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세포의 대표주자인 T세포와 암세포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술래인 T세포는 암세포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데, 암세포의 은둔술은 교묘하기만 하다. 여기서 T세포를 돕기 위해 개발된 암백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암은 우리 몸의 세포가 유전적 결함 또는 돌연변이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성장을 계속하거나 분열하는 현상이다. 현재 암은 심장질환 등과 더불어 인류의 최대 질병중의 하나로 꼽힌다.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암의 원인을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며 치료방법도 뚜렷하지 않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3대 암치료법은 1950년대의 수술요법, 1960년대의 방사선요법, 1970대의 화학요법 등이다. 각 치료법마다 제 나름의 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흔히 3대 암치료법을 복합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세가지 치료법을 모두 동원해도 암을 완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면역학적인 방법을 활용해 암을 치료하려는 제4의 시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아직 동물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암의 면역학적 치료법을 암백신(cancer vaccine)이라 부른다. 암 백신은 기존의 바이러스 백신과 유사하게 특정 암에 대한 항암 면역 반응을 유도,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1세기 전부터 시작돼
암백신의 연구사는 1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3년 윌리엄 콜리는 박테리아의 독소를 몸안에 받아들이면 체내의 면역시스템이 활성화돼 결과적으로 암을 퇴치할 수 있다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또 1909년 얼리히는 암세포의 성장을 방해하는 면역시스템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으나 다른 의학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말에 와서야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이 암세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됐다. 이때부터 면역학적 방법으로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여러가지 실험들이 진행됐으나 분자생물학과 면역학 등 배경지식이 부족해 단편적인 실험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몇 특정 암에서 암 특이항원이 발견되면서 암백신이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암 특이항원이 암세포의 MHC(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분자들과 결합하면 대표적인 면역세포인 T세포에 쉽게 발각돼 결과적으로 암세포가 파괴된다. 암세포가 생체 내에서 계속 성장하는 것은 암세포를 찾아내어 파괴할 수 있는 T세포가 없어서가 아니라 암세포가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을 교묘히 피해가는 여러가지 재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생체의 면역시스템에 일단 포착되면 자신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암세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면역시스템에 발각되지 않으려고 암세포들은 여러 위장 방법들을 동원한다. 암세포의 입장에서 보면 '비장한' 생존전략이다.
암세포는 다음 네가지 방법으로 면역시스템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로 T세포가 암세포를 찾아낼 때 흔히 사용하는 분자들(암 특이 항원 등)의 생성을 방해하고 또 이 분자들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함으로써 T세포가 암세포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둘째로 암세포가 면역시스템 전반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이른바 면역억제(immunosuppression)상태를 유도한다. 셋째로 어떤 암세포는 점액성 단백질(mucoprotein, sialomucin)을 자신의 표면에 뒤집어 써 T세포의 가시권에서 벗어난다. 넷째로 이른바 방해 항체(blocking antibody)를 만들어 자신(암세포)에게 붙임으로써 면역시스템의 눈에 띄기 쉬운 염증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T세포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암세포들의 생존비결을 우리는 역이용할 수 있다. 암 특이 항원에 대한 생체의 면역반응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해 T세포가 꼭꼭 숨은 암세포를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면 암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암백신의 이론적 바탕이 되고 있다.
