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이 자연현상에 대한 진리탐구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 비해, 기술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다. 기초과학의 성과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사례들도 많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으로써 기초과학을 크게 진흥시켜야 한다는 점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기초과학의 발전이 과연 과학기술의 진보에 필수불가결하게 전제되어야 할 요소인가 하는 점은 깊게 음미해야 할 명제다.
오늘날 원자력 레이더 트랜지스터 컴퓨터 유전공학 등은 기초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을 토대로 하여 발전하여 온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어,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기초과학상의 연구성과 그 자체가 산업의 발전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쾌적하고 안락한 국민의 삶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또다른 필수적인 측면인 기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간과하는 셈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예들 중에서도 기초과학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기술측으로부터의 충분한 뒷받침이 없이 그러한 성과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초과학상의 성과와 무관하게 기술 그 자체만의 발전을 통하여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사례들을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접하곤 한다. 결국 논의의 초점은 기초과학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보다 균형된 시각에서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이 다함께 반영된 보다 넓은 의미로서의 과학기술을 다루는 한편, 과학기술의 사회·경제적 측면이 고려된 '기술혁신'의 시각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고찰하고자 한다.
지적 호기심과 실용성
자연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와 근본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고, 사람이 만든 인공물(artifact)에 대한 이해와 효과적인 디자인 및 그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이 기술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과학은 실용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지적 호기심의 영역이며, 기술은 기계나 도구를 만드는 등 실용적인 목적에 활용하기 위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과학과 기술은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특히 기술은 과학으로부터 독립적이며 독자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가. 이런 점을 밝히는 것은 과학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과학과 기술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의 하나는 과학과 기술간의 선형모형(linear model)을 상정하는 것이다. 즉 과학기술활동은 기초연구→응용연구→개발연구→설계·엔지니어링→생산· 제작→시장화라는 일련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 과학적 발견(기초연구)은 기술(응용연구 이후의 단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기 때문에, 과학이 기술발전의 중요한 전제사항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과학에 기반을 둔 기술(science-based technology)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전기기술은 전자기이론의 응용, 디젤엔진은 열역학의 응용, 반도체는 고체물리학의 응용, 유전공학은 현대생물학의 응용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전공학이나 정밀화학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험실에서의 연구결과가 곧바로 상품화로 연결되기 때문에 과학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기술은 과학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발전하는 독자성(autonomy)을 갖고 있다는 견해 역시 매우 설득력이 있다. 기술은 인류의 문명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원시시대에는 기술은 있었으나 과학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근대과학이 등장한 시기는 16,17세기로서, 그 이전에 발명된 수많은 기계와 도구, 그리고 건축물들은 과학적 지식과 긴밀하게 접합되지 않은 가운데 장인(craftsman)들의 경험적 지식에 크게 의존하여 탄생했다는 것이다.
즉 역사상 기술의 발전은 교육을 받지 않은 장인들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체역학의 지식이 없이도 사람들은 경험에 의해 배를 만드는 기술들을 가졌으며, 또 열역학에 대한 지식이 없이 증기기관이 발명됐다. 오히려 역으로 증기기관의 발명은 열역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과학적 지식이 기술에 직접적으로 응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그때까지 기술이 발전되었던 영국이 아니라 당시 기술상의 후발국이었던 독일과 미국에서 일어났다. 독일의 화학염료공업과 미국의 전기공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는 기술상의 후발주자로서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방안으로 기술교육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과학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기술을 단기간 내에 개발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이들 화학염료공업이나 전기공업 등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 분야로서, 이들을 발전시키기 위하여는 새로운 과학 분야인 유기화학이나 전자기학의 지식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기술과 과학의 접목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대학교수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기업연구소를 설립하고 여기에 과학자들을 고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과 과학의 결합이 더욱 촉진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업이 대학의 연구활동을 계속 지원해옴으로써, 과학과 기술간의 연계는 심화됐다.
독자적인 역동성
그러면 현대와 같이 과학과 기술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속에서도 기술은 과학과 구분될 수 있는 독자성을 갖느냐 하는 점에 관심이 모아진다. 즉 기술이 과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갖고 있으며, 또 기술이 과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역동성(dynamics)을 갖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현대의 공학(engineering science)에서 볼 수 있는 지식체계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과학이 자연현상에 대한 진리 탐구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 비하여, 기술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간에 차이가 있다. 또 초기의 안테나 이론처럼 과학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과학이론을 기술에 직접 적용할 수 없거나 기존의 과학 이론을 적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경우에는 과학과는 다른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나아가 고온 초전도체 재료와 같이 기술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과학이론으로는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기술은 경험이나 노하우 등 이론화 하기가 어려운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의 영역이 많다. 또 기술은 수많은 아주 작은 점진적 개량(incremental improvements)을 통하여 발전하며, 경험과 실행을 통하여 이론체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결국 기술은 실용성 있는 인공물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한 최적의 조건이나 최대의 효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과학이론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기술은 스스로 발전해가는 역동성이 있음도 중요한 현상이다. 에디슨이 만들어낸 전구 축음기 등이나 오늘날 다양하게 쓰이는 지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술은 과학과 관계없이 스스로 탄생하고 발전한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기술 자체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예는 기술의 융합화 현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전자기술과 기계기술이 결합하여 메카트로닉스 기술이 탄생하고, 전자기술과 광기술이 합쳐져 옵트로닉스가 되며, 전자기술과 생명공학이 접목되어 바이오일렉트로닉스 기술이 생성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기술 자신이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상호작용
그러나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먼저냐 혹은 기술이 먼저냐 하는 것이 아니며, 기술이 과학과 차별되는 독자성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도 아니다. 현대의 과학기술에서 가장 본질적이고도 의미있는 사항은 과학과 기술이 어떠한 모습으로 결합돼 있느냐 하는 점이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은 과학과 기술간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이 중요 한 특징이다. 이 경우 물론 과학과 기술간의 관계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것이며, 과학은 고상한 것이고 기술은 하찮은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과학지식과 기술지식이 서로 동등한 수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현대의 과학기술이다.
