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첨단기술 갖고 한국 찾은 옛 소련 과학자들

어디서 어떤 성과 올리고 있나

올들어 국내 연구소 대학 기업에 핵심기술을 전수하려는 구 소련 과학자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어떤 과학자들이 와있으며 그에 따른 효과와 전망은 무엇인가?

독립국가연합(CIS, 구 소련) 과학자들이 몰려오고 있다.

지난 3월 26일 러시아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오브치니코프(화학물리연구소)가 서울대 물리학과 연구원으로 초빙돼 온 것을 비롯 현재 25명의 CIS 과학자들이 국내 연구소 대학 기업체 등에서 옛날 소련이 쌓아올렸던 첨단과학기술을 전수해주고 있다. 현재 계약을 추진 중이거나 입국수속을 밟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올해안으로 1백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한국땅을 밟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연방해체 이후 극심한 연구비 부족과 생활고에 허덕이던 이들 과학자들이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보장하는 자본주의권으로 탈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국내 과학자의 말을 빌면 "구 소련 과학기술자들의 해외유출은 마치 70년대 중동붐이 한창일 때 너도나도 중동으로 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는 듯하다"고 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CIS 정부측도 이러한 현상을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달러부족을 조금이라도 모면해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6월 제1차 한소과학기술장관 회담에서(이때는 소 연방이 해체되기 전이다) 양국간에 20개 과제를 공동개발하기로 한 데에 이어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한러과학기술장관 회담에서 30개 연구과제를 새로이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말이 좋아 '공동개발'이지 러시아의 첨단과학기술을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일방적으로 배우는 과정이다.

이 때문에 우리 과학계에서는 이들을 은근히 반기는 분위기다. 최근 미국과 일본의 기술이전 기피현상이 두드러져 기술없는 설움을 톡톡이 치르고 있던 차에 이들 선진국들이 꺼려하는 핵심기술을 비교적 싼 값에 배워올 수 있다는 것이다.

CIS 과학자들이 국내에 들어오는 경로는 대략 세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양국간 과학기술협정에 따라 공동개발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입국하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양국 장관이 48개 과제를 합의했는데 이 가운데 20개 과제가 현재 진행중이다(표).

둘째 경로는 한소인력교류프로그램에 따라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소에서 3개월 이내의 기간으로 CIS 과학자를 초청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 한소과학기술협력센터(소장 권오관)가 관장하고 있다. 셋째는 민간기업이나 단체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임의로 필요한 사람을 초청할 수 있다. 이 경우 초청에 필요한 비용은 당연히 초청기관이 부담한다.
 

(표) 한·러시아 첨단기술 이전 및 기업화 추진 과제
 

세계적인 권위자도 초빙

최근 국내에 들어온 CIS 과학자들은 연구 경력이 10년 이상된 박사급 고급인력으로 해당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학자도 더러 있다. 교포들도 간혹 눈에 띈다.

연구소 가운데 소련인이 가장 많이 들어온 곳은 역시 KIST. 아무래도 한소과학기술협력센터가 연구소내에 있어 정보교환이 빠른 모양이다. 바딘철강연구소 소속의 우도벵코는 방진방음합금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그는 지난 89년 음향 및 진동감쇄율이 나무보다 우수한 합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는데 이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신명철박사 등 경량합금연구실의 연구원 5명이 땀흘리고 있다.

안효석박사의 초청으로 들어온 그리고리예프(금속고분자연구소)는 IBM PS/2용 소프트웨어 수정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수리학 및 전자계측분야의 권위자이며 레닌그라드 과학아카데미회원인 재소교포 장학수박사도 KIST에서 한소과학기술교류에 관한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KIST에는 데니소프(새턴초전도센터, 초전도응용) 비탈리 보시(SPA 새턴, 마이크로파) 부코베츠(물리화학연구소, 플라즈마) 톨마초프(물리화학연구소, 플라즈마) 코발렌코(셰마킨유기화학연구소, 도핑) 고로비츠(생화학연구소, 도핑) 등 러시아 과학자들이 하반기에 줄이어 들어올 예정이다.