암백신의 장점과 단점
기존의 3대 암 치료법은 수술, 방사선 요법 및 화학 요법으로 한결같이 암세포를 최대한 환자에게서 제거해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수술 및 방사선 요법은 초기 암이나 암세포의 전이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암세포를 완벽히 제거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즉 수술을 통해 암세포 조직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이미 암세포가 신체의 다른 부위로 퍼진 경우에는 수술 후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화학요법(항암제 투여)은 비교적 광범위한 암에 대해 사용할 수 있으나, 고형암(solid tumor)을 치료하는데는 부적합하고 또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환자의 다른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면역학적인 암 치료 방법은 기존의 방법들에 비해서 장점이 많다. 환자 자신의 면역세포들을 이용해 암세포를 공격하므로 수술 등의 방법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다른 부위로 퍼진 미세한 암세포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다. 또한 특정 암세포의 특이항원에 대해서만 면역반응이 일어나므로 환자의 다른 조직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학 및 방사선 요법에 비해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암 특이항원들이 많이 밝혀져 있지 않아서 환자의 암세포 자체를 암 특이 항원의 공급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환자의 암세포를 이용하는 것도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실험 동물의 암세포와는 달리 인간의 암 세포는 실험실에서(in vitro)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면역요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려면 무엇보다 우수한 암 특이 항원이 수월하게 공급돼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의 암백신 연구결과로 볼 때 이미 많이 진행된 암에 대해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궁극적인 암의 치료 방향은 기존의 수술, 방사선 및 화학요법과 병행해 면역학적 방법 즉 암백신을 사용하는 방식이 돼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암 백신 개발은 현재까지 주로 동물 실험 단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좋은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암 백신 개발 방법은 암 세포에 대한 특이 면역반응을 높이기 위해 여러가지 유전자들을 주입, 유전적으로 개조한 암세포(genetically engineered tumor cell)를 만들어 이것을 다시 생체에 투여함으로써 특정 암세포에 대한 암 특이 면역반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암세포 자체를 암 특이항원의 공급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 암세포에는 다음과 같은 유전자들이 첨가되고 있다. 첫째로 면역세포를 활성화하는 유전자(cytokine gene)이다. 이는 T세포와 같은 면역세포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터루킨-2, 인터루킨-4, 인터루킨-7 인터루킨-12, 암괴사인자, 감마 인터페론, GM-CSF(granulocyte macrophage-colony stimulating factor) G-CSF 등이 포함된다. 이 유전자들은 암 세포에 주입한 후 체내에 접종하면 몸 안에서 면역시스템이 활성화 돼 암에 대한 특이 면역반응이 유도된다. 둘째로 MHC 유전자도 유전자조직 암세포에 넣어진다. 즉 암 세포에 환자 자신의 I과 II유형의 MHC 유전자를 주입함으로써 환자의 면역시스템의 암 특이항원이 효과적으로 T세포에 발각되도록 유도할 수 있다.
타인의 I유형 MHC의 경우에는 강력한 외부항원으로 인지돼 암세포에 대한 면역반응을 활성화할 수 있다. 또 특이 암항원을 찾아내는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B7유전자를 암세포에 도입, T세포가 그 암항원을 잘 발견할 수 있도록 해 항암 효과를 얻기도 했다.
암 특이항원을 리포솜에 넣어 생체에 주입한다.
이러한 유전자들을 이용해 임상적으로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 운반체(vector)의 개발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염색체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세포분열이 일어나도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가 운반체로 개발돼 널리 쓰이고 있다. 또 아데노바이러스 허피스바이러스 등 여러 바이러스 운반체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항암 면역반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각각의 암 특이 항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생체의 면역세포에 발각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생체 내에서 전문적으로 항원 제공을 담당하는 APC세포(antigen presenting cell)와 암세포를 융합한, APC-암 융합세포를 암백신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암백신은 생쥐실험에서 항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암 특이항원 유전자가 이미 클로닝(cloning)된 경우에는 기존의 바이러스 백신과 유사하게, 특이항원에 대한 암백신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암 특이항원을 얻을 수 있는 재조합 바이러스(recombinant virus)를 개발, 암백신으로 사용하거나 재조합 바이러스에서 암 특이항원을 순수 분리 정제하여 리포솜(liposome)과 함께 주입하는 방법 등이 쓰이고 있다.
최근 펩티드(peptide) 합성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암 특이 항원 중 면역반응을 효과적으로 일으키는 펩티드의 서열을 결정하고 이것을 인공적으로 합성해 암백신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또한 암 특이 항원을 얻을 수 있는 플라스미드(plasmid)를 직접 근육내 주사하거나 유전자 총(gene gun) 등으로 생체 내에 주입함으로써 암 특이 면역반응을 유도, 항암효과를 노리는 연구들이 진행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암백신에 대한 연구는 면역학 분자생물학 및 바이러스학의 발전에 힘입어 장차 혁신적인 암 치료 방법으로 활용되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