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수를 표시하기 시작하면서 문명을 이룩했다. 이 과정에는 여러번의 비약이 있었는데, 존재하지 않는 숫자 0의 등장은 인류문명을 크게 비약시켰다.
자연수에는 두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는 물건의 개수를 셈할 때이고, 둘째는 순서를 나타낼 때다. 영어의 순서를 나타내는 first, second, third는 물건의 개수를 나타내는 one, two, three와는 다르다. 순서와 개수를 나타내는 말이 따로 발생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아파트 추첨이나 정당의 공천에 0순위라는 것이 있다. 수에는 번호를 붙이는 기능이 있으며 1,2,3,…라는 식으로 1부터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고, 실제로 수도 그렇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왜 0순위가 생겼을까? 추측컨대 처음에는 1,2,3,…으로 순위를 정해 놓았는데, 그 뒤에 큰힘을 가진 사람이 미리 정해둔 순서를 물리치고 앞자리로 기어들어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에 1층, 2층… 지하 1층, 2층, 지상 1층, 2층은 있어도 0층은 없다. 또 서기의 연수에도 0세기가 없다. B.C.99~B.C.0까지가 B.C. 1세기, A.D.0~A.D.99까지가 A.D.1세기, 0세기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0이라는 숫자는, 순서나 번호 역할을 할때는 우리에게 많이 생소하다. 인간은 아무리 큰 수라도 잘 상상하는데, 0이란 숫자는 좀처럼 쉽게 떠올리지 않는다. 정수 가운데 제일 늦게 등장한 수는 아마도 0일 것이다.
수학이란 말 그대로 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처음의 수는 물건의 개수에 대응시키면서 생긴 것이다. B. 러셀(Betrand Russel, 1872~1970)은 "한 쌍의 새와 두 개의 돌에서, 새와 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2라는 공통 요소가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역사는 혁명적 비약을 했다"고 말했다. 돌 하나에 새 한 마리를 대응시키면 이들 사이에 1대 1 대응이 생긴다. 그리하여 이 두 요소에 '2'라는 공통 요소가 존재한 것이다. 이 사실은, 대상에서 수를 추출시키는 것이 곧 수를 아는 계기가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큰 집합에도 그에 대응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이름을 지을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의 집합으로 인식하는 일은 처음 설명한 것과 같이, 두 개의 물건을 갖는 집합에서 그것을 추상시키는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사유가 필요했다. 러셀의 말처럼 수 2를 추상하게 될 때 인류 분명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0의 집합을 의식하게 될 때 또 한번의 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매듭으로 시작
수를 알게 된 인간은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갖게 된다. 중국의 고전 '주역'(周易)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옛 성인은 새끼를 꼬아 만든 매듭으로서 수를 나타냈다." 매듭은 영어로 카프(quipu)이다. 옛날에는 인구나 가축의 수 등을 매듭으로 표시했다. 남미의 잉카에서도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매듭으로 수를 표시하는 방법이 통용되었다(그림1).
매듭은 숫자 사용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새끼가 흔하지 않은 곳에서는 칼로 나무에 자국을 내어 수를 표시했다. 우리말의 '긋는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처음부터 1,2,3,…과 같은 세련된 수사(數詞)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수사를 갖고 있던 부족도 있었다.
사자의 머리 ……………………1
독수리의 날개…………………2
클로버……………………………3
소(말) ……………………………4
뉴기니의 어느 부족은 몸의 일부로 수를 나타내었다(그림2).
새끼손가락 ……………………1
약지 ……………………………2
중지 ……………………………3 등으로 표시했다.
중미의 마야족은 B.C.3000년 경에 이미 숫자를 갖고 있었다. 19세기까지 ●와 -로 나타냈고 20진법의 수체계를 갖고 있었다(그림3).
이것은 주역의 괘(卦) 발상과 비슷하다. 주역에서 여성은 (--)이고, 남성은(-)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성기를 상징한다. 인류가 처음으로 그들을 의식한 것은, 남과 여의 차이를 알게 된 뒤의 일로 여겨진다.