항공우주연구소는 러시아중앙항공우주연구소로부터 미그기 설계에 이용된 '아르곤'이란 소프트웨어를 사왔는데, 이와 관련 러시아 과학기술자 3명이 직접 우리나라를 찾아와 이 시스템의 설치 및 교육을 도와주었다. 이 소프트웨어는 미국측이 수십만달러에도 팔지 않던 것인데 우리가 러시아로 부터 사온 가격은 5만7천달러.

원자력연구소에는 쿠르차토프연구소 핵융합연구부의 이온주입연구실장인 구세바(여)와 아타마노프 두사람이 초빙돼 왔다. 이온주입기술은 높은 에너지로 티탄 크롬 등의 이온빔을 가속시킨 다음 금속 표면에 쬐어 내부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금속의 경도를 높이는 표면처리기술로 군사 및 항공우주분야에 각광받는 핵심기술. 원자력연구소 최병호박사팀은 이 기술을 전수받아 금속이온주입기 시제품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에너지기술연구소에 와있는 포펠과 실라인(고온열공정연구소)은 태양열 등 대체에너지분야에 상당한 노하우가 있는 인물. 이 연구소에는 러시아고려인과학기술협회 부회장 알렉세이 최(이스크라키르키즈연구소)도 에너지기술 자문을 위해 체류하고 있다.

이들 외에 유전공학연구소에 와있는 베브로프(연방생명공학연구소, 메탄올자화효모기술), 기계연구소에 초청된 코노프(일반물리연구소, 엑시머레이저), 전기연구소에 머물고 있는 바리포도프(러시아연방전구연구소, 가스절연개폐장치), 해사기술연구소에 들어온 록신(파톤용접연구소, 전기빔용접) 등도 러시아에서는 지명도가 높은 중견 과학기술자들이다.
 

첨단기술 갖고 한국 찾은 옛 소련 과학자들
 

선임연구원급 대우

대학에는 전기를 통하는 플라스틱 분야의 권위자인 오프치니코프(화학물리연구소)가 지난 3월부터 서울대 물리학과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네스메야노프 유기화합물연구소 정밀화학실장인 칼리닌이 경북대 심상철교수(공업화학)와 모르핀 등 유기화합물을 이용한 의약품 합성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삼성종합기술원에는 광전자연구 권위자이자 러시아고려인과학기술협회 회장인 게오르기 박(폴저스연구소)이 1년 계약으로 지난 4윌부터 레이저광전자 등 반도체기술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대우중공업도 올들어 10명의 CIS 과학자를 초빙해 농업용 무인헬기와 경헬기개발에 참여시키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러시아인 과학자들이 국내기업들의 기술자문에 응하기 위해 입국하고 있으나 체류기간이 한달 이내거나 해당 기업에서 공개를 꺼려 자세한 현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CIS 과학자들이 받는 대우는 항공료 숙식비를 제외하고 월 1천~2천달러. 러시아에서 박사급 연구인력이 받는 1천~5천루블(10~50달러)에 비하면 1백배 정도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 한국에 들어와 석달 정도 일해주면 본국으로 돌아갈 때 3년치 월급을 챙겨갈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 연구소나 기업들도 싼 값에 고급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환영한다. 월 1천5백달러면 선임 연구원이나 기업체 과장이 받는 수준이다. 또 연구소나 기업체에 딸린 외국인숙소에서 자고 내부식당에서 한국인 연구원과 같이 식사하므로 숙식에 따른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KIST 어느 연구원의 경험담. "기업체에 있을 때 독일에서 고가의 실험장비를 사왔는데 이를 설치하고 교육하기 위해 독일인 기술자 두명이 따라 들어왔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지불되는 보수가 박사이던 내 월급의 3배나 되는 것을 보고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만 찾으니 숙식비용 또한 수월찮았을 것이다. 현재 CIS 과학자들에게 드는 비용으로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 꺼려하는 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초청해준다면 언제든지 오겠다"

지난 5월말 세계한민족과학기술자공동협의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CIS 교포과학자들은 "한국 정부가 러시아 카자크 우즈베크 등에 흩어져사는 교포과학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초청해 그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돕고 또 그들이 과학기술을 통해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에 따르면 조선족이 머리가 좋아 과학기술계통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높은 대우와 존경을 받아오던 과학자들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물가가 급등하고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떨어져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우즈베크고려인과학기술협회 회장을 맡고있는 베체스라브 엄(고체역학)은 자신의 월급이 3천루블 정도인데 모스크바에 가면 그 돈으로 양복 한벌도 못산다고 말했다. 반면 택시기사나 판매사원 등이 1만루블 이상의 소득을 올려 과학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다고 한다.

