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는 생명을 걸고 벌이는 한판승부다. 생과 사, 두가지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전사는 당연히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와 무기를 동원한다. 당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활용되고, 불리한 여건에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전략·전술이 등장한다. 이때 대형을 짜고 공격 방식을 결정하는 진법(陣法)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가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최고의 군사전략가들이 펼친 전투진의 세계를 살펴보자.
서양 전투진의 변천 사각형에서 일직선으로
1. 고대의 전투는 보병의 정면 싸움이었다. 밀리지 않고 진군하는 보병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는가가 승패의 관건이다. 가장 강력한 전투진은 빽빽한 밀집대형으로 이뤄진 사각형의 방진(方陣)이다.
2. 전투 경험이 늘어나고 각종 무기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전투진도 유연해져야 했다. 정면 충돌보다 우회해 후방을 공격하는 전술이 등장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방진이 여러 단위로 나눠질 필요가 있었다. 각 단위는 기능에 따라 중무장한 보병, 포병, 기마병 등으로 역할이 분담됐다.
3. 화약이 소총과 대포에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몸을 부대끼며 싸우는 근접전은 점차 사라져갔다. 화력으로 먼저 적을 초토화시키고 나머지를 보병이 ‘처리’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전투진은 싸움 초기에 방진을 펼치다가 싸움 후반기에 들어서면 일렬로 선을 형성하며 전진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대에 들어 첨단 화기가 대거 등장하면서 전투진의 형태는 다양하게 변화한다. 사각형이나 일직선처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진은 사라져갔다. 1차대전에서 대륙의 끝과 끝을 이으며 아군과 적군이 대치한 군인들의 긴 행렬이 전통적인 전투진의 마지막 형태인 듯하다.
전설과 문화 속에 남은 동양 전투진
동양의 전투진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각종 옛날 병서에 전투진의 모습이 소개되긴 하지만, 어떤 전투에서 어덯게 활용됐는지는 물론 과연 실제로 전투에 쓰였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대신 동양의 전투진은 전설이나 문화 형태로 남아있다. 다소 과장스러워보이는 신출귀몰한 진법이 말에서 말로, 또 글에서 글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종묘제례악과 같은 전통문화 속에 전투진이 재현되고 있을 따름이다.
마라톤의 기원 스포츠 정신으로 승화된 병사의 넋
현재 올림픽 경기에 등장하는 마라톤(marathon)은 바로 마라톤전투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을 때 한 병사가 승전보를 알릭 위해 아테네까지 쉬지않고 달려가 "우리가이겼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숨졌다. 이 병사의 넉을 기리기 위해 마라톤 경기는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됐고, 마라톤 지역으로부터 아테네의 올림픽 경기장까지 달리는 코스가 마련됐다. 다시 거리는 약40km. 현재 채택되고 있는42.195km는 제4회 런던대회에서 원저궁전으로부터 경기장까지의 거리를 공식화시키면서 정해졌다.
중과부적 극복한 우회 공격, 마라톤 전쟁
고대에 대규모의 군사가 동원되고 조직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그리스 번성기에 시작됐다. 당시 동방에서 통일제국을 꿈꾸던 페르시아는 3차례에 걸쳐 그리스를 침공한다(기원전 492-479). 페르시아의 두번째 공격(기원전 490)에서 그리스군이 크게 승리한 마라톤 평원의 결투는 ‘방진’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전투 사례다.
그리스의 전통적인 군단(팔랑스, phalanx)은 옆사람과 뒷사람 간 간격 차이가 거의 없는 직사각형이었다. 방패로 옆사람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빽빽한 대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정면에서 볼 때 옆으로 약 1천명, 뒤로 8-12명의 열을 이룬 보병이 동원됐다. 주요 무기는 창(3.6m)과 칼. 1만여명의 군사가 한번에 돌진하는 형태였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가장 중요한 승리요건은 보병의 수였다. 2차 침입 때 페르시아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1만5천명 대 1만1천명의 대결이었다. 특히 페르시아군은 정면충돌에 강하다고 소문난 군대였다. 따라서 그리스군에게 색다른 전술이 필요했다.
