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도감을 만들고 화약과 총포 10여종을 개발한 바 있는 고려시대의 과학기술자 최무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제작한 총포의 구조와 크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간접적인 기록을 통해서 그 내용을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문화체육부에서는 95년 과학의 달을 맞아 올해의 과학인물로 고려시대 화약과 화약무기의 개발에 앞장섰던 최무선을 선정했다. 화약은 물론 고대로켓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주화를 개발한 최무선의 업적을 요약해 싣는다.
최무선은 고려말의 과학기술자로 충숙왕 12년(1325) 관리들의 봉급을 관리하던 곳의 관리였던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과학분야에 많은 관심과 재주를 갖고 있던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는 화약과 화약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격증하기 시작하면서 왜구를 격퇴시키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화약병기와 화약을 수입하여, 공민왕 5년(1356) 9월에는 총통을 남강에서 처음 발사시험 했다. 16년 뒤인 공민왕 21년(1372) 10월에는 화전을 발사시험 했으며, 1년뒤인 공민왕 22년(1373) 10월에는 전함을 건조하고 여기서 화전과 총통의 발사시험이 실시되었다.
최무선은 1370년대 중반쯤부터 화약의 국산화를 생각한 것으로 추측된다. 몇년 동안의 건의를 통하여 1377년에 화통도감이 설립되었는데, 최무선이 화통도감의 설립을 건의할 때는 이미 화약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화약을 처음 만든 시기는 화통도감 설립연도인 1377년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든 후 이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하여 비교적 구조가 간단한 화전 등의 화약무기를 실험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화통도감이 설치되기 4-5년전인 1372년 10월과 1373년 10월, 화전의 발사 실험이 실시된 기록이 '고려사'에 보이는 점 등을 종합 해 볼 때 최무선이 국내에서 화약을 처음 제조한 시기는 화통도감이 설립된 1377년보다 몇 년 전인 1372년 전후로 보여진다.
염초 제조가 핵심
옛날에 사용한 화약을 보통 흑색화약이라고 부른다. 화약의 색깔이 검은 색이기 때문이다. 화약의 재료는 염초와 유황, 그리고 숯을 사용한다. 이중 유황과 숯은 자연 재료를 사용하고 염초는 길위나 담밑에 있는 빛이 검고 맛이 매운 흙에 쑥재와 곡식대재를 섞어 물을 넣고 끓여 만드는데, 만드는 방법에 따라 성능에 차이가 있다. 화약의 제조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염초의 제조이다. 최무선이 처음화약의 제조법을 알아낼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도 바로 염초의 제조방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고려에서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의 재료를 수입하여 이를 혼합하여 화약을 만들어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혼합하여 사용할 줄은 알았지만 재료, 즉 염초 만드는 기술은 아직 확보되지 않은 듯싶다. 염초 이외의 재료인 숯은 보통 버드나무 숯인 유회를, 유황은 국내산인 석유황을 사용하는데 염초는 여러 공정을 거쳐 제조해야 하기 때문에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최무선이 화약의 제법을 배운 중국의 이원이 염초의 제법을 알고 있는 염초기술자라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최무선이 제작한 화약무기 중에 총포와 관련된 무기는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육화석포 신포 화포 총통 화통 철령전 피령전 철탄자 등이 있는데,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은 각종 총통과 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의 약자이다. 이중 대장군포가 제일 크고, 다음이 이장군, 삼장군의 순서. 육화석포는 석환을 발사하는 완구이고, 신포는 신호하는데 사용한 포, 그리고 화포 총통 화통 등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기타 총의 종류로 보인다.
철령전 피령전 철탄자는 포와 총통에서 발사한 발사물로 생각되는데 철령전은 철로 만든 날개를 화살의 중간에, 그리고 피령전은 가죽으로 날개를 만들어 화살의 중간 부분에 부착한 화살이다. 일반적으로 피령전보다는 철령전의 크기가 크다. 대장군포와 이장군포에서는 철령전을, 삼장군포에서는 피령전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탄자는 철로 만든 포환의 일종으로 보인다.
