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과학이 오늘의 기술이며, 과학과 기술이 같이 숨쉬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는 점이 바로 현대과학기술의 특징이다. 특히 기초과학은 산업의 건강을 유지하는 우리가 먹는 밥과 같은 것이다.
지난 3월에 광주과학기술원이 문을 열었다. 개원식의 기념행사로서 타운스(C.H. Towns)박사와 휴이시(A. Hewish)박사의 기념강연을 가졌는데 타운스 교수는 '레이저'로서 휴이시 박사는 '펄서'의 발견으로서 각각 1964년과 1974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중에서 타운스박사는 필자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30여년 전 필자가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여름에 그 분의 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에 갓들어간 처지라 별로 아는 것도 없기에 내가 맡은 업무라고는 타운스 박사가 만든 메이저(Microwave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 : MASER는 레이저의 전신에 해당)장치를 깨끗이 닦고 진공에 결함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간단한 노동(?)이 전부였다. 타운스박사는 강하고 결이 맞는 마이크로파를 발생시켜서 미세한 물질의 구조를 알아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콜럼비아대학 물리학과가 자리잡고 있는 퓨핀의 9층에 있었던 그 세계 최초의 메이저는 지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지나간 역사로서 전시되고 있다.
불과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첨단 기초과학이었던 레이저는 밤무대의 화려한 분위기 조성으로부터 깨끗한 소리를 들려주는 레이저디스크, 수술을 하는 수단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기술이 되었다. 이렇게 현대과학기술의 특징은 어제의 과학이 오늘의 기술이며 과학과 기술이 같이 숨쉬고 있는 경우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다.
어제의 과학이 오늘의 기술
1백년 전 X-선이 발견되어 의학에 응용될 때까지 걸렸던 세월과 비교할 때 응용기술이 되는 시간은 지극히 단축되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 어렵다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고 어디서부터 투자를 해야하는지가 개념적으로 분명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초과학과 엔지니어링은 같은 생각을 하는 분야는 결코 아니다.
다시 레이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정부가 많은 연구비를 엔지니어에게 주면서 달나라까지 도달할 수 있는 강한 빛을 발생하는 장치를 개발하라고 주문했다고 하자. 아마 전통적인 엔지니어나 응용과학의 생각은 강한 전원(電源)을 개발하여, 예를 들면 더 큰 축전지를 개발해 강한 빛을 발생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초과학이 찾아낸 레이저의 경우는 이와 사뭇 다른 생각에서 출발한다. 양자론이란 자연의 기본적인 원리가 시사하는 바에 따라서 원자의 준불안정상태(population inversion)를 실현하고 이를 외부에서 자극함으로써 지극히 강한 빛을 만들어낸다. 이는 결이 맞는 빛이기에 보통 전지와 같은 광원과는 달리 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달나라까지 능히 갈 수 있다. 이렇게 기초과학은 엔지니어링이나 응용과학이 생각할 수 없는, 원리적으로 새로운 발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없는 이런 빛은 엔지니어링 또는 응용과학으로서는 1백만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일인 것이다.
기초과학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를 두 가지만 더 들어보자.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터키의 대포가 한 때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그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1799년 터키는 당시 살림 3세 수장(Sultan Salim Ⅲ)이 국가수반이었다. 그는 대포 만드는 기술을 프랑스와 스웨덴으로부터 도입하여 이를 국가주도산업으로 발전 육성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나 살림 3세는 현재 우리나라의 일부 여론처럼 경제성에만 눈이 어두워져서 눈앞에 있는 기술의 산업화에만 매달려 기초과학을 등한시했다. 대포를 만드는 엔지니어링 기술에만 집착했을 뿐 대포의 재료를 개량하는 기초과학인 금속학(metalogy)에는 투자를 하지 않았기에 후속 수단이 없어지고 경쟁력을 잃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터키는 양탄자 수출이나 하지 대포를 수출하는 나라로 발전하지 못했다.
기초과학은 이렇게 산업의 건강을 유지하는, 우리가 먹는 밥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비록 화려한 요리도 아니고 조제된 영양제도 아니지만 우리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기본인 것이다. 아무리 의욕적인 경제활동도 건강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아프면 모든 활동이 중지되듯이 기초과학이 약한 나라는 아무리 경제성 있는 응용과학이나 엔지니어링이 일시적으로 반짝하더라도 결코 지속적일 수 없다. 사실상 기초과학이 허약한 나라에서 하이테크(High-Tech)산업이 발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전기를 무엇에 쓰나요?
기초과학에서는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오는지 판가름되지 않는다. 그렇게 판가름할 방법과 이유도 없다. 엔지니어링이나 기술에서는 국가산업과 정책에 발맞추는 우선 분야가 있을 수 있으나 기초과학은 그렇지 않다. 18세기 중엽에 영국과학자 패러데이(Faraday)는 자기장(磁氣場)속에서 움직이는 회로에 전류가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 당시의 사회는 전기의 방대한 응용을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 수상은 패러데이에게 "당신의 과학적인 업적은 좋아보이지만 도대체 전기라는 것을 무엇에 쓸 것이오"라고 물었다고 한다. 패러데이는 수상에게 답하기를 "갓난 아기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라고만 대답했다. 당시 시원치않게 생각했던 전기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20세기는 전기문명의 시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과학이란 경제논리와는 무관하게 생기지만 경제논리의 계산 아래 추진되는 어느 기술보다 인류 전체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온다. 인류 전체에게 거창한 이익을 가져 온 큰 과학이 아니라도 작게는 그 회사에, 또 크게는 그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예는 많다. 아마 우리들 누구나 포스트잇(Post-it)이라고 불리는 노란 종이쪽지를 쓰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생각이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게 메모하여 책상이나 공책 등에 붙여두었다가 쓰고나면 쉽게 떼버리는 포스트잇은 미국의 쓰리엠(3M) 회사에서 처음 만든 것이다.