그리스군은 폭을 얇게 만들면서 대형의 길이를 충분히 늘였다. 그리고 양쪽에 별도로 공격부대를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최정예로 구성된 페르시아군이 정면을 거세게 밀어부칠 때 양쪽에 포진해 있던 보병부대가 페르시아군을 자연스럽게 포위해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다. 싸움은 그리스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군 사상자 6천4백명, 그리스군 1백92명.
알렉산더 대왕의 ‘망치와 모루’ 전술 이수스 전쟁
대규모 전투가 반복되면서 방진을 다양하게 응용하는 것이 전쟁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인식이 깊어졌다. 방진을 유연하게 활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동력’이었다. 신속함을 위해 사람 사이의 간격이 좀더 넓어야 했고 군사의 종류도 기능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돼야 했다. 이를 실현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다.
기원전 334년 22세의 나이로 페르시아 정복에 나선 알렉산더대왕은 1년 후 이수스 지역에서 페르시아군을 대파한다. 당시 알렉산더 군대가 취한 병법은 ‘망치와 모루’ 전술. 적을 모루 위에 얹어놓고 망치로 후방을 친다는 개념에서 유래한 말이다.
모루에 해당하는 군사는 중(重)보병과 경(輕)보병이었다. 중보병은 적과 정면으로 승부하는 병사로서, 투구, 갑옷, 무릎 아래를 가리는 각반, 방패 등 몸을 보호하는 장비 일체로 중무장했다. 이들이 사용한 창은 마라톤 전투에 비해 긴 4.2m. 이에 비해 경보병은 싸움이 시작될 때 가죽으로 만든 투석무기로 돌을 던지거나 짧은 창을 직접 던져 적을 교란시킨 후 빠져나가는 요원들이다. 따라서 몸에 별다른 보호 장비가 필요없었다.
망치 역할은 기병이 맡았다. 보병이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진을 우회해 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기병의 역할이다.
한니발의 초승달 포위작전 칸나이 전쟁
기원전 2백16년 이탈리아 동남부의 칸나이 마을 부근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로마군의 한판 승부가 있었다(제2차 포에니전쟁). 카르타고군의 규모는 약 4만명의 보병과 1만명의 기병. 8만여명의 병력으로 이뤄진 로마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전투는 한니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한니발은 마라톤전투에서 사용된 전술을 이용했다. 중앙에 상대적으로 약한 병사를, 양측면에 최강의 보병과 기병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불행하게도 로마군은 정면충돌을 택했다. 중앙을 무력화시키면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중앙군이 뒤로 밀려감에 따라 로마군은 점차 초승달 모양으로 포위당하고 있었다. 양측면의 최강의 병사와 기병이 포위망을 좁히며 측면과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빽빽하게 밀린 로마군은 무기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했다. 로마군 생존자는 약 1만4천명. 카르타고군 사망자는 약 6천명.
보병에서 기병의 시대로 진법의 암흑기
고대 말 유럽 세력을 주도하던 로마가 멸망하면서 고대의 방진 형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대규모 군사 조직은 무너졌고, 적은 수로 이루어진 보병으로 방진을 펼쳐봐야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른바 진법의 암흑기였다. 이런 양상은 중세로 이어진다.
