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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즈메이니아의 비극

잃어버린 '인류진화의 고리'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1만년간 고립돼 살아왔다. 따라서 유인원에서 현생인류로 진화되는 과정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남동쪽으로 1백50마일 가량 떨어진 바다 위에 아일랜드 크기만한 섬이 하나 있다. 산이 유독 많지만 놀랍도록 다양한 생태계를 갖고 있는 태즈메이니아(Tasmania)섬이다.

1642년 12월 이 섬에 상륙한 아벨 태즈맨이라는 네덜란드사람에 의하여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질 때까지 거의 1만년 동안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문명세계와 접촉을 끊고 살았다.

무릇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들은 외톨이로 따돌림 당하는 것을 못견뎌한다. 인류학자들이 현생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사회로 확인된 태즈 메이니아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의 1백50일 가량 떨어진 바다 위에 아일랜드 크기만한 섬 태즈메이니아
 

가장 오래 격리된 사회

태즈맨이 상륙했을 때 그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그 당시 약 5천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검은 피부와 머리카락, 깊게 움푹 팬 두 눈, 넓적한 코, 튀어나온 광대뼈, 두툼한 입술, 호리호리한 체격 등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생김새가 엇비슷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시사철 발가벗고 지냈다. 추위에 잘 견디는 특수체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걸어다닐 때에는 횃불을 들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쉴적이면 어김없이 불을 지펴 몸을 덥혔다. 불이 이처럼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쏘시개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불이 꺼지면 다른 사람에게 가서 붙여오곤 했다. 생계는 수렵채집으로 꾸려나갔다. 남녀 모두 바다표범 (seal)을 잡았다. 남자는 캥거루를 사냥했으며 여자는 식물을 채집하거나 물속에서 전복과 바닷가재를 잡았다. 요컨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최근까지 생존한 인류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종족이었다.

기술수준은 당연히 볼품이 없었다. 쇠붙이나 뼈로 만든 도구는 일체 없었고 돌이나 나무로 만든 스무개 남짓한 연장이 전부였다. 그 밖에 풀을 꼬아서 바구니 밧줄 물통 쌈지 따위를 만들었다. 섬사람들답게 배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지만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카누처럼 생긴 뗏목인데 골풀이나 나무껍질로 만들었기 때문에 몇마일 못가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인류학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유물은 이 뗏목이다. 호주 원주민들이 태즈 메이니아로 건너온 방법과 시기를 어림짐작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헤엄치거나 뗏목을 타고 1백50마일의 바다를 건너갈 수 없음이 분명해짐에 따라 호주대륙과 태즈메이니아섬 사이가 맨땅이었던 빙하기에 호주 원주민이 도보로 섬에 당도하여 무인도를 식민지로 점령했다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지구의 대양이 얼음으로 바뀌었던 빙하기에는 해면의 높이가 낮아져서 태즈메이니아가 섬이라기 보다는 대륙의 모퉁이였다는 뜻이다. 대략 5만5천년 전에는 대륙과 섬 사이가 육지였으나 그 후로 3만7천년 전까지 물이 찼으며 또다시 1만년 전까지 간헐적으로 맨땅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1만년 전부터 오늘날의 섬모양이 된 것이다. 태즈메이니아의 가장 오래된 유적은 그 연대가 3만5천년 전으로 추정된다. 인류학자들은 뗏목 빙하 유적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3만7천년 전 빙하기가 시작된 직후에 호주대륙에서 원주민들이 섬으로 이주해왔으며, 1만년 전 바다가 섬을 둘러싸게 되면서부터 외부세계와 격리된 채 길고 긴 고립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물고기 먹지 않는 섬사람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은 호주 원주민의 후예이므로 초기에는 그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만년이 지나서 큰 격차를 보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태즈메이니아에 없는 문화는 1만년 동안에 밖에서 호주로 들어온 것이거나 아니면 호주에서 생긴 것으로서 태즈메이니아에 들어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둘째 태즈메이니아와 호주 원주민이 본래 1만년 전에 공유했으나 일부 문화가 태즈메이니아에서 사라졌을는지 모를 일이다. 두번째의 설명은 인간의 본성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기술진보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적어도 두가지 중요한 관습을 포기한 것으로 확인되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뼈로 만든 도구의 사용이며 다른 하나는 물고기를 먹는 습관이다. 호주 원주민들은 동물 가죽을 뚫는 송곳이나 어망을 짜는 바늘을 뼈로 만들었다. 이러한 도구가 7천년 전까지만해도 태즈메이니아에서 사용되었으나 3천5백년 전부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유용한 도구의 사용을 중단한 까닭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섬에 사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물고기를 전혀 먹지 않은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인들이 물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경악했으며 넌더리를 칠 정도였다. 그러나 한때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던 흔적이 유물에서 확인됨에 따라 물고기를 먹지 않게된 곡절이 더욱 궁금해졌으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이 그들에게 매우 유익한 관습을 포기한 것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림으로써 발전을 추구하게 마련인 인류 역사의 기본정신에 정면으로 도전한 결과가 되었지만, 단순히 물질적 이익이 된다는 냉혹한 계산에 의해서만 인류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주고 있다. 때로는 신화나 종교에 의하여 동일한 행동이 관습으로 굳어질 수 있고 금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태즈메이니아의 비극

