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염색체 꼴찌 부위에 있는 일단의 DNA 무리인 말단소립이 결정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 말단소립은 6천-만개의 염기쌍을 갖고 있지만 매년 소멸돼 짧아지면 세포가 정상적인 분열을 멈추게 된다. 따라서 말단소립의 소멸속도를 감안해보면 대략 최대 수명을 짐작할 수 있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육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돼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직 성적이나 점수를 잘 받아서 1류 대학에 들어가야만 좀 더 나은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점수벌레만을 양산해내기에 이르렀다. 물론 입시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전 분야에 걸쳐서 1등을 하는 사람만이 행세를 하고 나머지 99.99%에 달하는 사람들은 공연히 기가 죽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치유해야 할 병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중요한 열쇠는 첫째가 아닌 꼴찌가 쥐고 있다. '사람은 왜 늙고 죽는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을 꼴찌가 풀어준다는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 천년에 걸쳐서 인류는 삶과 죽음의 원인을 알기 위해 때로는 종교의 힘을 빌고, 때로는 과학문명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미신까지 동원해 보았으나 그 해답을 얻지 못했다.
이런 삶과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해답의 실마리를 모든 사람들이 도달해 보려는 첫째가 아닌 꼴찌의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삶과 죽음뿐 아니라 생김새 성격 식성 심지어는 손 끝의 지문까지 결정짓는 염색체의 꼴찌부위에 위치한, 일단의 DNA무리인 말단소립(telomere, 말단을 뜻하는 그리스어 telos에서 따옴)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은 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게 마련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대장균 등의 세균류는 어떻게 하여 죽는가? 비교적 간단한 생물체에 속하는 세균류는 세대교체에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으므로 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관찰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세균류는 자신의 몸안에 지녔던 일종의 염색체인 플라스미드(plasmid)를 상실하면 죽는다.
생김새 식성 성격 지문까지 결정
반면 사람을 포함한 고등생물들은 세균류와는 다른 종류의 염색체를 지닌다. 그 근본적인 차이는 세균의 경우처럼 둥근 원형의 염색체(circular chromosome)를 지니지 않고, 크게 보았을 때 양쪽 끝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직선형의 염색체(linear chromosome)를 지닌다는 것이다. 또한 고등생물은 각 염색체 끝 부위마다 존재하는 꼴찌 부위인 말단소립을 두 개 이상씩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경우는 모두 몇개의 말단소립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性) 염색체를 포함, 모두 23쌍의 염색체를 지닌다. 즉 46개의 염색체를 소유한다. 염색체는 꼴찌 부위인 말단소립을 각각 두 개씩 지니고 있으므로 모두 92개의 말단소립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모든 말단소립들도 DNA로 이뤄져 있다.
말단소립은 지금부터 25년 쯤 거슬러 올라가, 연못에서 서식하는 원생동물의 일종인 테트라하이메나(Tetrahymena)라는 매우 단순한 생물의 염색체에서 발견됐다. 이 단세포 원생동물은 특이하게도 수 만에서 수 십만개에 이르는 말단소립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많은 염색체를 지니는 고등생물의 경우, 어떤 과정을 거쳐 늙어 죽음에 이르게 될까? 종종 손등에 상처가 나거나 잇몸이 헐어서 살갗이 벗겨져도 곧 새살이 발갛게 올라오면서 쉽게 치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생명현상의 일종으로 새로운 세포가 계속해서 만들어짐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지퍼와 DNA 복제
이러한 조절 메커니즘은 모두가 우리의 염색체 내에서 일어나는 DNA의 복제(DNA replication)를 통해 이뤄진다. 이 DNA복제는 지퍼(zipper)를 열고 닫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하다. 즉 지퍼를 내림으로써 맞물렸던 두개의 지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때 지퍼가 풀어지면서 각기 두 개의 꼭 들어맞게 생긴―상응(complementary)하는―반쪽 지퍼들과 만나게 된다. 반쪽 지퍼에 맞대응하는 또다른 반쪽 지퍼들을 채워줌으로써 새로운 한쌍의 지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DNA의 복제 메커니즘은 맞물렸던 DNA를 풀어서 두 개의 DNA 사슬을 형성한 뒤 이에 맞대응하는 반쪽의 DNA 사슬을 각각 다시 맞춰서 새로운 또 한쌍의 DNA를 얻는 과정이다. 실제로 여기서는 효소와 단백질 등이 관여한다. 이때 DNA 사슬의 한 쪽 끝을 고정시켜 주어야 하는데 이 역할을 염색체의 꼴찌 부분인 말단소립이 수행하고 있다.
