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먹여살리는' 간판 효자산업으로는 단연 메모리 반도체를 꼽는다. 이미 양적으로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제일의 위치를 차지한 반도체 산업.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위험한 외줄을 타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해 9월 초 각 신문에는 구한말 태극기 밑에 '한민족 세계 제패'라는 큰 글씨가 써 있는 광고가 게재돼 눈길을 끌었다. 바로 삼성전자가 일본에 한발 앞서 2백56메가D램을 개발한 것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삼성은 그동안 눌려 지내기만 하던 세계 최고의 반도체 메이커 일본을 무찔렀다는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반도체에 관한 한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였던 한일합방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대내외로 공포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 최고의 산업이다. 지난해 단일품목으로 수출 1백억 달러를 돌파해 '수출 한국'을 견인하는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2백56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기술 한국'의 자존심으로도 떠올랐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의 기술 발전을 드라이브하고 떼돈을 안겨주는 효자산업임에 틀림없다.
한국의 간판 '효자산업' 반도체
사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 우선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0%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그 힘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지난 93년보다도 4.3% 포인트나 넓어진 면적이다. 일본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은 50%를 넘지만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업체는 해가 갈수록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커가고 있다. 올해 말이면 국내 업체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40%에 육박할 것이라는 게 외국 전문기관들의 일치된 전망이다.
이같은 숫자 놀음보다도 한국 반도체의 파워를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은 선진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거의 시혜적 차원에서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했다. 쉬운 말로 해서 정치적 의도 반, 잘난 척 반으로 던져주는 기술을 감지덕지 받아야 했다. 기껏 가져다준다는 기술도 대부분 알맹이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술 없는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 파워는 이같은 현상을 없애버렸다. 바로 선진 업체들이 우리나라 반도체 회사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자고 먼저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삼성은 일본 도시바와 반도체 기술을 교환키로 올해 초 계약했다. LG 반도체는 독일 지멘스와 첨단 반도체를 공동개발키로 했고, 현대전자는 일본 후지쓰와 공동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이같은 현상은 10년 전 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바로 한국 반도체의 기술이 그만큼 성장했고, 선진 업체에서 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반도체가 이같은 위상을 차지하는 데 걸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조립전문업체인 아남산업이 국내에서 처음 반도체를 사업화한 것이 지난 68년이니, 대략 27년이 지난 셈이다. 그러나 아남은 반도체 제조공정중 후공정(조립, 테스트)만을 했기 때문에 반도체를 생산했다기 보다는 조립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회로를 설계하고 칩을 만들어내는 일관공정체제가 갖춰진 것은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지난 83년부터. 따라서 반도체 설계 가공 조립 테스트를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는, 일관공정체제가 처음 갖춰진 때인 지난 83년을 한국 반도체 산업의 태동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도체가 단 12년만에 소위 '한국의 캐시카우'(cash cow, 떼돈을 벌어준다는 뜻)로 불리며 간판사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어떤 배경에서일까.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운이 좋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반도체에 투자한 오너들의 과감한 추진력과 엔지니어들의 각고의 노력이 숨어 있음을 읽어야 한다. 소위 '한국형 모델'이라 불리는 물불을 안가리는 저돌성, 그리고 선진국의 견제를 몸으로 때우며 이겨낸 독기가 오늘의 한국 반도체 산업을 있게 했다.
한국 반도체의 대표주자인 메모리 반도체는 미국 인텔사가 포기한 제품이다. 인텔은 지난 80년대 중반 세계 전자시장에 몰아친 불황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그만두었다.
사실 메모리 반도체는 엄청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장치산업이며 그만큼 사업하기도 힘들다. 16메가D램 공장을 하나 차리는데 드는 비용이 대략 8천억원 정도. 이처럼 많은 돈을 들이지만 여기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5년에 불과하다. 16메가D램은 다음 세대인 64메가D램에게 시장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도체업계는 다시 64메가D램 공장을 지어야 하고 이 경우에는 약 1조2천억원의 돈이 든다. 거둬들인 돈을 다음 공장 짓는데 쏟아부어야 한다는 얘기다.
더구나 반도체 시장이 불황에 빠질 경우 막대한 투자액은 회수할 길이 없다. 이것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특징이다. 미국이나 일본 업체들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 강화를 주저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처럼 많은 리스크를 가진 분야에서 성공했다. 이것도 일본과 미국이 덤핑시비와 특허시비로 뒷다리를 잡는 심한 견제를 이겨내면서.
