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던 경부고속전철 사업의 차량형식이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로 결정됐다. '프랑스의 자존심'이란 별명이 붙은 TGV의 면면을 살펴본다.
한국의 고속전철 사업을 두고 벌인 신판 '독불 전쟁'의 승자는 프랑스로 판가름났다. 정부는 지난 8월20일 국책사업인 경부고속철도 차량 형식 계약의 우선 협상 대상자로 프랑스의 TGV(테제베)를 선정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동안 경부 고속전철 사업은 고속전철을 가동하고 있는 세 나라, 즉 프랑스 GEC 알스톰사의 TGV와 독일 지멘스사의 ICE, 일본 미쓰비시의 신칸센(新幹線)이 치열한 경합을 벌여왔다.
정부는 89년 7월 경부고속철도의 기술조사 및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지난 91년 8월 차종 선정을 위한 입찰제의 요청서(RFP)를 세 나라에 발송한 후 그동안 이들이 제출한 서류를 심사해 올 6월 신칸센(新幹線)을 '기술만족수준 미달'로 탈락시킨 바 있다.
이번에 TGV가 선정된 데 대해 교통부는 "경제성 금융조건 계약조건 운영경험 및 사업 일정 등에서 TGV가 독일의 ICE에 비해 높게 평가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평가분야 3백2개 항목중 TGV가 1백43개 항목에서, ICE가 1백5개 항목에서 우세했으며 동점은 54개 항목이었다 평가된 각 항목의 세부적인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도입 열차의 기술적 평가보다는 가격과 제의조건 등이 선정의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전언이다.
여하간 이번 선정으로 TGV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스페인, 미국 텍사스, 파리―브뤼셀―퀠른―암스테르담의 유럽 통합철도망, 런던―파리를 잇는 해저터널노선에 이어 한국의 경부선까지 차지해 고속전철 국제 입찰 100% 수주에 성공했다.
한편 경부고속전철은 지난해 6월 시험구간 인천안―대전 간 공사가 이미 착공됐으며 이 구간을 98년부터 운행한 후 2000년에는 서울―대전 간, 2002년에는 서울―부산 간을 2시간에 달리게 된다 이 철도가 완공되면 지난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열린 국민 생활권의 변화만큼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TGV를 납품할 GEC 알스톰사는 지난 1966년 우리나라에 진출해 그동안 지하철 철도 사업 뿐만 아니라 에너지 사업에 참여했던 회사다.
기존 선로에서도 고속주행 가능
만약 이번 선정이 여타의 조건은 무시하고 속도만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TGV는 다른 기종과 접전을 벌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운행되고 있는 TGV는 최고 시속 5백15.3㎞, 상용 운행속도 3백㎞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열차다. 게다가 현재의 선두자리를 지키기 위해 TGV측은 1990년부터 6백50억원을 투입해 시속 3백50㎞의 차세대 TGV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TGV 란 프랑스어 Train Grande Vitesse의 앞 글자를 따 붙인 이름으로 영어로는 train with high speed, 즉 고속열차란 뜻이다.
프랑스 국철(SNCF)은 1950년대부터 초고속 전철에 관심을 갖고 이미 1955년과 72년에 시험용 고속전철을 제작하는 등 상당한 기술을 축적해 놓은 상태였다. 상업용 고속전철이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 1981년. 이때 등장한 TGV 동남선(TGV-PSE)은 파리一리옹 간 4백30㎞를 멈춤없이 시속 2백70㎞로 2시간만에 달렸다.
1세대 TGV로 불리는 TGV 동남선은 8개의 객차와 2개의 기관차로 구성된 길이 2백m의 관절형 열차다. 관절형 열차란 보기(bogie)가 객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부분에 설치된 형식의 것으로, 신칸센이나 ICE는 한 객차당 두개의 보기가 설치돼 있으나 TGV는 앞 뒤 연결 부분에 반개씩 한 개가 설치됐다 즉 이 열차에는 최고의 속도에서도 기차가 안전을 유지하도록 두대의 견인엔진이 차체에 달려 있어 2t에 달하는 대차(臺車)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고 궤도에서의 마모와 소음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TGV의 고속 질주 비결은 차량 1대의 중량이 가볍기도 하거니와(차축하중 17t) 동력이 1t당 16.6㎾로 강력하다는데 있다. 또 언덕을 오르는 등판 능력은 3.5% (1천m당 35m)로 심한 경사를 오를 수 있어 힘든 경사를 피하지 않아도 되므로 노반공사 비용을 줄이는 이점이 있다.
이외에도 차체 버팀장치를 보기 위의 차체 사이에 설치해 신축계수를 낮출 수 있기 때문에, 고속 전철용 철로가 아닌 재래선에서도 비록 속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고속 주행이 가능하다(과학동아 89년 5월호 참조). 알스톰사는 이같은 TGV의 기존선로와의 호환성을 경쟁상대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특성이라고 자랑해왔다.
