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차가운 안개 속 어디서인지 모르게 들려오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 강의가 끝난 뒤의 늦은 오후 기숙사 저 너머로 발갛게 물든 하늘빛,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한밤 길가의 노란색 나트륨 등의 빛무리…. 이제는 이야기만으로도 그 모습이 떠올라 너무나 정겹게 느껴지는 교정의 풍경들이다. 복잡한 서울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감이 물밀듯이 가슴에 차오른다. 이제 3년째로 접어드는 대덕에서의 생활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난 무척이나 당연스럽게(실제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KAIST진학에의 길을 선택했던 듯 싶다. 그리고 진학 과정도 남들보다는 무척이나 쉽게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서울과학고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92년도부터 한국과학기술원 학사과정에 특별 전형에 의한 무시험 입학제도가 실시되었던 까닭이다. 특별전형에 응시하여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이 8월이었으니 3년이 걸려야 할 고교생활 1년 반만에 끝나게 된 것이다.
대학 입학은 다음해 3월. 무려 반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인생의 어느 기간인들 두 번 주어지겠는가마는, 이런 시간만큼은 정말 '다시 한 번만 내게 주어진다면'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때에도 내 나름대로는 보람된 시간을 보내겠노라고 굳은 다짐을 했다.
무척이나 때늦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간 읽지 못해 아쉬웠던 고전들을 찾아 읽었으며 , 친구들과 함께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역시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정보처리기능사 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증(사실 아무 필요도 없는)을 따기도 했다. 그리고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
'대학 입시'라는 커다란 중압감이 사라진 상태에서 일종의 공복감 때문에 무척 많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성숙해진(그러나 여전히 부족한)나 자신을 얻게 된 기간이었다. 얼핏 듣기엔 무척이나 많은 것을 얻은 듯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 때 왜 좀더 열심히 생활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를 한다. 이때 마음으로부터 '대학생'이 될 준비를 하지 못했던 까닭에 대덕에서의 내 첫학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에서의 지난 2년간, 내 학교생활에 빠질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동아리 활동이었다. 아마 이것은 대다수의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있어 마찬가지리라. 나는 무시험전형에 합격하고 나서 배우기 시작한 바이올린이 인연이 되어 KAIST Chamber Orchestra에 들어갈 수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까닭에 서투른 솜씨였고 처음에는 합주에 끼는 데에도 무척이나 애를 먹었지만, 동아리 사람들과 서로 친해지면서부터 챔버라는 이름은 내게 다른 그 어떤 단체보다도 친밀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날 놀라게 했던 점은, 음악적인 재능과 열정 또한 전공인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는 것이다. 반드시 음악 분야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정말 다양한 종류의 동아리 활동에 엄청나게 열심인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KAIST가 인격적으로 협소한 사람을 길러낸다"라는 편견을 일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무시험 전형이라든가 동아리 활동이 잘 이루어지는 것 등이 KAIST를 빛내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세계를 향한 대학, 미래를 여는 연구'라는 문구가 단순한 선전용 표어가 아님을 우리 원의 모든 학생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우리에겐 분명, 국내의 그 어느 곳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그 어떤 우수한 대학과도 겨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느껴질 수 있다. 우리에겐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 그 어느 곳보다도 잘 이루어지고 있는 산학체제와 학생들의 연구의욕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제 겨우 학부 3학년의 나이이지만, 나는 KAIST에서 밝은 미래의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