비메모리 분야는 손도 못대는 반도체 1등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과연 어떻게 이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와 비메모리 제품으로 나뉜다. 16메가D램 등으로 불리는 제품들이 메모리 반도체이고, 486칩 등이 비메모리 반도체의 대표적 제품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반도체중 가장 단순한 제품이며 만들기도 쉽다. 대신 이것은 대량 생산해 대량 소비되는 제품이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는 특수용도로 사용되는 고부가가가치 제품으로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기술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쉽게 많이 만들어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갖고 있는 한계는 바로 이같은 메모리 일변도의 사업구조다. 다시 말해 반쪽 1등이란 뜻이다. 메모리는 세계 1위, 비메모리는 전무(全無)라는 기형적 구조가 한국 반도체 산업의 딜레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메모리 생산업체인 삼성전자의 메모리 대 비메모리 사업구조의 비율은 8대 2쯤 된다. 현대전자나 LG반도체는 9대 1정도. 반면 일본 업체들은 6대 4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일본은 비메모리 분야가 강하다.
비메모리는 특수용 반도체로,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ASIC(주문형 반도체)이 대표적 상품이다. 그래서 대량 생산은 안하지만, 가격이 매우 높다. 국내에서는 설계 인력이 없어서 ASIC 등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한다.
반도체의 생명은 설계에 달렸다. 돌덩어리인 실리콘에 특별한 기능을 부과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설계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런 '반도체 조물주'가 없다. 그래서 ASIC보다는 단순 메모리 분야에 치우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또다른 맹점은 장비와 소재의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사실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어 이 분야의 종속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반도체용 에폭시 수지 생산업체인 일본 스미토모화학에서 지난 93년 7월 발생한 폭발사건은 한국 반도체 산업 실상을 잘 보여준 예로 꼽을 만하다. 에폭시수지는 반도체 생산의 제일 마지막 공정에 들어가는 포장용지(EMC)를 만드는 원료로, 국내업체들은 대부분 이 회사의 제품을 들여와 썼다.
이 회사 공장의 폭발로 포장용지의 공급선이 끊어지자 한국 반도체 업계는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다행히 사고 복구가 빨라 생산중단이라는 위기는 면했다. 에폭시 수지는 반도체 제조 원가의 1%에도 못미친다. 그런데도 국내 업계는 이것 하나 때문에 목줄이 죄였던 것이다.
장비의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작년 국내 반도체 장비시장에서 국산품 점유율은 단 8%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반도체 생산라인 하나에 들어가는 장비구입액은 6천4백억원(16메가D램 웨어퍼 월 2만매 가옥수준) 정도다. 그러니까 국내업계는 라인 하나를 건설하면서 5천9백원 어치의 장비를 해외에서 구입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전체로는 1조3천9백억원이라는 돈이 외국 반도체 장비 생산업체에 지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장비의 낮은 국산화율만이 문제는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첨단 장비를 만들 능력이 도통 없다는 것이다 지난 93년 국내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국산 장비가 차지한 비중은 13%, 작년에는 8%로 줄어들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작년에 새로 지은 반도체 공장이 16메가D램 공장이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세대가 높아질수록 첨단 장비를 필요로 하는데, '첨단'자(字)가 붙은 장비를 만들 능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국산 장비의 비중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비와 원재료의 높은 대외의존도는 반도체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바로 비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개발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장비와 재료기술, 반도체 생산기술은 서로를 지탱하는 사다리와 같다(김치락 반도체 산업협회 부회장)." 그런데 국내 업체는 장비와 재료 기술이 없으니 그야말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외부의 적이 공격해오기 쉽다. 반도체 제조 장비를 이용해 한국 업체를 견제한다는 '장비무기론'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반도체 제조장비를 생산하지 못하니까 이 장비들의 공급시기와 양을 조절해 한국업체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 "아직은 고의적으로 납기를 늦추는 장난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시급히 국내 인력 키워야
이런 저런 정황을 놓고 보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 상황이 매우 불안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만 욱일 승천의 기세를 보일 뿐, 나머지 분야에서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높이 올라갈수록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국내업체들도 최근 이같은 심각한 상황을 인식해 장비국산화 등 반도체 인프라 구축과 비메모리 강화를 통한 포트폴리오 체제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장비 국산화에 대한 의지는 최근 국내 업체들이 일본 기업들과 손잡고 합작 회사를 세우는 데서 읽을 수 있다. 90년대 초만 해도 안중에 없었던 반도체 장비 제조 회사가 최근 9개나 생겼다.
비메모리 분야도 적극적인 기업인수 및 합병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강화하고 있다. 현대 전자는 지난해 말 미국 비메모리 반도체 전문생산업체인 AT&T-GIS사를 3억4천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 회사의 기술과 생산설비 인력 등을 그대로 사들임으로써 메모리 대 비메모리의 사업구조를 9대 1에서 당장 7대 3정도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도시바와 메모리 반도체 기술과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상호 교환키로 하는 등 기술 교류에 적극 나서고 있다. LG반도체 역시 비메모리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독일 지멘스 등과 최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외부 수혈로만 비메모리 사업이 본격화될 수는 없다. 이를 소화해낼 국내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국내 설계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몸부림이 큰 효과를 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반쪽 1등이 아닌 진정한 1등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산적한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만 한다. 덩치만 크고 머리는 빈 상태인 한국 반도체 산업이 진정한 효자 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