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1 크게 보면 같은 꼴-시작도 끝도 없다

관측면에서 우월, 혼돈급팽창론도 우주영원성 주장

정상우주론의 변형인 준정상우주론에서는 우주는 늘 같은 꼴로 있지 않고 잠깐씩 진화할 수 있으나 거시적으로 보면 균질하고 등방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형의 최대장점은 대폭발이론에서 가정하는 암흑물질의 존재가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현대우주론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우주진화모형은 대폭발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표준 우주모형'은 우주진화에 대한 네가지 착상을 짜 맞춘 각본이다. 즉 우주가 초고온 고밀도 상태로부터 팽창하여 오늘날 차고 희박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대폭발 가설, 우주 진화 초기에 급격한 공간팽창과 물질생성이 있었다는 급팽창가설, 우주물질의 대부분은 차가운 암흑물질이라는 생각, 그리고 별에서 우주거대구조에 이르는 온갖 천체들은 급팽창 당시의 극미한 밀도요동이 중력 수축하여 생겼다는, 중력 불안정에 의한 우주구조 기원설 등이 그 알맹이다.

그런데 이 표준모형(이하 대폭발 우주모형과 섞어 씀)은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여러 관측사실들을 잘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우선 대폭발 우주모형에서는 우주의 나이가 너무 짧다. 만약 허블상수가 관측 천문학자들의 주장처럼 약 75㎞/초/Mpc(거리가 1백만 pc 떨어진 천체는 초속 75㎞로 멀어지고, 2백만 pc 떨어진 천체는 초속 1백50㎞로 멀어진다는 뜻. 1pc는 3.26광년)이고, 우주상수(물질 사이에 밀힘을 일으키는 일종의 진공 에너지)가 없다면 우주의 나이는 90억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은하에는 이보다 늙은 구상성단들이 많다.

또한 표준 우주모형은 수억광년에 이르는 우주거대구조들(외부은하들이 모여 이룬 초은하보다 큰 천체)이 어떻게 1백억년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거대하게 자라왔는가를 답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통 밀도가 임계값(약 ${10}^{-29}$g/㎤)보다 낮은 모형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은하들 사이에 중력이 약해져 우리 주위의 외부은하들이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우주상수를 도입하지 않으면 우주배경복사의 비등방성이 코비위성의 관측값보다 커진다.

이렇듯 많은 결점을 안고 있는 대폭발 우주 모형을 과학자들이 '표준모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딛고 보다 나은 모형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본래 뜻과 달리 요사이 대폭발 모형은 마치 모든 과학자들이 우주진화에 대해 내린 확고한 결론인 것처럼 오해받고 있다. 이로 인한 가장 큰 폐혜는 우리의 우주관이 대폭발설이라는 한가지 가설에 묶여 편협해진다는 사실이다.
 

전파은하에서 물질이 양쪽으로 퍼져나가는 모습


시공간적으로 등방이다

정상우주론(steady state cosmology)은 반세기 동안 대폭발 우주론과 선의의 경쟁을 벌인 모형이다. 필자는 이 모형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이 글에서 정상우주모형이 대폭발 우주론에 비하여 이론적으로나 관측적으로 모자람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정상우주론은 본래 1948년 본디(Bondi) 골드(Gold) 호일(Hoyle)이 내세운 이론으로 그 뒤 아프(Arp), 버비지(Burbidge), 날리카(Narlikar) 등이 지지하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모형을 '고전적인 정상우주론'이라고 한다. 이 우주론의 기본가정은 '완벽한 우주원리'(perfect cosmological principle)이다. 즉 표준모형의 가정처럼 우주(물질 빛 팽창속도 물리법칙 등)가 공간적으로 균일하고 등방일 뿐만 아니라, 우주는 시간적으로도 균일, 등방이라는 것이다.

우주는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어느 곳이나 어느 쪽으로나 똑 같은 것처럼, 시간적으로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날이나 늘 같은 꼴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우주는 진화하지 않으며 영원하다. 대폭발 모형에서처럼 떠들썩한 시작이나 비극적 종말도 없을 것이다.

이 모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정상우주론에서 우주공간은 현재 모든 곳에서 일정한 비율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빨리 멀어진다. 즉 허블의 법칙이 성립한다. 공간이 팽창하지 않았더라면 무한한 시간동안 태어났던 별들이 계속 죽으며 쌓여 오늘날 우주는 완전히 식어버린 백색왜성 중성자성 검은구멍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 공간이 계속 생기므로 그럴 염려는 없다. 공간이 팽창하면 밀도가 낮아진다. 따라서 우주의 상태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려면 물질이 꾸준히 생겨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새로 생긴 물질로부터 별과 은하가 태어나 우주를 여전히 밝혀줄 수 있다.