쓰리엠 회사는 상당수의 젊은 과학자를 고용하여 특별한 프로젝트나 보고의 의무도 없이 그들이 생각하는 연구를 추구하도록 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2년동안 별 성과없이 연구를 하다가 딱 붙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안 붙지도 않는 풀을 합성하였고 이 풀이 '포스트잇'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 젊은이는 경제성이나 계산된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고 알고 싶은 일을 한 것뿐이지만 그 결과는 쓰리엠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 었다. 이렇듯 기초과학은 경제성을 지향하는 뚜렷한 목적 없이 호기심에 이끌려서 연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무엇 때문에 국민의 혈세를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하는가?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는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사치성 낭비라고도 극언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기초과학은 인류문화의 초석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는 갈릴레이의 독백이 말하듯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종교에만 얽매어 있던 인류의 사고방식에 개혁을 가져왔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들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기초과학은 많은 인재들을 길러내는 인력 양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영어와 영문학, 국어와 국문학을 배워야만 교양인이 되듯 국민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도 교양으로 꼭 배워야만 이 사회에서 올바른 생각을 하는 인재가 된다.
경제논리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엔지니어링과는 달리 기초과학은 훨씬 소프트웨어적인 면이 강하다. 그러나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능가하는 이 시대에서는 기초과학이 더 더욱 중요해진다. 좋은 하드웨어 기술로서 2백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하는 것이나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공원'이란 단 한편의 영화가 올리는 수입이 맞먹는 것만 보아도 소프트웨어적인 요소는 경제논리에서도 우대되어야 한다.
기초과학은 양자론이란 새로운 발상의 과학을 통하여 반도체 레이저 원자력 등 현대산업의 필수품을 가능하게 했다. 돈으로 환산 할 때 기초과학의 몫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만은 틀림없다. 미국 상공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세기말까지는 기초과학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신소재 초전도체 디지털이미지산업 초고직접데이터저장 생명공학 인공지능 등 12가지 분야의 시장규모는 연간 1조달러(8백조원)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큰 몫을 차지하는 기초과학이 취약해서는 국제경쟁에서 탈락하기 쉽다.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은 산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져 있다. 경제면에서는 15위에 속하면서 기초과학은 24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산업연구와 엔지니어링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더 투자가 필요하다. 기원전 500년부터 오늘날까지 기초과학과 시장에 나오는 새로운 제품의 함수관계를(그림)으로 나타내 보았다. 피타고라스 등에 의하여 기하학이 발달 되던 기원전 그리스 시대에는 새로운 산업제품도 많이 나왔다. 오늘날 자동차의 기어(gear)도 벌써 이때 수레에 이용될 정도였다.
그러나 로마시대가 되면서 지식을 등한시하고 도서관을 불태운 결과 알고 있던 과학지식도 많은 부분이 상실되고 과학과 기술제품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약 1천5백년 동안의 암흑시대에는 새로운 산업이 발달되지도 않고, 그 옛날 그리스 시대에 알았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도서관을 불태움으로써 전달되지 않았다. 종교가 지배하는 암흑시대에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어졌고, 과학문명과 동시에 합리적인 사고방식도 쇠퇴하였다 .
그러나 뉴턴의 역학이 성립되면서 건축 및 기계의 발달이 눈부시게 일어났다. 전자기학과 진화론이 나오면서 영화 라디오 전구 무선 전신 등 수많은 산업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양자론과 DNA의 발견은 생명공학과 수많은 전자산업을 가져왔다. 이렇게 산업과 기초과학은 2000년 동안 기초과학이 활발히 연구되면 산업이 일어나고 기초과학이 약해지면 합리적 사고방식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제품들이 나오는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실패를 수용할 수 있어야
세계화를 나라의 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오늘날 사회 일부에서는 눈앞의 경제성장에만 매달리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문화인, 그것도 21세기의 주도문화인 과학을 경제논리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힘 있는 사람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직접적인 경제이익을, 그것도 너무 단기간의 이익을 따져서 과학의 성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기초과학의 연구는 반도체 생산라인에 몇조원을 투자하였을 때 회사가 망하느냐 흉하느냐가 단기간내에 결정되는 것처럼 긴장감과 무거운 책임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초과학연구는 실패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틀림없는 분야에만 투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인들이 광활한 서부를 개척할 때 지평선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을 리가 없다. 가보아서 좋지 않으면 버리고 또다시 좋은 곳을 찾아서 정착했다. 지평선 너머 저 미지의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그 호기심이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의 부강한 미국이 있게 된 것이다.
기초과학에서는 결과가 예측되고, 쉽게 짐작할 수 있고, 확실한 것은 그렇게 큰 성과를 낳지 않는다. 전혀 무엇인지 모르고, 결과가 예측되지 않기에 연구를 하는 것이지 짐작이 확실한 결과를 예상하는 연구는 기초과학에서는 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기초과학의 큰 발전은 예상이 빗나갔을 때 더 큰 성과를 얻는 경우도 많다. 그 옛날 멕시코 사람들은 '치보라'로 알려진 전설의 황금도시를 찾아서 북상했다. 멕시코인들은 지금의 텍사스를 발견했으나 황금의 도시 '치보라'는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황금대신 '검은 금'인 원유를 찾아냈다. 현대 산업에서 "원유가 황금 보다 못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