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면 찾게 되는 약. 이 약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약 개발을 둘러싼 사연들은 어떤 것들일까? 이달부터 약에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 첫번째로, 아버지의 류머티즘을 다스릴 약을 찾던 한 효자 약학자에 의해 발견된 아스피린 이야기를 소개한다.
발견 당시 아무리 훌륭했던 약이라도 세월이 흘러 더 좋은 약이 나오면 뒤로 밀리고 폐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 거의 1백년이 되었어도 그 약효 그대로 애용되는 약이 있다. 감기 몸살 두통에 사용되는 아스피린이 그것이다.
아스피린은 본래 개발사인 독일 바이어(Bayer)의 등록 상품명이었으나 제1차 대전 후에 많은 국가에서 일반명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약을 만들어내는 일은 발명이라기 보다는 발견이라고 한다. 약의 단서가 되는 화학물질을 발명한 후 그것이 정말 사람에게 효과가 있고 부작용이나 독성이 없는지 발견하는 과정에 더 많은 시간적 경제적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약은 합성 약리 임상 제제 화공 등 많은 분야 연구원들의 공동노력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므로 어느 특정인을 약의 발견자라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그러나 처음의 단서가 될 물질을 찾아낸 사람을 보통 약의 발견자라고 한다.
아스피린의 발견
19세기 초, 유기화학의 탄생기에 화학자들은 물질의 화학적 본질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순수 학문적 차원뿐 아니라 화학연구가 인간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인식을 전파하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이 독일의 리비히(Justus von Liebig)다. 리비히 밑에서 공부한 독일 화학자 아우구스트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mann)은 그의 영국인 제자 퍼킨(William Henry Perkin)과 함께 19세기 하반기 인공염료의 유용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1862년 런던 세계박람회에서 벌어진 논쟁으로 알 수 있다. 호프만과 퍼킨은 자신들이 합성한 염료를 전시하며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식물과 동물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여러 천연염료와 동등한 질의 염료를 콜타르를 원료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연의 것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영국 상류층 인사들은 "유리알과 상아를 마주 바꾸자는 것인가"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결국 천연의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인식은 바뀌었고 바이어와 같은 독일 염료회사가 출현하였다. 바이어는 약 개발에도 관심이 많이 있어서 1888년 카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의 주도하에 진통 해열제 펜아세틴을 개발하였다. 이 약은 90년간 사용되다가 간 독성 때문에 사용이 중단됐다. 당시 지금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해열 진통제 중의 하나인 아세트아미노펜도 합성하였으나 1953년에야 유용성이 인정되어 부활됐다.
펜아세틴 개발과 함께 1888년 바이어는 독립된 제약 부서를 신설하고 1890년에는 약학연구소를 세웠다. 약학연구소소장에는 괴팅겐 대학 약리학 교수였던 드레저(Heinrich Dreser)가 임명되었다. 1898년 헤로인이 개발된 것으로 보아 모르핀의 유도체 연구와 같은 것이 과제에 포함되었던 듯하다.
아스피린의 발견자인 펠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은 1868년 루드비크스부르크(Ludwigsburg)에서 공장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라런어학교에서 공부한 후 여러 곳에서 견습을 거쳤다. 뮌헨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여 1891년 약사가 되었고 계속하여 화학을 전공하여 2년 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간 뮌헨의 정부연구소에서 일한 후 26세의 나이인 1894년에 바이어에 입사하였다.
아스피린 발견은 1897년에 이루어졌는데, 그때 이 연구소에는 8명의 약화학자와 약리학자가 일하고 있었다. 당시 호프만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심한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유일한 약이던 살리실산 나트륨염은 맛이 나쁘고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프만은 연구과제에는 없지만 살리실산의 아세트산 에스테르를 합성할 생각을 하였다. 당시 바이어는 모르핀을 아세틸화하여 헤로인을 합성한 때였으므로 이러한 에스테르의 합성은 일반적인 화학 조작이었을 것이다.
호프만은 순수한 아세틸살리실산을 합성한 후 합성과정과 순도를 증명할 실험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약으로 개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가 받아들여져 드레저는 약리, 임상 실험을 하였고 류머티즘에 효과가 있을뿐 아니라 진통 해열 소염작용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이 물질은 살리실산보다 맛이 좋고 위장장애가 심하지 않았다.
1899년 발매시 상품명을 아스피린(Aspirin)으로 정했는데 아세틸(acetyl)의 a와 버드나무(Spiraeashrub)의 spir를 합한 것이다. 처음에는 분말제였으나 곧 정제로 된 제품이 나왔다.
효자 호프만과 불효자 게르하르트
아스피린은 호프만이 이 세상에서 처음 합성해 낸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스피린의 화학적 정체는 아세틸살리실산으로, 1853년 화학구조의 분류 연구과정에서 독일의 화학자 게르하르트(Charles Frederic Gerhardt)에 의하여 합성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아스피린의 발견자를 게르하르트라고 해야 할까? 이 점은 일반인이 혼동할 수 있는 것으로 1956년 게르하르트의 고향인 스트라스부르의 시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스피린 정제를 봉헌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프만은 약 목적으로 합성했고, 합성물질이 이 목적에 적합한 순수하고 안정한 화합물이라는 점에서 게르하르트를 아스피린의 발견자로 볼 수는 없다.
