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우주가 ${10}^{-34}$초 동안 원래 크리의 ${10}^{28}$배로 팽창했다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불완전한 표준모델이었던 빅뱅우주론을 보다 완벽하게 성숙시켰다.
고대 이집트의 왕 토트메스 3세를 따라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군했던 병사들이 지상에서 '거꾸로' 흐르는 강을 처음 보고 크게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나일의 골짜기에서 태어나서 자란 그들이기에 이 세상(우주)의 모든 다른 강들이 나일강처럼 북쪽으로 흘러야한다는 믿음을 무작정 신봉한 결과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경험만을 기초로한 순박한 세계관(우주론)의 결말을 보게 된다.
이와는 달리 현대 우주론의 발전은 물리적 논리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고 이의 철저한 실험적 검증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간 자연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가 다루는 우주론의 대상은 좁은 나일의 골짜기를 벗어나, 1백억 광년 이상의 우주공관과 그 안에 있는 물질의 1백억~2백억년 간의 진화과정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많은 이론중 현재 학계에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우주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을 기초로 한 대폭발(Big Bang)이론이다. 이 이론은 1920년대에 학계에 등장한 이후, 그로부터 40년뒤, 이 이론이 예견했던 우주배경복사선(cosmic background)이 실험적으로 검증됨으로써 비로소 표준우주론으로 정착되었다.
10년간의 지적 전투
대폭발이론에 대한 개괄적 내용은 이미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대폭발이론에 대한 상세한 언급 대신 이 이론이 지니고 있었던 몇몇 물리적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주며 80년대 우주론의 총아로 등장한 인플레이션 이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1991년 과학평론으로 정평이 있는 미국유수의 일간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지는 표준우주론 속에 새로운 이론으로 등장한 인플레이션 이론을 다루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는 이 이론을 두고 미국 옛소련 그리고 영국 등 여러 국가들이 자국의 명예를 건 10년간의 '지적 전추'(intellectual battle)를 해왔다고 평했다.
이 전투의 승자는 아직 불확실하며 다만 전쟁터의 시체처럼 이미 죽은, 또는 치명적인 상처로 죽어가는 이론들이 눈에 뜨일뿐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1992년 현재 우주론을 다루는 주요 논문들에서 인플레이션 이론의 언급이 없는 논문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인플레이션 이론은 80년 이후의 우주론을 그 이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인플레이션 이론의 창시자는 현재 미국 MIT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알렌 구스 박사다. 1980년, 당시 MIT 대학의 젊은 연구원(박사후 과정)이었던 그가 제창한 이 혁명적 이론은 60년대 우주론의 최대 사건, 즉 예견되었던 우주배경복사선의 발견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지닌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처음 이론(the Old Inflation Theory)은 치명적인 모순을 내재한 것이었다.
이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전개되었고, 이듬해 구스의 이론이 갖는 모순점을 시정보완한 새로운 이론이 미국과 옛소련에서 거의 동시에(1주일 간격) 제창되었다. 이의 미국측 주자는 펜실베이니어 대학의 알브레히트와 스타인하트 박사고 옛소련측 주자는 천재로 알려진 린데박사다. 이 새이론은 구스 이론이 갖는 모순성을 피하면서도 그 이론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영국의 호킹 박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새이론이 예견하는 우주배경복사선의 형태가 현재 밤하늘에서 관측되는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 이러한 새모델의 검증상 실패를 보완하려고 린데는 개량된 이론(the Chaotic Inflation Theory)을 제창했으나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5년경부터는 이러한 새이론들은 '재미있는 실패작'(interesting failure)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1991년 필자와 스타인하트박사는 구스의 첫이론과 이후의 다른 이론들이 갖는 문제를 한꺼번에 극복해주는 새로운 이론을 발견해 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는, 학계에서 광역 초팽창이론(the Extended Inflation Theory)이라고 알려진 이 이론을 소개하면서 인플레이션 이론의 10년 고민을 쉽게 풀어주는 면에서 매우 획기적이나, 이를 위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일부 수정해야 하는 아주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이론이라고 적었다.
빅뱅에서의 상전이
그렇다면 이러한 화제의 대상이 된 인플레이션 이론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물질의 상전이(相轉移) 현상을 팽창우주이론에 적용시켰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팽창우주이론이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field equation)을 기초로 한 대폭발이론을 말하고 물질의 상전이 현상이란 물이 수증기로 변하거나 수증기가 물로 변하는 따위의 물성변화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온의 수증기는 온도가 낮아짐에 따라 물로 변하고 물 또한 더 낮은 온도에서 얼음으로 상전이를 한다(이런 과정에서 일정량의 에너지, 즉 잠열이 외부와 교환됨을 주목하자).
마찬가지로 팽창우주에서는 고온에서 하나로 융합되었던 자연계의 네가지 힘, 즉 중력 강력 전자기력 그리고 약력이 우주의 온도가 낮아짐에 따라 차례로 두개 세개 네개의 '구분' 가능한 힘들로 상전이를 말한다. 이 상전이의 결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앞에 말한 네개의 구분가능한 힘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수증기가 물로 변화할 때 잠열이 발생되듯 통일된 힘이 상전이를 통해 두개 세개 또는 네개의 다른 힘들로 부서져 나갈 때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발생된다. 이러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우주 도처에 발생될 때 이에 대한 우주의 '반응'은 공간의 초고속 팽창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중력에 이어 강력이 통일장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발생되는 에너지가 우주에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데, 이때 우주는 ${10}^{-34}$초 동안 원래 크기의 ${10}^{28}$배 이상으로 자란다(이는 50원짜리 동전을 ${10}^{-34}$초동안 1백억 광년 이상으로 키워주는 팽창이다).