아마 독자들은 물질이 무(無)에서 저절로 생겨난다는 이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생성을 밑바탕으로 삼는 정상 우주론은 넌센스라고 속단할지 모른다. 이 가정이 과연 타당한가를 알기 위해 표준우주모형에서 물질이 기원하는 원리를 살펴보자. 표준모형에서는 우주생성 직후에 어떤 기운(양자역학에서 양자장-quantum field 라고 부른다)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주팽창하면서 온도가 떨어짐에 따라 그 기운이 어느 한 시기에 음의 압력을 내게 되고, 음의 압력은 물질 사이에 밀힘을 일으켜 우주공간이 급팽창하고, 공간이 팽창한 만큼 우주의 에너지가 증가한다고 한다. 이 에너지가 급팽창이 끝날 때 물질로 바뀌는 것이다.

약 1백50억년 뒤에 태어나 있는 모든 천체들은 이때 생성된 물질로부터 만들어졌다. 즉 표준모형에서 물질생성은 지금이 아닌 아주 먼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상 우주론에서처럼 물질생성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난다면 불합리하고, 우리가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는 아득한 옛날 일이면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정상우주론에서는 지금 현재도 우주에 양자역학적인 기운이 퍼져 있고, 거시적인 규모에 기운이 세고 약한 차이가 있어 물질이 모든 곳에서 조금씩 생겨난다고 생각 한다. 이렇게 정상우주론과 대폭발 우주론에서 물질이 생성되는 원리는 별로 다르지 않다.
 

허블망원경을 띄워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하나…


잠간씩 진화할 수 있으나

흔히들 대폭발 우주모형이 우주배경복사의 존재를 예측했고, 물질의 원소구성 비율(예를 들어 수소와 헬륨의 비가 3대 1)을 설명했다는 점을 이 모형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공사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상우주론에서도 이 관측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호일은 그가 세운 본래의 정상우주론을 약간 개선하여 준 정상우주론(quasi-steady state cosmology)을 주장하고 있다. 새 모형에서 우주는 늘 같은 꼴로 있지는 않고 짧은 시기 동안에는 잠간씩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보면 우주는 역시 꼭같은 모습을 유지한다. 마치 표준모형이 가정하는 우주원리에서 우주는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균질하고 등방이나, 국부적으로는 별 은하 은하단 우주거대구조 등이 널려 있어 매우 불균질하고 비등방인 것과 마찬가지다.

준정상우주모형에서 물질의 생성은 우주공간 모든 곳에서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검은구멍 둘레처럼 중력이 매우 강한 곳에서 급격한 공간 팽창과 함께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즉 표준모형에서의 급팽창과 같은 현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주공간 안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자그마한 대폭발들(mini-Big Bangs)이라고나 할까? 일반상대론으로 이 메커니즘을 따져 보면, 우주 어느 한 곳에서 이러한 공간 팽창과 물질 생성이 꽤 크게 일어나면, 우주는 한 동안 팽창하게 되고 또 다른 폭발은 일어나기 매우 힘들어진다. 얼마 뒤 공간 팽창이 느려지면 새로운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져 우주에는 공간과 물질을 생성할 새로운 씨앗이 싹튼다. 작은 빅뱅마다 물질과 공간이 창조되는 짧은 시기와 이들이 자유롭게 팽창하는 긴 시기가 있어 우주공간은 조금씩 진동하면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배경복사는 급격한 공간팽창과 물질생성이 이루어지는 곳(이하 '작은 빅뱅')으로부터 터져나은 물질입자가 주위에 있는 물질과 부딪힐 때 생긴 빛이 쌓여 만들어진다. 또한 이 빛은 그후 수십번 물질에 흡수되었다가 사방으로 재방출되면서 흑체복사의 에너지 스펙트럼을 띠게 되고, 공간적으로 매우 고르게 된다. 이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2.73K이려면 작은 빅뱅을 일으키는 고중력 천체의 질량은 태양질량의 약 ${10}^{16}$배이어야 한다. 이것은 대체로 우주거대구조의 질량과 같다.