최무선이 제작한 총포의 크기 및 구조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유럽과 중국의 총포를 살펴봄으로써 최무선이 만든 총포의 구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유럽과 중국의 총통구조
유럽의 총통 중에서 내부 구조가 알려진 총통은 스웨덴의 로슐트(Loshult)에서 1861년 발굴되었다. 14세기에 사용됐을 것으로 믿어지는 길이 3백10㎜, 총구 36㎜의 소총통이다. 청동으로 제조된 이 총통의 내부 구조는 총구에서 속으로 들어 갈수록 내경이 좁아지다가 화약을 폭발시키는 약통에서 다시 넓어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약통에는 점화선을 끼우는 구멍이 하나 있다. 이러한 내부 구조를 가진 총포들이 14세기 경 유럽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총들은 발사물로써 화살을 사용했는데, 화살의 중간 부분에 쇠나 가죽으로 만든 날개가 부착되어 있음이 1326년 출판된 책의 발사 광경을 그린 그림에 잘 표현되고 있다.
소총통 발사 광경은 소총통의 약통에 화약을 채우고 화살의 날개 뒷부분을 총구를 통하여 총에 삽입한 뒤 점화선에 불을 붙이면 점화선이 타들어가 약통속의 화약에 불을 붙여 폭발시킨다. 그 폭발력에 의해 총구에 삽입된 화살이 앞으로 발사되어 나가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국의 소총통 중 현재까지 내부 구조가 발표된 가장 빠른 총통은 원나라의 지정 11년(1351) 청동으로 제조된 소총통이다. 길이는 4백35㎜, 총구30㎜, 무게 4.75㎏인 지정 11년 소총통의 내부 구조는 화살을 삽입하는 부리부, 화약을 채우는 약통부, 손잡이 나무를 끼우는 모병부로 구성되어 있다. 스웨덴의 로슐트 소총통과 같이 부리부는 총구에서 약통 쪽으로 들어가면서 점차로 좁아지다가 약통 부분에서 넓어지는 형태로 되어 있다. 겉 모양은 부리부의 입구에 마디가 하나 있고 중간에 두개가 있으며, 약통의 앞 뒤에 각각 한개씩 있다.
총통에 음각된 글씨의 내용은 앞 부분에 "발사하면서 온갖 갑옷을 뚫으며, 소리는 온 하늘을 움직인다"라고 새겨졌고, 가운데 부분에 '신비'라고 새겼으며, 모병부에 '지정신묘' '천산'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러한 중국 초기의 소총통은 뒷부분인 모병부에 나무 자루를 끼워 양손으로 나무 자루를 쥐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경희 소총통, 독자적인 것으로 추정
현존하는 한국의 고총통 중에서 고려말이나 조선의 세종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총통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인 2개의 청동제 소총통이다.
이 소총통은 청동으로 제조되었으며, 전체 길이 2백37-2백40㎜, 부리부의 입구지름 16㎜이다. 내부 구조는 크게 부리부 약통부 모병부로 이루어져 있고, 부리부는 입구에서 속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다가 약통 부분에서 크게 확장되는 14세기 시대의 전형적인 형태로 되어 있다. 겉 모양은 부리부분의 입구와 중간에 마디가 하나씩 있으며, 약통의 앞뒤에 각각 쌍마디가 하나씩 있다. 제작 연대나 제작자를 확인할 수 있는 글씨는 총통의 표면에 청록이 많이 덮여 있어 확인하기 힘들다.
경희 소총통은 스웨덴의 로슐트 소총통 및 중국의 14세기 총통과 내부 구조가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세종 말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독자적인 총통의 내부 구조, 즉 부리부 격목부 약통부 모병부로 구성된 격목형 총통과는 다르다. 따라서 경희소총통이 중국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외형이 중국의 초기 총통과 비슷하게 마디는 있지만, 중국 초기 소총통의 크기가 3백10-4백40㎜로 경희 소총통보다 70㎜ 이상 큰 점을 고려해 볼 때,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제작됐거나 세종 말엽 전에 제작된 한국 최고 총통으로 추정된다.
최무선이 개발한 질려포는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보이는 질려포통을 말하는 것으로 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나무로 구형의 통을 만들고, 이 속에 쑥잎, 화약, 끝이 날카로운 철조각 등을 넣어 적에게 던져서 폭발시키는 폭탄의 일종일 것으로 추측된다. 일종의 나무 폭탄인 셈이다.