70년 말 이래의 3대 난제
인플레이션 이론의 학문적 가치는 대폭발 이론에 내재돼 왔던 70년대 이래의 난제들을 한꺼번에 풀어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폭발이론의 난제 세가지를 먼저 소개하고 그들이 어떻게 인플레이션 이론을 통해 풀려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초기 우주의 편평성 문제(the flatness problem)
대폭발이론의 장방정식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현재의 우주가 '열린' 우주이거나 '닫힌' 우주이거나 상관없이, 과거 초기 우주의 모습은 거의 완벽한 '편평 우주에 다가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강력히 분리되는 대통일장 시기에 우주는 대략 ${10}^{-52}$의 오차 범위내에서 '편평' 우주가 된다. 이는 만약에 신(神)이 이 시기에 우주를 창조했다면 모든 물리상수들을 ${10}^{-52}$의 오차한계만 허용하는 '정밀성'(fine-tuning)을 갖고 작업을 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초기조건이다. 신이 과연 소금을 ${10}^{-52}$g 더 쳤다고해서 국의 맛이 확 변해버리는 그런 우주를 선호했을까?
우주 지평선문제(the horizon problem)
현재 관측가능한 우주의 크기는 대략 1백억 광년, 우주의 나이는 대략 1백~2백억년으로 추산된다. 이를 바탕으로 우주의 나이가 10만년 정도일 때에 현재 우주의 크기를 계산해 보면 대략 1천만광년 정도로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우주탄생 후 10만년간 달린 빛의 최대 주파거리는 10만광년보다 클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배경복사선은 방향에 상관없이 거의 같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빛이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서 발생한 이 복사선이 어떻게 마치 약속이나 한듯 같은 온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바로 우주 지평선문제다.
자기 단극자 문제(the monopole problem)
자기 단극자란 자석의 N극 또는 S극만 있는 반쪽자석을 말한다. 우주 상전이 현상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의 하나가 바로 이 자기단극자의 대량 발생이다. 물론 지금 이시간까지 지구상에서 실험관측된 자기 단극자는 한개도 없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양성자만큼이나 많이 존재해야 한다는 자기 단극자들이, 지금 어디로 어떻게 사라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바로 자기 단극자 문제다.
모두 해결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인플레이션 이론이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주어진 크기의 우주지평선은 원래 크기의 ${10}^{28}$배 이상으로 자란다. 여기서 우주지평선이란 주어진 우주나이에 빛이 주파할 수 있는, 즉 물질간 상호작용이 가능한 최대거리를 말한다. 이러한 대규모 팽창을 통해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은 곡선이 '편평'하게 퍼지는, 곡선의 직선화현상이다. 예를 들면 50원짜리 동전의 굽은 테두리가, 그동전이 지구만큼 커졌을 때는 수평선과 같은 직선으로 보이게 됨을 상기하자. 이것이 바로 인플레이션 이론이 제공하는 초기 '편평'우주에 대한 해답이다.
두번째 우주지평선 문제는 더 쉽게 풀린다. 인플레이션 이론에 따르면 현재 관측되는 우주란 인플레이션을 통하여 원래 크기의 ${10}^{28}$배로 자란 '한개'의 우주지평선 이내의 지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같은' 우주지평선 이내의 지역에서 발생된 우주배경복사선의 온도가 방향에 상관없이 거의 같은 온도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게 없다. 이로써 우주지평선 문제도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상전이를 통해 발생된 자기 단극자는 주어진 우주지평선 이내에 한개가 존재할 수 있음을 상기하자. 그러므로 현재 관측가능한 우주내에는(원래 한개의 우주지평선이 ${10}^{28}$배로 자란 지역) 기껏해야 한개의 자기 단극자가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1백억광년 크기의 우주에 한개밖에 없는 자기 단극자를 지금 지구상의 조그만 실험실에서 포착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이것이 '사라진' 자기 단극자들의 행방에 대한 인플레이션 이론의 설명이다.
반지름 1백억광년 크기의 가속기
이상 우리는 인플레이션 이론의 간략한 역사와 내용을 두루 알아보았다. 또한 이 이론의 배경과 제창동기,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대폭발이론의 중심구조로 인식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92년 현재 우주론의 큰 흐름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현대 우주론의 가장 큰 흐름은 초기 우주에서(인플레이션을 통해) 발생된 물질의 미세한 섭동이 지난 1백~2백억년간 어떻게 현재의 은하, 또는 대 은하군으로 진화되었는가에 대한 연구활동이다.
이에 버금가는 또다른 연구 줄기는 망원경을 통해 관측된 물질(빛을 발하는 물질) 또는 빛을 발하지 않는 암흑물질(dark matter)들의 공간적 분포가 얼마만큼 인플레이션 이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다. 이를 위해선 대규모의 대형컴퓨터 이용시간과 다량의 망원경 이용시간이 요구되므로 이들에 대한 연구는 구미의 몇몇 연구기관이나 대학교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끝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85년 이후 급발전해온 입자 우주론이다. 인플레이션이론은 고전기하학에 바탕을 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입자물리학 통일장이론을 우주론을 통해 자연스레 접목시키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장방정식에는 특수상대론의 대표상수 C(광속), 일반상대론의 대표상수 G(증폭상수), 그리고 양자론의 플랑크상수 h가 나란히 들어있다. 따라서 새로 발견되는 입자물리학의 여러 이론들을 우주론을 통해서 검증해보려는 노력이 세계 각국에서 일고있다. 예를 들면 강력과 전자기력으로 융합하려는 대통일이론을 실험검증하자면 최소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외계 항성, 알파-프록시마(α-Proxima)에 이르는, 약4광년 크기의 가속기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괴물같은 가속기를 제작하려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입자 우주론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우주 자체를 반지름 1백억 광년 크기의 가속기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특기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