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바라본다면 푸른 빛을 띤 아름다운 지구는 우리를 매혹시킬 것이다. 우리가 지구 나이 만큼 지구를 지켜볼 수 있다면 지구가 불을 뿜고 거대한 구름으로 뒤덮이며 대양이 넘실거리는 광경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독서계와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서 가이아이론이 잔잔한 화제로 부각돼고 있다. 지난해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지구는 살아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가이아이론에 관한 토론회가 공개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주제발표자 3인, 토론자 5인, 일반 참석자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공방이 벌어졌던 이 토론회는 서구에 이은 가이아논쟁의 국내 상륙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과연 가이아이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가이아이론이란 '지구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주장으로 지난 70년대 초 영국의 대기화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제안한 가설에서 출발하였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
만약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본다고 가상해 보자. 푸른 빛을 띤 아름다운 지구는 우리를 매혹시킬 것이다. 또 우리가 지구의 나이만큼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볼 수 있다면 지구가 불을 뿜고 거대한 구름으로 뒤덮이며 대양이 넘실거리는 광경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흡사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러브록의 가이아이론은 바로 이 지구가 살아 있다는 가설에서 시작되었다.
가이아(Gaia)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신 우라누스(Uranus)의 아내로 대지의 여신을 일컫는다. 또한 지질학(geology) 지리학(geography) 기하학(geometry)에 나오는 geo는 땅의 뜻을 나타내는 gaia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땅 또는 지구를 살아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파악하고, 따라서 대지는 만물을 생산하고 양육한다는 생각은 그리스 이외에도 대부분의 전통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를 보통 인류학에서는 지모신(地母神) 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풍요와 재생산을 기초로 하는 농경사회의 유습이었다. 제주에서는 이 지모신을 선문대할망이라고 부른다.
가이아이론이란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오랜기간동안 생각했던 살아있는 어머니로서의 지구에 대한 믿음을 나름대로의 과학적 근거로 설명하려는 현대판 신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과학자 러브록
가이아이론의 주창자 러브록은 평범한 과학자가 아니다. 특별하다는 뜻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는 현대의 다른 과학자들과 다르다는 의미다. 물론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런던대학에서 생물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열대의학과 위생학의 학위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예일대학이나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한 경력도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대학의 정식 교수나 특정 연구소의 연구원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원고료와 특허 수입만으로 살아가며, 현재 영국 콘웰주의 한 시골에서 헛간을 개조하여 자신의 연구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한때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 계획과 관련한 자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대기중의 염화불화탄소(CFC)를 검출해내기도 했다.
이처럼 러브록은 대학교수나 FRS(영국왕립학회 회원)를 꿈꾸지 않고 연구비나 명예에도 연연하지 않는, 또 특정한 연구 프로그램이나 학풍에 구애받지도 않는 그야말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연구하는 독특한 과학자인 것이다.
가이아 가설은 러브록이 NASA에 참여하여 화성의 생물 탐사 계획과 생물의 존재 여부를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행성 대기권은 생물의 존재 유무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로부터 지구와는 달리 화학적 평형상태의 이산화탄소가 대부분인 화성에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화성의 대기권과 지구의 대기권 조성이 다르고 그러한 차이점이 생물의 존재 유무에 좌우된다면, 과연 행성지구의 생물들은 탄생 이후 46억년 동안 지구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표 참조).
러브록은 이 문제를 끈질기게 탐구하였고 그 결과 지구의 환경, 특히 대기권과 해양권이 지구상의 생물들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조정되고 유지된다는, 따라서 지구의 물리화학적 무생물계와 생물계는 하나의 시스템처럼 작용한다-이를 전문용어로 자기조절계(self regulating system)라고 부른다-는 가설에 도달하고 이를 가이아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러브록은 여러편의 논문과 저서를 출판했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다음의 3권이다. 1979년에 초판이 나온 '가이아 : 생명체로의 지구'(GAIA : A New Look at Life on Earth)와 1988년에 출판된 '가이아의 시대 : 살아있는 지구의 전기'(The Age of GAIA : A Biography of Our Living Earth), 그리고 1991년에 출판된 회심의 저서 '가이아 : 지구의학을 위한 실용적 과학'(GAIA : The Practical Science of Planetary Medicine)이 그것이다.