정작 태즈메이니아의 불운은 1만년간의 고립 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1772년 태즈맨에 이어 두번째로 섬에 나타난 유럽인은 프랑스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수시간 동안에 몇명의 태즈메이니아 사람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돌아갔다. 태즈메이니아의 비극을 예고하는 총질이었다. 유럽인들의 본격적인 태즈메이니아 점령은 1790년대 중반부터 들이닥친 영국의 바다표범 사냥꾼, 죄수, 군인 등의 도착으로 그 막이 올랐다.

섬의 원주민과 백인 만큼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사람들은 지구상에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곧바로 피바람을 일으켰다. 백인들은 극도로 잔인했다.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납치하고, 여자들을 능욕하기 일쑤였으며, 사내들은 병신으로 만들거나 죽였다. 여자들을 통나무에 묶어서 장작불로 태워죽였으며 금방 잘라낸 남편의 머리를 아내의 모가지에 걸어주기도 했다. 남자의 생식기와 고환을 절단하거나 주검을 절벽 아래로 내던지기도 했다. 백인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으나 흉악범으로 처벌받은 영국인은 한명도 없었다.

1828년에는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어 유럽인의 정착지에 얼씬거리는 원주민은 즉시 사살해도 좋다는 살인면죄부가 공식적으로 발급되었다. 한 명의 경관이 다섯명의 죄수를 인솔하는 수색조가 편성되어 원주민을 짐승사냥하듯 살해했다. 생포를 조건으로 현상금까지 나붙었기 때문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사냥은 백인에게 큰 돈벌이가 되었다. 1830년에는 싹쓸이가 시작되었다. 30마일 떨어진 무인도로 원주민 전원을 추방한 것이다. 이송도중에 대부분이 죽어 2백여명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감옥처럼 운영되는 숙소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르면서 기독교도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문명화를 용이하게 한답시고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시켰다. 그러나 바람 많고 물이 부족한 무인도였기 때문에 1백여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병들어 죽었다. 호주 정부는 관련예산을 삭감하기에 이르렀다. 모두 죽기를 바란 셈이었다. 1847년 47명의 생존자가 다시 태즈메이니아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5천명 중에서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1869년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으로 겨우 세 명이 살아 남아있었다. 이들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유인원에서 현생인류로 진화가 이행되는 중간과정에 생존했을 것으로 유추되는 가상의 동물, 즉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즈메이니아의 마지막 남자가 1869년에 죽자마자 과학자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교대로 그의 시신을 파내고 되묻곤 했다. 몸의 일부를 절단해서 훔쳐가기도 했다. 한사람은 머리를, 다른 사람은 손발을, 또다른 사람은 귀와 코를 기념품으로 잘라갔다. 심지어는 피부로 담배쌈지를 만들기까지 했다. 태즈메이니아 최후의 사람은 1876년에 죽은 늙은 여인네이다. 최후의 남자처럼 사후에 시신이 찢기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바다에 수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녀의 수장부탁은 소용이 없었다. 해골은 1947년까지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사후 1백년이 지난 1976년에 비로소 화장되어 그녀가 원했던 대로 바다에 흩뿌려졌다. 이 여인의 죽음으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멸종되었으며 80여년 만에 백인이 이 섬의 완벽한 정복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1846년 마지막으로 죽은 여인과 그녀의 가족.
 

대량학살로 점철된 역사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몰살은 소규모의 종족근절(genocide) 시도가 성공을 거둔 사례이다. 이처럼 한 민족을 계획적으로 대량학살한 보기를 들라면 누구나 맨먼저 연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치스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이기 십상이다. 나치스는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유럽점령지역에서 수천만명의 유태인, 집시, 러시아사람을 살륙했다. 대학살은 마치 나치스와 같은 흉포한 집단이나 저지르는 만행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크고 작은 종족근절의 핏자국으로 얼룩져있다.

1천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살륙행위로는 나치스의 유태인 대학살(Holocaust)과 함께 소련의 정치적 반대자 숙청을 들 수 있다. 공산혁명의 마무리를 위해서 11년간(1929-1939) 소련정부가 동족을 무더기로 죽인 것이다. 1백만명 이상 학살된 사례로는 스페인 사람들이 저지른 서인도제도의 인디언 몰살(1492-1600)과 중남미의 인디언 살해(1498-1824), 미국인의 인디언 말살(1620-1890), 1915년 터키 사람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사람 학살,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1971년에 있은 파키스탄 군대의 벵골인 대량학살, 그리고 크메르 루즈의 캄보디아인 정적 숙청(1975-1979)등 여섯 건을 꼽을 수 있다.