말단소립에 해당하는 부위에 RNA라고 하는, DNA와는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것을 붙여서 시발물질(primer)이라고 불리는 부위에 고정시켜, DNA 복제를 완성하는 것이다. DNA 복제가 끝난 뒤, 새로운 DNA에서 RNA가 차지했던 부위는 DNA가 아니므로 잘려져 나간다. 결국 세포분열 때마다 말단소립이 일정 길이만큼씩 같은 이유로 상실돼 짧아지게 된다. 이렇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길이가 짧아지는 부위가 바로 고등 동물 염색체의 꼴찌 부위를 차지하고 있는 말단소립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반드시 거치게 되는 일이 말단소립의 상실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활하는 동안 새로운 세포가 계속 만들어지면서 공급돼야 하는데, 그 와중에 말단소립은 점차적으로 상실돼 짧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1년에 계절이 네 번 바뀜에 따라 나이테가 하나씩 생기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려했던 불꽃이 사그라 들면서, 희미해지는(짧아지는) 불꽃놀이의 폭죽같이 느껴진다. 또한 처음에는 가득 채워졌던 모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줄어드는 모래시계처럼.
생체시계로 기능한다
말단소립은 우리 몸 안에서 생체시계(cellular clock)로 기능하며 있다. 우리 몸의 피부나 피 속의 림프구 및 혈액세포 내에 존재하는 말단소립은 매년 15-40 염기쌍(base pairs)씩 소멸돼 짧아진다. 우리가 태어날 때 말단소립은 6천-1만개의 염기쌍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신체 각 부위의 말단소립 소멸 속도를 감안해 보면, 대략의 최대 수명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제 막 생체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의 정자세포(human sperm cell)는 어느 일반 조직세포나 체(體) 세포들보다 훨씬 긴 말단소립을 소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말단소립이 짧아지면 세포가 정상적인 분열을 멈추고 결국 우리가 늙어 죽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보고는 다음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말단소립이 세포의 피해 감지기능(cell's damage sensing system)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이스트(yeast) 같은 경우, 세포분열을 조절하는 유전자(RAD-9)의 기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둘째 말단소립의 감소가 종양 억제 유전자(p53 tumor suppressor gene)를 활성화해서 DNA가 손상돼 결국 성장을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말단소립이 원래 지니고 있는 길이의 구조는 주변에 위치한 유전자(nearby gene)의 기능을 억제하는데, 그 길이가 짧아지면 이러한 기능이 없어지기 때문에 주변의 다른 유전자들이 발현하게 돼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에 미루어 볼 때 역설적인 가정이 가능해진다. 즉 말단소립의 길이를 원 상태로 유지시켜 주거나, DNA 복제로 인한 손실을 보전해 주면, 생명을 무한히 유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는 무한정 살아가는 암세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말단소립은 반복되는 일정한 염기배열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수십회에 걸쳐서 반복되는 TTAGGG라는 염기배열로 이뤄져 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염색체 DNA 내에 있는 유전정보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반복형의 염기배열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반복되는 염기배열에 대응하는 RNA를 자체 내에 지니고 있으면서 말단소립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효소가 십여년 전에 테트라하이메나(Tetrahymena)라는 원생동물에서 발견됐다. 이 효소는 말단소립(telomere)를 만드는 기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말단소립생성효소(telomerase)라고 불린다.
이 효소는 시발물질(primer)로 기능하며 RNA를 지니고 있는 단백질의 일종(ribonucleoprotein)이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에게서는 이 효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종양세포 특히 여성암의 일종인 난소종양세포(ovarian carcinoma)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됐다. 또한 사람의 여러 암 유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암은 수년간 사망원인의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다. 특히 암은 십대에서 노인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일어나므로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전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말단소립의 연구를 통해 암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수의 꿈, 이뤄질까?
이는 실현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오직 암세포에만 이 말단소립생성효소의 기능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세포에 대해서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고, 암세포의 말단소립생성효소에만 작용하는 억제물질(inhibitor)을 개발해낸다면 선택적으로 암세포만을 선별해서 죽일 수가 있는 것이다. 또 만약 정상적인 세포들에게 이 말단소립생성효소를 공급해 주거나 그 기능을 활성화해 손실되는 말단소립을 계속적으로 공급해 줄 수 있다면 장수의 꿈을 이루게 돼 평균수명이 2백-3백세로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 불멸의 삶이란 동전의 앞면과 뒤면 같다.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만이 현재에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고, 우리는 모두 일정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일들이 염색체의 맨 끝에 위치한, 꼴찌 부위의 처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자연현상(Mother nature)의 속 깊은 공평한 배려(?)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