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7일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올해의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자로 시드니 브레너와 로버트 호비츠, 존 설스턴 등 3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들은 ‘장기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세포사멸프로그램(cell death program)에 관여하는 새로운 유전자의 조절 메커니즘’을 규명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들의 업적은 시기가 문제이지 언젠가 노벨상을 수상할 거라고 예견해 왔을 정도로 이미 학계에서는 생물학사의 한획을 그은 연구 결과로 인정받고 있었다.
예쁜꼬마선충이 일등공신
생물학 연구의 최종 목적이 인간의 건강한 삶의 추구라고 감히 설정할 때, 이번 노벨상 수상자들은 질병 정복의 가능성을 제시해 생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수상자들이 세포사멸에 대한 연구를 인체를 대상으로 했을 것이라고 오해할지 모르겠다. 사실 생물학 연구는 그 목적에 걸맞은 실험대상 모델시스템이 필요하다. 인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특화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실험 모델이 필요한 까닭이다. 예를 들어 유전자의 구조와 발현조절을 연구하는 분야인 분자생물학은 초기에 대장균과 박테리오파지와 같은 극히 단순한 미생물만 사용했다. 세포분열과 주기에 관해 연구하는 분야인 세포생물학은 효모와 같은 곰팡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각의 연구분야에 따라 적절한 연구모델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생물은 단세포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과 같이 많은 세포로 구성된 다양한 장기(organ)를 갖고 있는 생물체의 발달생물학을 연구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이번 노벨 수상자 중 최연장자인 브레너 박사는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이 발달생물학 연구 모델로 매우 적합하다는 선구자적인 안목을 제시했다. 예쁜꼬마선충은 몸이 투명해 내부의 장기가 저배율인 해부현미경을 통해서도 관찰이 가능하고, 세대교체를 이루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너 박사는 예쁜꼬마선충의 돌연변이가 특정 유전자와 관련돼 장기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이 분야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브레너 박사는 예쁜꼬마선충 게놈프로젝트에 관여하는 등 평생을 예쁜꼬마선충 연구에 바치고 있다. 노벨상은 항상 그 분야를 처음 개척한 과학자에게 주어진다는 역사가 그의 수상을 통해서 다시 한번 증명됐다고 할 수 있다.
설스톤 박사와 호비츠 박사는 예쁜꼬마선충 연구의 초기단계부터 참여하면서 노벨상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이들은 예쁜꼬마선충의 돌연변이 중에서 장기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발견했고, 그 유전자가 세포사멸프로그램을 유발시키는 단백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또한 이 세포자살단백질이 단백질분해효소라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인체에도 유사한 자살단백질이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설스톤 박사는 현재 영국 웰컴트러스트 생거연구소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호비츠 박사는 현재 미국 MIT에서 여전히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해 새로운 유전자를 발견하는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몇년 전 필자가 MIT에서 이른 아침에 보았던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커피를 들고 연구실로 향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른 세포 위해 선택하는 죽음
세포사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세포사멸이란 말 그대로 세포가 스스로 자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왜 세포는 자살을 해야 할까. 이 의문은 세균이나 효모와 같은 단세포생물에는 세포자살유전자가 없다는 점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다세포 생물체는 수많은 세포들이 서로 어울려 다양한 조직과 장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일부의 세포가 발달단계에서 잘못된 쪽으로 발달하거나 외부의 자극에 의해 손상될 경우, 세포는 전체의 다른 건강한 세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따라서 세포자살 유전자는 항상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목적에서만 작동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돼 있다.
최근에 와서 인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질병은 세포사멸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도 인체의 세포사멸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 있다. 뇌졸중,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환을 비롯해 AIDS는 지나치게 활발히 진행되는 세포사멸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현재 인체질환 중에서 무엇보다도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것이 암이다. 정상적인 세포는 주변의 다른 세포와 항상 조화를 이루면서 성장하고 다른 세포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태가 발생하면 스스로 사멸한다. 그러나 암세포는 주변세포에 아랑곳없이 세포분열과 성장을 지속시켜 전체적인 균형을 파괴한다.
암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포사멸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인 것이다. 따라서 세포사멸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암세포 정복의 첩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세포사멸은 장기발달과 특수 기능을 가진 세포(신경세포, 면역세포 등)의 분화가 올바르게 이뤄지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역설적인 표현 같지만 건강한 사람은 세포사멸프로그램이 잘 작동하는 세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세포사멸에 관한 연구로 세명의 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세포사멸 메커니즘을 이용해 새로운 항암제의 개발과 다양한 질환치료제의 개발 분야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이와 관련된 전혀 새로운 사실이 또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분야가 매력적이고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