중국인은 一을 기본으로 하여 숫자를 만들었다.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
이 글자는 기록을 하기에는 편하지만 계산하기에는 매우 불편했기 때문에, (그림4)와 같이 산목으로 표시했다.
산목으로 1994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5)는 고대 이집트의 숫자이다. 여기에서, 1백만은 너무 큰 수이기 때문에 사람의 놀라는 모습으로 표시된다. 1천만은 너무나도 커서 실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도깨비, 귀신같은 모습으로 표시했다.
바빌로니아는 B.C.4000년 경에 이미 도시 문명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독특한 쐐기 숫자를 발명했다. 그곳에는 진흙과 갈대가 많았는데, 갈대를 갈아 진흙판에 도장을 찍는 식으로 숫자를 표시한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 연구를 통해 금년 1994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희랍은 B.C.6세기 경부터 숫자를 사용했다(그림6). 짧은 선분을 가로 세로로 구성해 사용하는 것은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희랍인은 이것 이외에도 문자 알파벳을 그대로 숫자로 삼았다.
아라비아 숫자 이외에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숫자로 로마자가 있다. 이것은 5진법과 10진법이 혼합되어 쓰이고 있다(그림7).
없는 것이 있다?
우리는 여태까지 여러 나라의 숫자에 대해 알아 보았다. 이들에게서의 공통점은 첫째 0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수가 많아질수록 새로운 숫자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두고 고대 인도의 그리슈너는 "수는 무한히 있는데 아무리 숫자를 발명해도 한이 없다. 그래서 부라흐마신(神)은 1부터 9의 숫자를 창안해 모든 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미 이 무렵에는 0의 기호는 없어도 빈자리를 만들어 0을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셋째는 덧셈 뺄셈…등의 사칙연산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이다. 중세유럽에서는 151×231 정도만 계산할 수 있어도 대학자로 대우받았다.
넷째로 0의 기호가 없기 때문에 큰 수를 나타낼 때 새로운 수사가 필요했고, 0이 생긴 이후에는 마음대로 큰 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큰 숫자를 만들어가도 0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는 물건에 대응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이기 때문이다. 0마리의 고기를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것에만 대응하는 수를 생각하는 한 0은 등장하지 않는다. 없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수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될 때는 '없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이 긍정되는, 철학(신념)이 전제될 때다.
안도 철학(불교)에, 모든 것의 본질은 '공'(空)이라는 명제가 있다. 인도인은 0을 숫자라고 주장하고 최초로 기호화 했다. 문헌상으로도 인도의 수학자 아리아버다(Aryabhata 456-530)의 책에 0자 10진법의 산용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국민학생도 다 아는 1,2,3,…9,0의 10개의 숫자만 있으면, 아무리 큰 숫자도 나타낼 수 있고, 사칙계산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공기의 존재처럼 당연스럽게 여겨져 0이라는 수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0이라는 수를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역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인간이 0을 만났을 때 문명을 비약시킬 수 있었다. 0의 발견이 늦은 또 하나의 이유는 0은 다른 수와는 달리 다음과 같은 기묘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a+0=a
a×0=0
또 어떤 수도 0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컴퓨터 혁명시대라 말한다. 컴퓨터는 0과 1의 두개의 숫자만으로 된, 2진법의 수체계에 의해 조작돼 있다.
앞서 두마리의 새와 두개의 돌에서 2를 추상화한 일이 인류문명 사상 위대한 이정표임을 말했다. 더욱이 0과 1을 Yes와 No로 대응시킨 일은 새로운 문명 단계로의 비약이 아닐 수 없다.
{Yes,No} ←→{ 음,양} ←→ {유,무} ←→{on,off} 등의 대응이 모두 {0,1}로 추상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적분학과 2진법의 발명자인 라이프니츠(Leibniz)는 중국에 음양론이 있음을 알고 크게 감명받았다. 음양론이 곧 2진법이기 때문이며 그로부터 신의 존재 유무의 논리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로마 황제에게 중국 황제를 기독교로 개종시킬 것을 건의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