흥미있는 점은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생각으로 아스피린에 착안한 호프만과 달리 게르하르트는 아버지와 불화가 심했다고 알려졌다는 점이다. 이 불화는 게르하르트가 백연공장에 흥미를 가졌던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하려 하지 않고 순수과학으로서의 화학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불화로 군에 입대하였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돈을 빌려 공작하여 나오기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화학자 리비히, 파리의 뒤마(Jean Baptiste Andre Dumas) 밑에서 연구하여 역사에 남는 화학자가 되었으나 결국 아버지와는 화해하지 못한 불효자로 남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류머티즘을 앓았어도 아스피린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든 약에는 뿌리가 있다. 약 작용은 화학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실마리 구조가 발견되면 구조변형 과정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향상된 약이 출현한다. 이들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공통적인 구조상 특징을 가지게 된다. 이 일반적인 사실을 이해한다면 아스피린에도 뿌리가 있고 또 아스피린을 뿌리로 만들어진 약도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스피린의 뿌리는 호프만의 아버지가 복용하던 약과 같은 살리실산이다.
아스피린의 뿌리
그렇다면 살리실산은 어떤 과정으로 해열 진통 류머티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일까? 살리실산의 뿌리는 석탄과 버드나무 껍질이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증기엔진이 출현하면서 석탄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자연히 화학자들은 콜타르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30년대에는 염료합성의 중요원료가 되는 아닐린, 페놀과 같은 물질이 분리되고 그 조성도 확인되었다. 석탄산이라고 부르던 물질을 페놀이라고 1842년 명명한 사람이 게르하르트이다.
폐놀이 분리되자 1815년 이미 알려진 콜타르의 살균 작용이 이에 의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1860년대 영국의 의사 리스터(Joseph Lister)가 상처 드레싱을 페놀에 담구어, 살균법을 혁명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 후 페놀은 내복 살균제로 그 적용이 확대됐지만 부작용이 심했다. 부식성이라 국소 살균제로 사용할 때조차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착안된 것이 살리신산이다.
리스터의 방법을 독일에 도입한 티이르슈(Carl Thiersch)는 이 문제를 친구인 콜베(Hermann Kolbe)와 상의하였고 그가 추천한 살리실산을 1874년 외과 수술에 처음 사용하였다. 콜베가 개발한 살리실산 합성법이 공업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특히 살리실산이 내복 살균제로 사용되자, 즉시 스위스의 부스(Carl Buss)는 이 약을 복용한 장티프스 환자에게서 해열 진통 작용을 발견하였다. 이 결과는 1875년 발표되었다.
살리실산의 약효 발견은 거의 동시에 버드나무 껍질 연구로부터도 이루어졌다. 버드나무 껍질의 약효는 이미 동서고금에 알려져 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1763년 스톤(Edward Stone)이 영국 왕립협회에서 열병 환자에 대한 임상보고를 발표하여 부활되었고 그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로 중부 유럽에 키나피의 공급이 차단되자 키니네를 대체할 해열제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828년 독일의 부흐너(Johann Andreas Buchner)는 버드나무 껍질액에서 침전을 얻어 살리신이라고 명명했다. 좀더 순수한 결정은 1829년 프랑스 약사 르루(Leroux)에 의해 분리되었다. 1838년 이탈리아의 피리아(Rafaelle Piria)는 살리신을 화학적으로 처리하여 살리실산을 얻어냈다. 식물로부터 얻은 살리실산의 화학조성을 밝힌 사람이 1859년 콜베다. 그는 곧 합성법을 고안했다.
그후 1874년 살리신의 류머티즈열 환자에 대한 효과를 발견한 스코틀랜드 의사 맥라간(Thomas MacLagan), 독일 의사 스트릭커(Franz Stricker), 스위스의 폰노이키(Marcellus von Neuki) 등에 의하여 1876년 이래 살리실산의 류머티즈열에 대한 임상효과가 발표되었다. 스트릭커는 부스의 결과를 보고, 폰 노이키는 살리신이 몸안에서 살리실산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실험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살리실산은 해열 진통 류머티즘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아스피린 탄생 이후
1899년 아스피린이 발매되자 곧 안전한 해열 진통 소염제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한 인플루엔자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여 모든 가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스피린의 작용기전은 1971년에 와서야 밝혀졌다.
런던 웰컴 연구소의 베인(John Vane)은 아스피린의 항염증, 진통 작용이 염증과 통증에 관련된 프로스타글랜딘의 생합성을 억제하기 때문인 것을 알아냈고 이 업적으로 1982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이러한 작용기전은 아스피린이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여 혈전형성을 감소시켜 심근 및 뇌경색증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과도 관계된 것이다.
아스피린의 위장장애를 줄일 수 있는 제형들이 개발되었으나 대량으로 류머티즘에 사용할 때는 내재적인 부작용으로 위출혈과 신장 손상의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류머티즘에는 1900년대 하반기에 개발된 비스테로이드성 진통 소염제가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어린아이에게는 바이러스 인자의 개입으로 살리실산류가 뇌질환 및 간 손상을 가져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수두, 인플루엔자를 앓는 어린아이에 대한 아스피린 복용은 금지되고 있다.
모든 약은 효능과 동시에 부작용, 독성을 가지고 있다. 아스피린과 같이 비교적 안전한 약도 어떤 병에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세밀히 연구하는 것이 현대과학이다. 하물며 아스피린이 있는데도 버드나무 껍질을 다려먹는 것은 과학 전 시대 사람의 생각임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