봉건주의 제도가 등장하면서 중세의 새로운 전투원으로 기사가 등장했다. 영주들이 지역 곳곳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이들을 제압할만한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던 상황에서 영주들의 영토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사는 영주에게 녹봉(토지)을 받고 대신 전장에 나가 다른 영주의 기사와 맞선다. 한번 출전하는데 계약 기간은 평균 40일 정도. 이 기간이 지나 계속 영주를 위해 싸우려면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 시기에 기사가 출현할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는 말에 탔을 때 사람의 발을 안정시키는 등자가 보급됐다는 점. 기사는 등자에 발을 낀 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긴 창을 지닌 채 출전할 수 있었다. 고대의 기병보다 훨씬 중무장한 병사가 탄생한 것이다. 당연히 보병은 2차 병력 정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먼 곳에서도 기사들의 금속 갑옷을 뚫을 수 있는 강력한 활이 등장했다. 한 예로 14세기 영국에서 활발히 사용된 장궁(長弓)을 들 수 있다. 궁수들은 소년 시절부터 길이가 1백80cm나 되는 활로 사격훈련을 받았다. 정확성과 파괴력 면에서 이전의 활과 비교될 수 없었다. 기사의 갑옷을 어렵지 않게 뚫었다. 팔의 힘을 빌지 않고 강력한 위세를 가진 석궁도 기사를 무력화시키는데 한몫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들의 갑옷은 점점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게가 문제였다. 기사가 40kg에 달하는 갑옷을 입고 출전할 때, 행동의 부자연스러움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특별히 기른 말의 수는 한정됐고, 전투에서 기사의 유용성은 점차 사라졌다. 보병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방진에서 일직선으로 스페인의 ‘쏘고 찌르기’ 작전
중세 기병들의 세력이 사라지면서 다시 보병을 중심으로 한 전투진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그러나 고대에 비해 진의 형태가 달라졌다. 화승총과 대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503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놓고 벌인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프랑스 군대의 주력은 창을 든 보병이었다. 이에 비해 스페인에는 화승총부대가 첨가됐다. 심지에 불을 붙여 화약을 발사하는 원시적인 형태였지만 위력이 대단했다. 전투진의 모습도 달랐다. 전투는 스페인의 대승으로 끝났다.
스페인이 사용한 새로운 진법은 사각형 창병의 네 귀퉁이에 가로 세로 각 25열 정도로 줄을 늘어선 화승총병을 별도로 배치한 것이었다. 제일 앞열은 일제사격을 가한 뒤 맨 뒤로 이동한다. 총을 재장전하는데 걸리는 몇십분 정도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때 다음 열들이 반복해서 일제사격을 가하고 뒤로 빠진다.
적의 대오가 흩어질 때쯤 중앙에 있던 창병이 진군하기 시작한다. 이때 사각형의 진은 일렬횡대로 바뀐다. 어깨를 맞대고 진군하는 창병은 이미 지리멸렬해진 상대를 휩쓸어버린다. 총으로 먼저 적을 무력화시키고 다음에 창으로 뒷마무리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작전을 ‘쏘고 찌르기’(shot and pike) 작전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용된 진법은 1세기동안 유럽 전투에 많이 사용됐다.
한편 16세기 중엽부터 대포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역할은 화승총과 비슷했다. 전투 초기에 적의 기세를 꺽어버리는 것이었다. 1534년 스페인의 군단 구성을 보면, 화승총병과 창병이 절반씩 배치됐으며, 창병의 12분의 1 정도가 기병이었다. 한번 출정할 때 2백50명 단위인 12개 부대가 준비됐으며, 30m 마다 포 한문씩이 배치됐다.
직선, 역삼각형, 그리고 다양성 1·2차 세계대전
18세기 말 기관총의 초기 형태가 등장하고 이후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자동발사 소총이 나타나면서 일직선 대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재장전하는 시간이 거의 필요없게 된 이상 상대방에게 눈에 띄는 것 자체가 곧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숨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다 1차대전 중 새로운 일직선 대형이 등장했다. 하지만 길이가 달랐다. 이전의 직선 대형은 길어야 수백m 정도였다. 이번에는 수십에서 수백km의 장거리 대형이 등장했다.
이 전투의 특징 중 하나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각국별로 수만에서 수백만명의 인원이 전쟁에 투여됐다. 이 점을 이용해 보병이 일렬횡대로 전장을 잇는다는 ‘전선’(戰線) 개념이 등장했다. 대륙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양 진영이 팽팽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전투가 계속됐다.
