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과학상은 세계 과학계의 발전을 이끄는 촉매역할을 해왔다. 노벨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영예의 수상자는 누구인가. 또 영광의 뒤안길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노벨상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해본다.
해마다 12월 10일이면 세계의 관심은 북구로 쏠린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노벨상 수상식이 스웨덴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0월 중순 경이면 각 부문 수상자가 속속 발표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전세계 매스컴은 수상자에 대한 소개로 떠들썩해진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의 유지에 따라 설립됐다. 자신의 발명품이 살상용으로 쓰이는 것을 개탄한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에 유언장을 남겼다. "인류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유산 3천1백만 크로나(약 9백만 달러)를 스웨덴왕립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 여기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해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고 있다. 시상식인 12월 10일은 노벨의 운명일이다. 처음에는 문학상 평화상 의학생리학상 화학상 물리학상 등 5개부문으로 나뉘어 실시돼 오다가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추가 됐다.
수상에 관한 조항은 1900년 스웨덴 국왕이 허가한 법전에 상세하게 규정돼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수상자는 매년 상금이 수여되는 해의 전년도에 인류의 복지에 가장 실질적으로 공헌한 자 또는 단체로서 △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한 자 △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명 또는 개선을 한 자 △ 생리학 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을 한 자 △ 문학 영역에서 이상주의적 경향이 가장 우수한 작품을 만든 자 △ 국제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일, 군대와 군대와의 대립을 해소 또는 완화하는 일, 평화회의의 결성 및 증강에 진력한 자다.
수상자 선출은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 의학생리학상은 스톡홀름 의학 연구소, 문학은 스웨덴 문학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가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한 5인위원회가 맡는다. 경제학상은 스웨덴 중앙은행이 주관한다.
수상자를 결정하는 단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명단이 같은 시기에 발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상식은 모두 12월 10일 하루에 열린다. 상은 금메달 상장 상금으로 이루어지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 증가 등에 의해 해마다 조금씩 변동이 있다. 한 부문 수상자가 2명 이상일 때는 해당 부문에 돌아온 상금을 나누어 주도록 돼 있다.
노벨상은 국가 기초과학력의 상징
노벨상 중에서도 물리학 화학 의학생리학에 주어지는 과학상은 해당분야의 발전을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벨상이 과학 발전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절대적 잣대가 아님은 물론이다. 흔히 노벨상은 미국과 유태계가 독식해왔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를 전제로 하고 노벨상 수상력을 살펴보면, 몇가지 흐름 정도는 읽어 낼 수 있다.
우선 수상분야의 변천이다. 이를 통해 당대 세계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초점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가령 50년대까지는 물리학의 양자론 분야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를 냈지만 60년대 이래 유전자 및 분자생물학 분야가 주목받고 있다.
분야별로 보자면 70년대까지 물리학에서는 무선 X선 전자 분야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고 화학부문은 생화학, 의학생리학 부문에서는 신경조직과 유전자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많은 수상자가 탄생했다. 최근에는 물리학상의 경우 소립자, 의학생리학상의 경우 분자생물학, 화학은 생화학에서 수상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가별 기초과학의 발달 수준을 읽을 수도 있다. 가령 수상자들을 국가별로 계산해보면 일부 선진국에 편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1901년부터 올해까지의 역대 수상자 4백25명 중 1백72명이 미국국적이었고 68명이 영국인, 59명이 독일, 25명이 프랑스 국적의 순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국적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처음부터 미국 독주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리학 화학 의학 생리학 부문 모두 2차세계대전 이후 수상자가 폭증, 미국의 과학이 이때부터 꽃피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부문을 통틀어 노벨상을 단 한명이라도 낸 나라수가 겨우 25개국에 불과하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의 노벨과학상이 탄생하기까지는 걸출한 과학자 한 사람의 재능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과 사회의 지적 풍토가 기반이 돼야 한다는 점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노벨상은 국력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날이 갈수록 노벨상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는 듯하다. 올해도 5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중 4명이 미국인이었고 1명이 캐나다인이었다.
동양계의 실적이 대단히 부진한 점도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노벨과학상을 수상한 동양인은 일본 5명, 중국 2명 인도 1명 파키스탄 1명이 전부다.