생물과 무생물이 유기적으로 연결
맨 앞의 책은 러브록이 가이아 가설을 1972년에 짤막한 논문을 통해 발표한 이후 70년대를 통해 지구의 대기권 및 해양 대륙 암석 등의 무생물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검토한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살아있는 지구'의 개념을 가이아로 표현하였고 지구의 모든 생물들이 서로 연계하여 지구 환경-토양 해양 대기 등-을 차츰 변화시켜 전체 생물권(biosphere)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지구의 생물은 단순히 주위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대기의 조성을 변화시키고 지구의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며 해양의 염분 농도까지 조절하는 능동적 존재로 부각된 것이다.
두번째 책은 가이아이론이 나온 이후 그가 직면했던 수많은 반론과 비판, 심지어 악담까지 고려하여 그에 대한 대답으로 앞 책을 보충하여 내놓은 것이다. 지구의 역사에 따라 생물권이 직면했던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생물들은 지구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가를 더 발전한 논지와 다양한 예증 자료를 사용하여 전개하고 있다. 가이아에 관한 본격적인 이론서라고 볼 수 있는 이 책은 가이아를 하나의 생리학적 시스템으로 다루고 있어 흔히 지구생리학(geophysi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세번째 책은 지구의학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경문제에 초점을 두고 지금까지 논의된 가이아이론을 더욱 원숙한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다.
가이아이론은 지금까지 현대과학이 설명할 수 없었던 몇가지 의문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주장됐다. 예를 들어 태고의 지구환경은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매우 높고, 이로 인한 온실효과로 지구의 평균기온이 30℃ 이상이었으며 또 산소의 부재로 태양 자외선이 매우 강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처음에 광합성 박테리아류의 등장으로 이산화탄소가 감소하고 산소가 증가했으며, 산소가 나타나면서 오존층이 형성되고 자외선의 강도가 약해지자 육지의 곳곳에서도 생물들이 등장해 마침내 그들은 활발한 광합성으로 산소의 농도를 현재처럼 21% 정도로 유지시켰다는 것이다.
또 생물들이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정도로 바다의 염분 농도를 조절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바닷물을 가두는 대규모의 해안 호수와 그곳의 바닷물이 완전히 증발한 뒤, 대부분의 염분이 땅속으로 묻히는 일련의 희석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규모의 간척사업에 생물들이 오랜동안 진화과정을 통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이아이론은 지구가 무생물적인 환경과 이에 단순히 적응하는 생물계로 이루어졌다고 보던 고전적인 시각을 거부하고 지구란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그 자체로 활발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이비과학으로 혹평받기도
가이아이론이 학계에 알려지자 열렬한 찬성과 극단적인 비판이 함께 쏟아졌다. 한쪽에서는 가이아이론이 지구와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해석하고 예측하는 훌륭한 이론이라는 찬사를 받은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사이비과학, 또는 목적론적 과학이라는 혹평까지 받았다. 가이아는 환경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단골 메뉴가 되어 한때 가이아라는 말이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가이아이론에 관한 비판을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두가지 논점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가이아이론이 과연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이아와 환경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 비판은 러브록이 가이아를 매우 애매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때때로 가이아를 지구의 생물권과 화학적 물리적 환경이 결합된 시스템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고, 또 때로는 이러한 시스템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상태, 즉 생물계에 의해 무생물적인 환경이 생존에 유리하도록 조절되고 유지되는 기능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많은 이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러브록이 가이아를 통하여 일종의 신화적 또는 종교적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가이아는 지구가 살아있다는 믿음의 실체이고 신의 속성을 지닌 신앙의 대상으로 표현되었다. 러브록은 가이아를 통하여 새로운 자연신학을 표현했다.