실제로 기초과학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알려진 20세기의 주요한 기술발전의 사례들을 보면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처음부터 함께 참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과학과 기술은 서로가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접점(interfaces)들을 만들면서 발전해왔다는 것이 현대 과학기술의 요체이다. 따라서 현대의 기술이 모두 과학의 응용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현대 기술은 과학과 무관한 독자적인 영역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과 기술간의 상호작용은 분야별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기계공학의 경우 과학으로부터 기술에의 기여는 비교적 적은 반면에, 전자공학·화학·핵공학 등에서는 기술의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한편 이러한 과학과 기술이 상호 도움을 주는 모습은 여러가지이다. 먼저 과학이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식을 보면, 과학으로부터 얻게 된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을 탐색하거나 기술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데에 직접적인 요소로 작용하며, 또 과학적 지식은 기술에서의 핵심사항인 엔지니어링의 디자인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기법을 제공하거나 이러한 디자인상의 가능한 대안들을 평가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과학에서 개발된 사용한 실험기기나 분석기법 등이 생산현장의 공정기술 및 공정관리 기술로 활용되기도 한다.
반면에 기술이 과학에 기여하는 방식을 보면, 기술의 개발과정에서 야기된 미해결된 문제들이 새로운 과학적 도전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또한 기술활동에서 개발된 기구와 측정기법들은 종전까지는 불가능했던 과학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 광학망원경의 도움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며, 전자현미경의 도움없이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컴퓨터의 도움이 없다면 모든 분야의 과학 연구가 그만큼 정체될 것이 명백하다.
이상에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 및 양자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조건들을 검토할 때 과학기술 현상 그 자체만을 다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설적으로 과학기술 현상과 연계돼 있는 비과학기술적 요소들을 함께 다룰 때, 과학기술은 가장 균형되고 포괄적인 모습이 된다. 이는 결국 과학기술을 '기술혁신'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기술혁신이라 함은 과학기술을 상업화 실용화 측면까지 연결시킨 개념이다.
과학기술의 상업화, 기술혁신
기술혁신에서 중요한 사항의 하나는 과학적 발견으로부터 실용화가 이루어지는 시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상의 격차(time lag)가 있다는 점이다. 과학적 발견이 상업화로 연결되기까지에는 많은 시행착오와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과학적 아이디어를 좀 더 가시화하기 위한 응용연구는 물론이고, 제품개발 연구, 설계 및 엔지니어링 그리고 제품생산을 위한 공정기술 등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상업화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항공기의 경우 과학적 발견으로부터 최초의 실용화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33년이 소요되었고, 트랜지스터의 경우 9년이 경과하였다. 물론 최근에는 과학과 기술들이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시간상의 격차는 크게 단축되고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항은 기술혁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에는 비과학적인 요인들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점이다. 시장수요의 크기, 소비자의 기호, 제품의 가격 등 경제적 요인들과 교육제도 의식구조 등 사회적 요인들이 기술혁신을 촉진시키거나 지연시키는데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울러 정부의 과학기술정책과 각종 경제·사회정책도 기술혁신의 속도와 방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학기술을 뛰어넘는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성 역시 민감한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은 국민의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어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매우 높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환경오염문제 안전성문제 실업문제 등 부정적 측면이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한다면, 그러한 발전은 사회로부터 그 만큼의 저항을 받게 된다.
이외에도 기술혁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많다. 과학기술의 수준 및 발전단계가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 중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과 국내의 자체 개발 활동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 등 기술 혁신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검토되어야 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제들이 많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과학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기술이 더 중요하냐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과학과 기술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작용을 통하여 오늘날의 과학기술을 형성·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매우 많은 요소들과 과정이 엉키고 설키면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을 균형되고 체계적으로 다루는 시스템적인 접근법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즉 과학기술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인 기술혁신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의 발전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경제·사회적 요소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이들간에 호혜적인 결합(coupling)이 가능할 때, 과학기술이 보다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기술을 기술혁신의 시각에서 다룬다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독자성을 낮추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 역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