이같은 실정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서양에서 발상한 근대과학을 접한 게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아시아의 전통적인 사회제도나 환경이 노벨상을 탈 만한 창의적인 재질을 계발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거리상으로 너무 떨어져 있어 정보의 교환이 어렵다는 지적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노벨상 수상에 빛난 인물들의 경우도 자국의 뒷받침이나 저력이 반영됐다기 보다는 서구 과학계의 계보에 편입돼, 노벨상에 근접한 수준의 스승의 지도 아래서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경우에 한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의 '홀로서기'가 어렵다는 것은 1979년도 물리학상을 탄 파키스탄의 압두스 살람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3년간의 영국유학생활을 하면서 24세의 나이로 입자물리학계의 유명인이 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정착하려 했으나 제대로 된 문헌을 갖춘 도서관도 없고 동료도 없는 가운데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학문을 위해' 고국을 떠나야했다.
다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간 그는 결국 파키스탄 출신으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됐다. 한편으로 그는 불우한 후진국 이론 과학자들을 돕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 1964년 저개발국가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춘 국제 이론물리학연구소(ICTP)를 세우기도 했다.
과학부문 수상자 4백25명 중 1백72명이 미국인
노벨상은 국적과 남녀의 구별없이 시상됨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 이레느 퀴리(1935년 화학상), 맥클린토프(1983년 의학생리학상), D.M. 호지킨(1964년 화학상), 거티 테레사 라드니즈 코리(1947년 의학생리학상), 거트 루드 엘리온(1988년 의학생리학상) 등 7명이다.
81세의 고령으로 노벨상 사상 7번째 여성 수상자가 된 83년도 수상자 바바라 맥클린토크(미국)는 32년만에 그 업적을 인정받은 경우다. 그는 옥수수의 전이유전자를 발견한 뒤 '뛰어다니는 유전자'(Jumping Gene)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연구성과는 암과 전염병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업적이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빛을 본 이유로 일각에서는 여성과학자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연구가 너무나 선구적이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맥클린토크가 옛날식 멘델 방법을 통해 밝혀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재결합 DNA기술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드물지만 가족이나 부부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경우도 몇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세대에 걸친 퀴리 부부의 사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부부는 1903년 '방사능의 연구'로 물리학상을 탔다. 1911년에는 마리 퀴리가 '금속라듐의 분리'로 화학상을 수상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딸 이레느 퀴리와 이안 프레데릭 졸리오 부부는 1935년 '인공방사성 원소 연구'로 화학상을 수상해 2대에 걸쳐 노벨상의 영광을 안은 드문 케이스가 되었다.
1915년 노벨 물리학상은 영국의 W.H. 브래그와 W.L.브래그 부자에게 돌아갔다. 'X선에 의한 결정구조의 연구' 업적에 따른 것이다. 1947년 C.F.코리와 G.T.코리부처는 '리코겐의 접촉작용에 의한 대사발견'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상반된 결론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노벨 물리학상을 탄 재미있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인 J.J. 톰슨은 1906년, 아들인 G.P. 톰슨은 1937년에 수상했다.
아버지 톰슨은 그때까지 진공방전의 실험 가운데 음극선이라 불리던 방사선의 본체가 미립자(질량을 가지며 그 실체가 좁은 공간영역 속에 집중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했고, 아들 톰슨은 그 전자가 간섭이라고 하는 파동성을 나타낸다는 것, 즉 그 실체가 공간적으로 어느 정도 확산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즉 전자의 존재방식에 대해 부자가 전혀 상반된 결과를 제출한 것인데, 양쪽 모두 실험적으로 증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라고 하는 이 모순은 오늘날까지에는 둘 다를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있다.
20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노벨상. 그러나 노벨상에도 화려한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빛에는 항상 그림자가 따라다니듯 노벨상에도 어두운 이면이 있다.
노벨상의 그림자 부분이라하면 노벨상의 규정 자체에서 오는 한계도 있고 심사진의 편견도 있을 수 있으며 정치적 관계나 인맥에 치우친 선정에서 오는 잡음 또한 있을 수 있다.