하지만 탱크나 비행기와 같은 각종 첨단 무기, 그리고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위력적인 화기가 발달하면서 대규모 작전은 줄어들고 10명 내외의 분대나 소대 단위가 활약하기 시작했다. 전투진형은 점차 ‘기하학’적으로 일반화시키기 어렵도록 다양해졌다.
부대가 교전에서 패할 때 이를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 제기되면서 2차 대전에는 ‘예비부대’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됐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부대를 두군데 정도로 설정하고 후방에 이를 지원하는 부대를 배치한다는 개념이었다. 세 부대를 지도상에서 이으면 역삼각형 구조를 이루는 형태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사각형이나 일직선 형태의 진법은 사라졌다. 몰려 있으면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에 소규모의 부대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한나라 한신의 십면매복 하늘도 땅도 그물처럼 엮는다
소설 ‘초한지’에 따르면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결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유방의 맹장 한신이 항우군사에 대해 십면매복(十面埋伏)이라는 진을 펼쳤다고 한다. 유방이 항우를 구리산으로 유인하고 산 주변 10면 방향에 각각 10만명 정도의 군사를 매복시킨 것이다.
이런 진의 형태를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 한다. 하늘도 땅도 그물처럼 엮어 포위했기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모습이라는 의미다.
항우의 군사는 대부분 사망했지만 항우 자신은 타고난 기력으로 이 천라지망을 뚫고 도망간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낙담한 항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양의 전투 시뮬레이션, 장기 항우와 유방 각축전 모방
장기는 약 4천년 전 인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한 설명에 따르면 불교도들이 마음 속의 파괴본능을 달래고 잡념을 없애는 수단으로 여겼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초나라와 한나라의 각축전을 본뜬 것이다. 차(車), 포(包), 상(象), 마(馬), 사(士), 졸(卒)이 고유의 움직임(행마법)을 통해 전진하거나 후퇴하며 상대편 왕을 공격하는 동시에 자신의 왕을 방어한다. 장기에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어떻게 포진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즉 장기는 진법을 어떻게 펼칠지를 시뮬레이션하는 효과를 제공한다.
체스는 6세기 정도에 동양으로부터 유래된 서양식 장기다. 왕(king), 왕비(queen), 장군(rook), 주교(bishop), 기사(knight), 졸로 구성된다. 행마법을 비롯한 게임의 규칙이 장기와 많이 다르며, 각 구성물이 실제 전투에 동원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세의 정치적 실권자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전투’의 관점에서 볼 때 장기에 비해 실전 감각이 덜 느껴진다.
제갈량이 펼친 생과 사의 갈림길, 8진법 삼국지에 전해지는 전설
소설'삼국지’에는 제갈량이 펼친 ‘8진’의 개념이 소개된다. 유비의 군사가 오나라 육손에게 쫓기는 장면이 등장하는 소설 말엽 부분에서 육손은 오래전 제갈량이 펼쳐놓은 돌무더기 진영에 들어선다. 80-90개의 돌무더기 사이로 발을 들여놓자 바람과 구름이 거세게 몰려들었다. 하늘과 땅이 캄캄해졌고, 돌더미들이 갑자기 삐죽삐죽 일어나기도 했다. 이때 홀연히 제갈량의 아버지가 나타나 육손의 군사를 진 바깥으로 인도한다.