한편 작은 빅뱅에서는 질량이 ${10}^{5}$g 정도인 입자(플랭크 입자)들이 생긴다. 이들이 붕괴를 거듭하여 만들어진 소립자들은 주변의 온도가 ${10}^{10}$K 정도로 낮아지면 핵합성을 한다. 이때 물질의 약 24%는 헬륨이 되고, 나머지는 수소로 남는다. 중원소도 극히 일부 만들어진다.

암흑물질이 필요 없다

준정상우주모형은 우주배경복사와 물질의 원소비를 잘 설명할 뿐 아니라, 표준우주론이 안고 있는 다른 문제들도 해결해준다. 예를 들면 준정상우주론에서는 보통의 물질 이외에 암흑물질이 필요없다. 표준모형에서 우주의 밀도는 약 10g/㎤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것의 약 10분의 1쯤으로 관측된다. 즉 우주질량의 90% 이상은 '차가운 암흑물질' 이라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물질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천문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이 암흑물질의 분포와 정체를 밝히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준정상우주론은 그 까닭이 우주에는 암흑물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최근 관측에 따르면 우주에는 많은 수소구름으로 이루어진 흐릿한 은하들이 있으며, 우리은하 중심핵에서는 매우 나이 어린 별떼들이, 나이를 1백억년 쯤 먹은 외부은하에서도 아주 젊은 구상성단들이 발견되었다. 준정상우주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새로 만들어진 물질로부터 갓 태어난 천체들이라고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우주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질분출현상들, 예를 들어 전파 은하, 퀘이사(quasar), 활동하는 은하핵(active galactic nuclei)등에서 뿜어나오는 물질흐름은 바로 우주공간 여러 곳에서 일어난다는 물질과 공간 창조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이 현상들에 대한 정설은 물질의 분출이 이 천체들 중심에 있는 검은구멍과 그 둘레의 유입물질원반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준정상우주모형은 대폭발 가설을 채택한 표준우주모형에 비해 관측적으로 우월한 면이 있고, 개념적으로 더욱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모형의 가치는 역시 표준 모형과는 다른 우주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점이다.

혼돈 급팽창 가설

한편 지금까지 소개한 호일학파의 정상우주론과는 다른 맥으로 우주의 영원성을 갖춘 모형이 있다. 이것은 혼돈 급팽창 가설(chaotic inflationary hypothesis)을 창시한 린데(Linde)의 발생이다. 표준모형에서 급팽창은 우주진화 초기의 짧은 순간( 약 ${10}^{-35}$)일어난다. 이로써 우주공간이 매우 느리게 팽창하는 대폭발 모형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 (우주의 크기, 균일성, 등방성)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린데는 급팽창을 야기시키는 우주의 기운이 모든 장소에서 똑같은 상태에 있어, 전 우주공간이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팽창하기 시작한다는 생각은 양자역학적으로 불합리하다고 꼬집는다. 이 기운은 양자역학적 요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아주 드물지만 어느 한 곳에 우주기운의 에너지가 매우 큰 곳이 있을 수 있으며, 이지역이 엄청난 팽창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리고 급팽창이 일어나고 있는 우주안에서 우연히 또 다른 급팽창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시공간은 마치 거품이 일듯 꼬리를 물고 가지쳐 나아간다. 하나의 급팽창이 일어나면서 생긴 우주는 각각 대폭발 우주론의 닫힌우주나 평탄한 우주, 열린우주의 운명을 밟아갈 것이다. 개개의 우주는 시작과 끝이 있을지 몰라도, 우연이 지배하는 혼돈의 세계에서 영원히 반복돼 일어나며, 그 모든것을 아우른 전체 우주는 영원하다(그림 참조).

린데는 이 과정이 마치 한 개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짧은 삶을 누리나, 인류는 오래 지속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또한 지구에서 발상한 인류문명은 결국 사라지더라도, 우주의 다른곳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 색다른 문명을 일으키리라는 낙관론을 편다.
 

● 린데의 '번식 우주'^우주에는 급팽창 거품들이 끊임없이 생겨나 자식우주들을 만들어낸다. 개개의 소우주에서는 서로 다른 물리법칙이 성립할 수 있다(그림에서 색깔로 구분함). 소우주들은 대폭발 우주모형과 같은 진화를 하더라도 전체 우주는 무수히 가지친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5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박창범 교수

🎓️ 진로 추천

  • 천문학
  • 물리학
  • 철학·윤리학

1995년 01월 과학동아 다른추천기사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