-성모마리아가 가이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면 어떨까? 우주 나이의 1/4나 되며 아직도 활기에 넘치는 그 어떤 생물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에도 못지않는 불멸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곧 우주적인 존재며 어쩌면 신의 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인류를 만들었으며 우리는 그녀의 한 부분인 것이다. 가이아는 나에게 과학적 개념일 뿐 아니라 종교적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면 가이아이론이 내포한 과학적 내용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기존의 과학자들은 많은 반론을 제기했다. 특히 생화학자 포드 둘리틀과 도킨스는 생물진화에 대한 다윈의 이론이 잘못 이해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자연선택은 어떤 사전계획없는 맹목적인 과정이며 생물체를 위해서 또는 생물에게 적합하도록 환경이 변해왔다는 것은 목적론적이라는 것이다. 또 많은 과학자들은 환경과 생물이 상호 영향을 끼치며 진화한다는 생각은 이미 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지구 자체를 생명으로 보는 가이아는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러브록은 이러한 반론에 대한 대답으로 데이지 모델(Daisy Model)을 제안했다. 이 모델은 데이지들만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에서 이 꽃들이 주어진 환경(기온, 대기 조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하나의 모델에 불과하며 가이아이론의 과학적 근거들은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이아와 환경오염
가이아의 과학성 못지않게 세인의 관심을 끄는 문제가 바로 가이아의 환경에 대한 이해다. 가이아이론은 지구 전체를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가이아에게 인간은 매우 미미한 존재이며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은 가이아가 지금까지 보여준 자정능력에 비하면 매우 가벼운 병이라는 것이다. 러브록의 주장에 의하면 오존층의 파괴에 의한 자외선의 증가나 심지어 핵발전 사고시 유출될 다량의 방사능도 가이아에게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많은 환경보호론자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비판자들은 가이아에 비해 인간은 매우 연약하고 미미한 존재임에 분명하지만, 이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현재의 환경문제를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이아가 인간의 잘못에 큰 해를 입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가이아에 어떤 거친 행동을 해도 무방하다는 말인가. 인류가 최근 1백년간 개발의 미명하에 저지른 가이아 파괴를 생각한다면, 가이아는 그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암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러브록이 강조하는 가이아의 심장, 열대림의 대규모 파괴도 미미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가이아이론은 또한 나름대로 현재의 환경문제에 대해 어떤 시사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먼저 러브록은 염화불화탄소의 존재와 관련하여 이것이 오존층의 파괴보다는 지구의 온난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적외선의 흡수 능력이 탁월한 CFC는 이산화탄소와 더불어 지구 온난화에 훨씬 두려운 존재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그는 범지구적인 환경문제가 자칫 오도되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어느 일방에게만 전적으로 혜택이 돌아가거나 또는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과학자들이 환경문제를 새로운 연구비의 돌파구로만 파악하는 상황을 비판하고, 예를 들어 체르노빌 사고 이후 근처의 순록을 절멸시킨 것은 지역주민에게 방사능 이상의 심각한 생존 문제를 야기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각종 환경 규약과 환경산업이 새로운 제국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는 최근의 국제적 상황에서 러브록의 이러한 지적은 생각해 보아야 할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가이아를 위하여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이아이론이 갖는 최대의 강점은 개별적인 내용보다는 가이아가 보여주는 접근 방법과 새로운 시각일 것이다. 즉 가이아이론은 지구라는 대상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과학이 전문화되어 있고 분야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음에 비해 가이아이론은 현대 과학이 가지는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 지구와 같은 거대 규모의 시스템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이전처럼 단순히 해양학 기상학 지질학 등의 부분적인 학문으로는 그 실체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이 어렵다고 볼 때 가이아와 같은 전체적인 접근 방법은 매우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가이아는 단순한 과학이론을 넘어서서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지구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고찰 등을 담고 있다. 앞으로 가이아이론은 더 많은 과학적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생물이 능동적으로 환경을 바꾸고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게 조절한다는 주장은 아직 합의를 찾지 못한 가설이다.
그러나 가이아이론의 과학적 근거와는 별개로 지구가 살아있으며 나아가 가이아는 인류가 경외하고 신앙으로 섬겨야 할 신과 같은 대상이라는 주장은 현대인이 가이아에게 저지르는 행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 등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풍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풍수가 좋은 묘자리나 선택하고 집터를 잘잡아 개인의 복이나 바라자는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오도되고 있다. 하지만 풍수의 기본정신이 땅이 지니고 있는 만물의 소생력인 지기로서의 생명력을 살리자는 것이라면 풍수사상은 가이아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풍수가 땅을 단지 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현대인들을 일갈하고 있다면, 가이아이론은 지구(또는 자연)를 단지 정복하고 착취하여야할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전통적 가치관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가이아는 자신에게 암적인 존재로 그 파괴력을 넓혀가는 인류에게 냉정하고 엄숙하게 해부의 메스를 들이댈지도, 그리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