노벨상의 그늘
노벨상은 각 분야에서 생존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못박혀 있다. 때문에 노벨상을 마땅히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놓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2차대전에 참전, 젊은 27세의 나이로 전사해 버린 모즐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또 한 분야에서 3사람으로 규정된 제한 때문에 비슷한 업적을 가지고도 누구는 수상을 하고 누구는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심사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거나 시대를 앞서가는 발견을 했기 때문에 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 또한 있을 수 있다. 생화학자 애버리는 1944년 폐렴구균의 형질전환 연구를 통해 유전자의 본체가 DNA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 노벨상 위원회는 더 많은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10년뒤 그의 이론이 진실로 판명됐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발견 뒤 32년 뒤에야 빛을 보았지만 수상자가 장수했기 때문에 빛을 본 맥클린토프 같은 경우도 있다.
1921년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의 경우 그의 수상이유는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였다.
이밖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상에서 제외 되는 경우도 있다. 일찍이 DNA의 염기조성에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샤가프의 경우도 유명하다. 1962년 '핵산의 구조와 유전정보 전달에 관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이 왓슨과 크릭, 월킨스에게 돌아갔다고 발표됐을 때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연구의 원조인 샤가프가 빠졌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에 관련해서는 또하나 억울한 인물이 있다. 이 DNA 나선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R.프랑클린의 경우는 여성이라는 핸디캡에 요절이 겹친 안타까운 사례다. 그녀는 1958년 37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프의 경우 주기율과 원소표를 발견하고도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는데, 수상대상이 된 당시 이미 모든 교과서 속에 진리로 자리잡아 버렸기 때문에 신선감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착오로 잘못된 연구에 주어지는 경우.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의 피비거교수는 기생충이 암을 유발한다는 증거를 보고, 1926년 노벨의학 생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훗날 이 연구성과는 극히 한정된 계통의 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일반성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치성·인맥 등 작용으로 공정성 위협
1980년 '네이처'지에는 '어떻게 노벨상의 룰을 바꿀 것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수학 기상학 천문학 등의 분야가 수상분야에서 제외돼 있는 점이나 공동연구자로서는 연장자가 수상하고 나이 적은 사람은 수상할 수 없다는 예를 들어 모순을 지적하는 기사였다.
가령 미국 하버드 대학의 길버트는 핵산의 DNA 염기 배열을 단시간에 해독하는 방법(맥심-길버트 방법)을 개발한 업적으로 198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방법의 공동연구자인 맥심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수상하지 못했다. 펄사의 발견으로 197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휴이시의 경우 그의 공동연구자인 대학원생 버넬양 덕분에 수상할 수 있었다고 하여 영국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노벨상 후보지명에 작용하는 정치성이나 인맥도 심각한 문제다. 80년대 10년간 노벨상위원회의 화학분과위원장을 맡았던 보 말름스트롬이 지난 1988년 공개적으로 밝힌 노벨상 후보지명의 문제점은 대단한 파문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그해 12월 캘리포니아공대의 세미나에 참석했던 말름스트롬은 '사이언스'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인 지명권자들이 가장 업적이 큰 화학자들을 지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미국인들만을 지명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가령 1988년 노벨화학상은 '광합성과정을 물리적인 접근을 통해 밝혀내어 광합성의 3차원구조를 규명한 공로'로 다이젠호퍼 후버 미헬 등 3명의 독일 화학자들이 10개국으로부터 지명을 받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미국 화학자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말름스트롬은 이같은 이유로 미국인들의 쇼비니즘을 들고, 이는 특히 하버드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과 같은 큰 대학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노벨상은 해당과학자들에게는 희비가 교차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송이 일어나는 경우조차 있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다. 노벨상이 과학자들간에 불필요한 경쟁을 부추기고 갈등을 낳는다는 점에서 그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연구란 직물과 같은 것으로 여러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어느 것을 평가하느냐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노벨상은 일부분만을 평가할 뿐이며 엉뚱한 착오를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이같은 제도는 과학자들 간에 상을 타기 위한 경쟁을 낳기 때문에 좋지 않다."
노벨상에 대한 샤가프의 이같은 의견은 비단 그가 억울하게 노벨상을 타지 못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