한편 역에 정차하려면 적어도 8㎞의 제동거리가 필요한 고속열차이다 보니 달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서는 장치다. TGV에는 초고속에서 사용되는 가감저항 제동장치, 시속 1백60㎞ 이하에서 사용되는 전기 압착공기식 조정의 고압 제동장치, 각 대차 엔진에 부착된 고정 제동장치 등 3가지가 연속 자동제어의 통제로 기능해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
동남선이 운행을 시작한 지 8년 후인 1989년 제2세대 TGV로 불리는 TGV 아틀란틱호가 파리―르망 노선에 투입됐다. 푸른색과 은회색의 이 열차에 '제2세대'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만큼 동남선에 비해 성능 향상이 이루어졌기 때문. 본격적으로 TGV가 프랑스 바깥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아틀란틱호의 개발과 함께였다.
아틀란틱호는 동력원으로 SCS(SeIf Commutating Synchronous) 엔진을 채택해 더욱 강력해졌고 모든 장치를 네개의 대차엔진에 집결해 유지비를 절약하도록 했다. 또 한 터널 통과시의 압력과 소음방지 시설, 제동장치 등도 대폭 개선됐다. 한 편성의 열차는 10량의 객차와 앞 뒤 두대의 전기 기관차로 이루어졌으며 대차부분은 동남선과 같은 관절형이다. 열차에는 최첨단 정보시스템이 부착돼 핵심장치가 모두 자동으로 제어된다. 최대 수송 능력은 9백70명.
우리나라에 세번에 나누어 46편성이 도입될 열차(97년까지 시험용 2편성, 99년까지 12편성, 2001년까지 국산화율 50% 이상으로 32편성)가 바로 이 기종으로, 터널 내 중압에 대한 보호 장치와 자동 전환 동기식 모터의 트랜스미션이 붙을 예정이다. 사용 최대 전력은 1만3천2백㎾.
이들 두 모델 외에도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현재 운행되거나 운행 예정인 TGV는 스페인의 AVE, 영불 해저 터널을 통과하는 파리 런던노선의 유로스타, 유럽 통합노선의 PBKA가 있으며 이들은 주문 지역에 적합한 형태로 기능을 보완하고 있다.
아쉬움 큰 '단군 이래 최대 공사'
고속전철은 크게 차량 카티너리(catenary) 장치와 ATC(열차자동제어장치)로 나뉜다. 카티너리는 전기선 등 전철에 전원을 공급하는 부분이고 ATC는 중앙 통제부(CTC)와 차량을 연결하는 부분으로 자동으로 차량의 속도를 조절해 배차간격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 공급될 카티너리 장치는 TGV 북유럽선에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2X25kV -60㎐다. 이는 교차점의 넓이가 1백50㎟인 접촉 전선, 교차점의 치수가 65㎜인 구리 케이블 등으로 구성된다. 이 장치는 영하 35℃부터 영상 40℃의 기온에서 기계장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함으로써 고속운행을 가능하게 한다.
경부 고속전철을 3분 간격으로 운행되도록 조절하는 ATC 역시 TGV 북유럽노선에서 사용하고 있는 TVM430 시스템과 유사하다. 이 시스템이 달린 기관실에는 매 순간마다 최고 허용 운행 속도를 알려주는 장치가 있으며 허용 속도를 넘어설 경우 자동적으로 적정 수준으로 감속시킨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TGV가 '첨단 철도공학의 집결체'라 불릴만큼 놀라울 성능을 가진 열차이긴 하지만 약점도 없진 않다. 먼저 운행 중 고장이 났을 때 응급조치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첨단'부품으로 만든 기계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알스톰사는 자사의 TGV가 지난 12년간 한번도 인명사고를 내지 않은 것을 내세우며 열차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객 운송을 목적으로 세운 고속철도에서의 돌연한 고장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함께 여객좌석의 협소함도 단점으로 지적된다.
여하간 이번 발표로 애초 계획이 발표되고 나서 그동안 제기됐던 고속전철 무용론, 자기 부상식과 바퀴식간의 성능론, 국산화 가능론 등 고속전철과 관련된 모든 논쟁은 일단 끝났다. 모두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빠른 것이 최선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단군이래 최대 역사(役事)'를 국내 기술에 의해 우리 힘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국내 업계에서는 "꼭 시속 3백㎞가 넘어야만 고속인가"라며 국내기술로도 시속 2백70㎞는 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사업에 소요될 비용은 현재 금액을 기준으로 10조여원. 이중 전동차값만도 1조2천억원에 달한다. TGV측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기술을 이전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만큼 이 막대한 비용은 결국 우리의 기술력을 배가하는 기회비용으로 작용해야 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