지난 90년 재소고려인과학기술협회(현 CIS고려인과학기술연합회)가 설립된 이후 러시아 카자크 우즈베크 등 세나라에 한인과학기술자조직이 만들어져 있다. 카자크고려인과학기술협회 이반 박회장은 "교포 과학자들이 누구나 한국을 한번 와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협회 일에도 매우 협조적이며 한국어를 배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소개한다.

수학을 전공한 그는 2년전 한국을 처음 방문했는데, 당시 광운대 김철 교수와 응용수학에 관한 대학교재를 영문으로 공동저술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이번에 올 때 절반 분량의 원고를 직접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숨기는 것이 없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기술을 전수해주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하다.
 

경계 눈빛 노골화하는 미국

구 소련 과학기술자의 역할에 관한 국내 과학자들의 평가는 긍정적인 편이다. CIS는 재료 에너지 기초과학 금속 항공우주 분야에서 미국 일본과 더불어 세계 정상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과학자들도 만약 이들이 미국이나 일본에 있다면 좀체로 모셔오기 힘든 인물들이다.

초청되어온 과학자들의 태도도 진지하다. 자본주의적인 이해타산에 때묻지 않아서 인지 숨기는 것이 없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기술을 전수해주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하다고 한다.

한소과학기술협력센터 권오관소장(기계공학)은 "구 소련의 첨단과학기술 특히 군사 및 항공우주 핵에너지기술의 해외유출에 관해 미국 등 선진국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고 CIS 내부 체제가 정비되면 현재와 같이 싼값으로 핵심기술을 이전받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앞으로 2,3년이 구소련으로부터 기술을 빼내오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강조한다.

실제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들은 최근 모스크바에 국제과학기술센터(ISTC)를 설립, 러시아 과학자들의 해외유출을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얼마전 항공우주연구소에 러시아 과학자들이 들어와 항공기설계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보도가 나가자 미국측이 이 연구소에 비공식으로 항의하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CIS 과학자 유치에 따른 문제점도 없지 않다. 구 소련 과학자들은 일찍부터 한 분야에만 전념해 연관되는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다. 이 때문에 어떤 분야에 대한 기술을 전수받으려면 여러명의 과학자를 초청해야 하나의 완결된 과정을 배울 수 있다.

국내 기업과 연구소들이 경쟁적으로 이들 과학자들을 접촉해 터무니없는 몸값을 요구하는 사례도 최근 들어 빈번히 발생한다. 이름이 좀 알려졌다 싶은 러시아 과학자를 찾아가면 서랍속에서 국내 여러 연구소와 맺은 기술협약 서류뭉치를 꺼내보인다는 웃지못할 얘기도 과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권오관소장은 "인력교류프로그램으로 초빙되는 과학자는 월 보수가 획일적으로 책정되어 최근에는 우리가 꼭 필요한 과학기술자를 데려오기 힘든 형편이다. 이와 함께 한정된 예산으로 계획보다 많은 사람을 유치하려다 보니 우수한 과학자를 유치하는데 무리가 따른다'고 빠듯한 예산으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한다.

최근 구 소련에 빌려준 차관에 대한 이자를 못받아 "CIS에 경제원조를 계속 하느냐 마느나'하는 문제가 정부 일각에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원금회수 전망이 불투명한 경제원조에 비해 과학자유치는 밑천이 금방 회수되는 '알짜배기 거래'다. 그리고 이렇게 유리한 거래는 앞으로 몇년이 지나면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이 과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미국 일본의 기술장벽을 넘어서려면 구 소련의 수준높은 핵심기술을 전수받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든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이에 따라 당분간 CIS 과학기술자들의 발걸음이 더욱 잦아질 전망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김학진 기자

🎓️ 진로 추천

  • 물리학
  • 기계공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