인간의 의도적인 대량학살 행위는 인간고유의 본성은 아니다. 종족근절의 가장 전형적인 두가지 형태 모두 그 선례를 동물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이는 행위는 침팬지와 늑대의 행동양식에 부합된다. 둘째 남자는 죽이면서 여자를 아끼는 경우는 고릴라와 사자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1만명 이상의 정치적 비판자와 그 가족을 학살하는 과정(1976-1983)에서 채택한 방식은 동물의 행동에서도 그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서너살짜리 코흘리개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한 아르헨티나 병사들이 임산부를 체포하면 아이를 분만할 시기까지 살려두었다가 반드시 머리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갓 태어난 아이는 자식이 없는 군인에게 입양했기 때문이다.


종족근절의 대표적인 예는 나치스의 유태인 학살이다. 사진은 '쉰들러 리스트'의 한장면
 

백인의 들소 사냥

종족근절은 무력이 강한 종족에 의하여 자행되고 비인도적인 행동은 합리화되게 마련이다. 대량학살의 명분으로는 대충 두 가지가 곧잘 언급된다. 첫째는 정당방위이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멸종을 정당화시키는데 동원된 명분이다. 원주민에 의해 살해된 영국인은 2백명 남짓했지만 이를 빌미삼아 5천명을 납치, 능욕 또는 살해하여 결국 씨를 말린 것이다. 둘째는 동물과 사람은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이 죽인 종족은 동물과 진배없다는 강변이다. 나치스는 유태인을 인간쓰레기로 보았다. 돼지 개 또는 들쥐 취급을 받으면서 죽어간 종족은 한둘이 아니다. 인디언을 거의 완벽하게 멸종시킨 미국인 역시 자신들의 행위를 이 두가지 명분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미국인들은 인디언과의 분쟁을 아주 먼 과거의 일로 망각하고 싶어하면서 인디언의 몰살이 계획적인 학살보다는 불가피한 전투의 결과로 초래된 비극으로 보이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의 과학저술가인 제어드 다이아몬드교수는 그의 칼럼집 '제3의 침팬지'(1992)에서 "미국인들은 인디언과 백인의 갈등을 기병대와 카우보이가 몹시 야비한 들소 사냥꾼과 싸운, 말을 탄 어른들 사이의 전투였다고 낭만적으로 묘사한다"고 꼬집었다. 대표적인 보기가 미국의 서부영화이다. 미국인의 시각으로 인디언은 호전적이며 매복공격과 배반의 명수였다.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전리품으로 시체의 머릿가죽을 벗길 정도로 야만적이었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가장 존경받았던 미국 대통령들이 인디언 정책을 수립할 때 기본지침이 되었다. 예컨대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우리가 지켜주고 교화시키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이 불행한 인종은 탈주와 만행을 일삼아 몰살의 구실을 제공했으며 그들의 운명에 대한 우리들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미국인들은 인디언의 야만성을 학살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인디언들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늙은 추장은 자신의 부족 땅에 침입한 백인들이 들소를 사냥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들소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던 때를 나는 기억할 수 있지.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백인들이 와서는 들소를 죽여버려 마침내는 그것들이 있던 곳에는 뼈무더기만이 흩어져 남아 있을 뿐이었어. 백인들은 들소를 먹기 위해 죽이지 않았단 말이야. 그 자들은 쇠조각에 불과한 돈에 미쳐, 돈을 얻으려고 들소를 죽였고, 팔아먹기 위해 가죽만을 벗겨갔어. 때로는 가죽조차도 벗겨가지 않고 혓바닥만 떼어가기도 했지. 물론 그 자들의 배가 들소의 말린 혀를 가득 싣고 미주리강 아래로 내려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런 짓들을 한 사람들이 미친 놈들이란 것은 뻔한 것이지. 때로는 그들은 혀조차도 떼어가지 않았단 말이야. 그저 죽이는데 흥이 나서 죽이고 또 죽였단 말이야. 우리가 들소를 사냥할 때는 꼭 필요한 것만을 잡았는데."(T.C. 맥루한 지음 '대지와 더불어'에서)

오늘날 백인에게 북미 대륙 전부를 빼앗긴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백인들이 던져주는 동전닢에 생존을 걸어야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 한편 태즈메이니아에는 바다표범 사냥꾼과 원주민 여자 사이에 태어난 튀기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 이들 혼혈아의 후손들은 최소한 4천명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인종차별 때문에 신분노출을 꺼리는 사람까지 감안한다면 원주민의 반쪽 후손들이 의외로 많이 살고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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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인식 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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