한국 최초의 로켓, 주화
최무선은 '달리는 불'이라는 뜻을 가진 한국 최초의 로켓인 주화도 만들었다. 주화는 화살의 앞 부분에 종이를 말아서 만든 종이통에 화약을 쟁이고 점화선으로 불을 붙여 주면 종이통 속의 화약이 타면서 연소가스를 뒤로 분출해 그 힘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주화는 세종 때 금촉주화→세주화→금촉소주화→소·중·대주화를 거쳐 소·중·대신 기전으로 그 명칭이 바뀐다. 이와같은 과정을 볼 때 고려 말의 주화는 후에 소주화를 걸쳐 소신기전으로 그 이름이 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최무선의 주화는 소신기전과 같은 규모로 추측된다.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보이는 소신 기전의 규모는 길이 1백㎝의 대나무 화살의 앞 부분에 쇠촉이 달려 있고 그 아래 지름 2㎝, 길이 15㎝의 종이 약통을 매달고 그속에 화약을 넣었으며, 아래 끝에는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 달았다. 종이 약통의 아래에 뚫려있는 분사 구멍의 크기는 4㎜이며, 사정거리는 1백-1백50m 내외이다.
신기전 중에는 길이가 5.5m이며 2㎞ 정도를 비행할 수 있는, 초대형 로켓인 대신기전도 있다.
화약을 이용하여 제작한 화전으로 믿어지는 기록중 가장 빠른 것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공민왕 21년(1372) 10월 기록과 다음해 인 공민왕 22년(1373) 10월의 화전발사시험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는 고려의 화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설명도 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시 화전의 구조나 성능 및 크기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관계 기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의 화전은 화살의 앞촉에 점화선이 연결된 화약을 뭉쳐달고, 여기에 점화선을 연결한 것. 발사할 때 활이나 노 등으로 화약의 점화선에 불을 붙이고 화전이 목표물에 도착하면 화약이 폭발하는 단순한 화기로 보여진다.
고려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화전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사용된다. 조선초기의 화전에 대한 설명은 1474년 편찬되어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화기서인 '국조오례서례' 4권의 병기도설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화전은 대나무를 사용하였는데, 그 길이는 2척4촌2분(7백56㎜)이며, 지름은 10.9㎜이다. 화살촉의 무게는 4전이며, 화살촉대의 길이는 4촌9분(1백53㎜), 지름은 5.3㎜, 촉끝날의 길이는 6분(20㎜), 넓이는 4분7리(14.7㎜), 촉뿌리의 길이는 1촌5분(47㎜)이다. 화살대의 아래 부분에는 날개가 있는데, 새의 깃을 양끝이 뾰족하게 해 사용하였으며, 깃의 폭은 5분(15.6㎜)이며, 길이는 6촌2분(1백94㎜)이다. 화약포는 양끝이 뾰족하며, 둘레가 3촌(최대지름은 32㎜), 길이가 3촌7분(1백16㎜)이다. 화약은 화살촉대 아래 2/3되는 곳에 부착시키고, 그 위를 종이와 포로 싸고 실로 감아 묶은 후 황밀과 송지를 녹여서 입힌다. 약선은 구멍을 뚫어 설치하고 활로 발사한다."
최무선에 의해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화약병기 중 그 규모와 구조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우리나라 화약병기의 토대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화전과 주화는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보이는 화전과 소신 기전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총통중에서는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중인 경희 소총통만이 당시의 내부 구조를 하고 있는 유일한 총통이다. 내부 구조나 외형으로 볼때 경희 소총통은 최무선이 제조한 '삼장군포'나 세종 5년(1423)까지 사용되고 있던 '당소화통', 그 이후에 사용된 '소화통'으로 추정된다. 최무선이 화약과 화약무기의 개발을 통하여 국가에 이바지한 점은 그 어느 누구의 공적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것이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도 우주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1995년에 한국 최초의 로켓인 주화를 개발한 최무선이 올해의 과학자로 선정되어 그의 업적을 되돌아 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