교수는 "노벨상처럼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공정하게 이뤄지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정에 끌리기 마련이다. 만약 이점이 노벨상의 취약점이라면 노벨상을 선정하는 데 입김이 센 사람을 찾아야 한다.

"노벨상을 선정할 때 수상 경험을 지닌 사람의 의견이 상당히 존중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최순달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은 말한다. 만약 그의 말이 맞다면, 고등과학원 설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다. 그런 사람을 유치할 수만 있다면 노벨상을 타기 위한 유력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고등과학원 설립에 노벨상 수상자를 유치한다는 것은 제2의 전술 목표.


95년 7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인과학자들을 만나 한국 과학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감독 선정부터 어려운 작업

고등과학원은 가장 효과적으로 노벨상을 타기 위해 확률 높은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선정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유치한다는 전략 아래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를 제작할 때 테마와 감독을 정하는 일에 빗댈 수 있다. 이미 제작을 맡은 청와대와 극본을 쓴 과기처 사이에 합의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제작자와 작가가 완벽한 극본을 짰지만 작품을 만드는 일에는 장애가 많았다. 계획대로라면 먼저 감독을 선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 않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해도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이 굳이 한국에까지 와서 연구하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서울대의 김제완 교수는 "고등과학원장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영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외국에서 연구 중인 세계적인 한국인과학자를 모셔오는 데 그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감독 선정부터가 계획과는 차질이 생긴다.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는 데 또 하나의 벽은 국내 연구자들의 여론이다. 연구자들이 고등과학원을 그리 탐탁치 않게 보는 까닭이다. 노벨상이 기초과학 수준의 지표이기는 하지만, 굳이 노벨상을 타려고 고등과학원이란 특수 연구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노벨상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수준을 대표하지 못한다. 노벨상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과학 분야의 경우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등 3개 부문에서 시상되고 있다. 즉 여기엔 수학이나 지구과학 등 많은 기초분야가 빠진다. 어떤 이는 노벨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다윈이 지금 연구를 했어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뼈있는 말을 했다. 또 특정분야를 집중 육성할 경우 소외된 학문이 생기고 이로 생긴 불균형이 더 큰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과학 교육의 방향을 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대의 박승재 교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과학 실력이 뒤쳐져서는 노벨상은 물론 과학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노벨상을 마음먹는다고 탈 수 있겠느냐, 기초과학 전반에 대한 육성책이 필요하다 등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다. 특히 96학년도부터 학부제가 실시되면서 비인기 과학 교수들은 "국가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소외되는 분야가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등과학원과 직접적인 이해 관계를 지닌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이들 연구자들로부터 이해와 동의를 구하기 위해 마련된 안이 명망있는 원로과학자들의 동원이었다. 주로 학술상을 받은 사람들로 선택됐다. 당시 고등과학원의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서강대의 윤능민 교수는 "우리들은 고등과학원에 대해 잘 모르고, 모 교수의 부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원로교수들이 별로 한 일이 없다는게 뒷얘기다.

주요 테마는 이론물리

고등과학원을 이끌어나갈 감독은 계속 물색한다고 치고, 조연들은 이미 동원됐다. 고등과학원의 실연 장소까기 한국과학기술원내로 둔다고 정한 상태다. 그런데 정작 드라마의 테마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의 문제다. 고등과학원의 초기 연구 테마는 모집하려는 미래의 노벨상 주인공들을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와도 깊게 관련돼 있다. 현재까지의 객관적인 상황을 봐선 고등과학원의 연구 테마는 '이론물리'가 되기 싶다.

내년에 '아태이론물리센터'라는 고등 연구기관이 한국에 설립된다. 이것을 유치하려는 호주와 싱가포르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한국이 아태 지역국가들로부터 최후의 낙점을 받았다. 국제적인 연구 기관이 있으면 이득이 많다. 많은 우수 과학자들이 몰리고, 이를 통해 국내 연구도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태이론물리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준비 위원장을 맡았던 김제완 교수는 "이론물리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연구시설이 특별히 필요치 않아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등과학원에서 이론물리를 하게되면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또 "이 분야의 국내 연구 인력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기 때문에, 노벨상을 타기 위한 전략 연구과제로는 적격이다"는 게 추진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지금까지의 고등과학원 시나리오는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고 치더라도 가장 중요한게 마련돼야 할 것은 예산, 곧 돈이다.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려면 연구시설을 짓고 연구자들을 유치하고 운영을 하기 위해 많은 돈이 든다.

노벨상을 타기 위해선 놓은 논문이 나온다고 해도 최소 15년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번에 화학상을 받은 분들은 20년 이상 기다렸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라이네스 박사는 40년을 넘게 기다렸다. 그래서 고등과학원을 운영하기 위해선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예산 편성 없이는 용두사미가 될 수 밖에 없다.

노벨상을 타기 위해 세워진다는 고등과학원은 무궁화위성과 더불어 95년 과학기술계의 최대의 화제였다. 고등과학원은 96년에 한국과학기술원 내에 설립된다. 비록 적지만 50억원의 예산도 마련됐다. 누가 뭐라든 고등과학원은 출범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면서 추진하는 사람들의 시달림도 말이 아니다. 먼저 와전된 노벨상 논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원래 고등과학원 설립은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쟁력을 갖추고 기초과학 선도력을 지닌 연구를 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중 설득과정에서 노벨상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고등과학원 설립의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자꾸 구설수에 오르자 고등과학원 설립에 함께 참여했던 교수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정근모 과학기술처장관이다. 정 장관은 과학기술계에서 리더쉽도 있고, 특히 김 대통령과는 친분이 두텁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기초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지금이 적기라고 말이 오가고 있다. 추진력있는 장관과 정부의 관심이 모아졌다는 얘기다.

고등과학원의 설립이 이제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말은 여러 해 전부터 나왔다. 그동안 많은 정부출연연구소들이 기초연구를 목적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이 기관들이 갈수록 관료화돼 가고 있으며, 다른 연구 기관들(대학을 포함해서)과 협조도 잘 되지 않는다는 지적들이 있었다. 그래서 현 연구기관들은 나름대로 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되고, 고등과학원처럼 한 단계 높은 연구기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등과학원은 김영삼대통령의 세계화 전략과 그 맥을 같이한다. 경쟁력있는 연구 분야를 집중 투자해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세계 속에 내세울만한 연구 기관이 한반도에 있다면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으로 몰릴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연구 부수 효과는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된다. 이점은 고등과학원 설립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부정하지 않는 점이다.

고등과학원이 고등연구소로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왕 생긴 고등과학원이 국내 연구 수준을 끌어올리고, 탁월한 업적을 내 '노벨상'을 탈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아마 원로교수들이 고등과학원 설립에 기꺼이 동참했던 것도 이와같은 기대 때문일 것이다. 고등과학원을 둘러싸고 왜곡된 시나리오가 생기는 까닭은 아직까지 고등과학원에 대한 홍보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 또 과학기술계의 이해 관계가 첨예해졌지 때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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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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