제갈량은 돌무더기들의 8방향에 문(門)을 배치했다. 이 문들의 이름은 휴(休)·생(生)·상(傷)·두(杜)·경(景)·사(死)·경(驚)·개(開)였다. 이 중 생·경(景)·개로 가면 좋고, 상·경(驚)·휴로 들어가면 다치며, 두·사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한다. 육손의 군사는 사문으로 들어갔으며, 제갈량의 아버지는 이들을 생문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8가지 문의 종류는 동양의 전통문양인 ‘팔괘’(八卦)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8문 안의 돌무더기들이 어떤 원리에서 배치된 것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과연 이상한 자연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제갈량의 8진도 변화무쌍한 기의 흐름을 이용한 미로
바깥 문에 쓰여진 건·감·간·진·손·이·곤·태는 팔괘를 구성하는 요소들인데, 각각은 태양이나 불, 물, 구름 등의 기운을 한가지씩 나타낸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에 따르면 각 문이 이 기운을 바탕으로 서로 번갈아가며 변화를 부려 10만 대군이라 해도 잘못 들어서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림에서 파란 기둥과 빨간 기둥은 기(氣)를 뿜어내거나 빨아들이는 상대적인 개념을 의미하는데, ‘삼국지’에 등장한 돌무더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8문의 어느 한 곳으로 들어서면 각 돌무더기들의 기가 변화를 일으키면서 구름이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등 기현상이 벌어진다. 이 8진이 실제로 전투에 사용됐는지는 불분명하다.
학 날개모양으로 왜군 격파 한산대첩 거북선의 위용
임진왜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한산 앞바다에서 왜군을 대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펼쳐진 진법이 해전사에 길이 남는 ‘학익진’(鶴翼陣). 우리 해선이 일본배들을 포위해 공격하는 모습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선 등 부위의 철갑이 아주 단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배에서 커다란 갈고랑쇠로 등을 찍은 뒤 다른 쪽 끝에 무거운 추를 달면 거북선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 거북선의 강점은 높이가 낮아 근접했을 때 다른 배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과 이 틈을 노려 대포로 배의 옆부위를 파괴시켜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거북선을 눈에 안띈다는 뜻에서 ‘맹선’(盲船)이라 불렀다.
1592년 7월 수십척의 일본배가 한산 앞바다에 도달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앞 부위의 끝은 뾰족하고 뒤는 양 옆으로 갈라지는 진을 짰다. 그 가운데에는 거북선이 배치돼 있었다. 일본배에서는 거북선이 일반 해선에 가려 안보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진의 앞이 열리고 거북선이 일본배 사이로 재빨리 진군한다. ‘충격부대’로 나서 적을 혼란시키는 형상이다. 이때 우리의 일반 해선이 횡대로 늘어서며 적을 공격,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 모습이 바로 학이 날개를 펴며 나는 양상이었다.
전통문화에 담긴 조선 전투진 종묘제례악의 오위진법
조선 문종 1년(1451년) 수양대군을 비롯한 문무대신들이 정리한 ‘오위진법’(五位陣法)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대표적인 전투진이다. 여기서 오위란 동서남북 4방위와 중앙을 가리킨다. 오위진은 전투의 종류에 따라 5가지 기본 형태를 가진다. 그러나 이 진법이 실제로 전투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오위진의 형태가 우리의 전통 무형문화재 1호인 종묘제례악에 담겨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종묘제례란 조선의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예를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크게 음악과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오위진이 발견되는 부분은 바로 ‘일무’(佾舞)라 불리는 춤이다. 일(佾)은 ‘춤을 추려고 벌인 줄’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유래된 일무는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문무(文舞)와 무덕(武德)을 칭송하는 무무(武舞)로 구분된다. 오위진은 무무가 시작되면서 등장한다. 가로 세로로 8열씩 64명으로 무리지어 있던 사람들이 오위진의 5가지 형태를 만들면서 춤을 변화시켜 나간다. 춤은 원래의 문무 대형으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일무가 궁중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 시대였다. 외국 사절이 오거나 즐거운 연회가 벌어질 때 일무가 소개되곤 했다. 조선 왕조가 문(文)과 무(武)를 많이 쌓았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였으며, 그결과 나라가 많이 번성했음을 과시하는 표현 방법이었다. 그러다 세조에 이르면 조상을 모시는 제례에만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매년 5월 첫번째 일요일이면 종묘에서 일무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