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소설의 중심무대가 된 지리산은 지형이 험하고 계곡이 깊은 만큼 다채로운 식물상을 간직하고 있다.
■ 첫째날
남한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국립공원 지리산의 식생을 조사할 제11회 자연생태계 학습탐사팀을 태운 버스가 서울 여의도 동아일보사 별관 앞에서 오전 9시 30분에 시동을 걸었다. 예정시간보다 오히려 30분 앞당겨진 출발이었는데 여기서도 탐사단원들의 열의를 엿볼 수 있다. 차내에서 서로 얼굴을 익히고, 지도를 펴서 탐사지역을 확인했으며, 식물도감을 꺼내 지리산에 분포하는 식물들을 눈여겨 두었다.
탐사지도교수인 이창복 서울대 명예교수(식물분류학, 73세)가 제안을 해서 전북 전주시 외곽에 위치한 도로공사 수목원을 잠시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1천여종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비슷한 종들끼리 한데 심어져 있어서 일목요연하게 관찰하기가 용이 했다. 본격적인 탐사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예비지식을 습득하는데 수목원은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저녁 5시가 다 돼서야 구례 화엄사에 도착 했다. 잠시 도량을 훑어 본 뒤 탐사팀은 숙소가 마련된 구례군을 향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지도교수의 '강의'가 이어졌다. 이런 식의 토막식 강의는 탐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됐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는 것이 참가교사들의 이구동성. 이날 강의는 식물표본 제작시의 주의사항 세가지로 축약됐다. 식물표본의 일련번호를 매기고, 채집자의 이름을 명기하며, 채집날짜를 반드시 기록해두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 둘째날
아침 일찍부터 본격적인 탐사가 이뤄졌다. 이날 지리산의 날씨는 탐사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약간 구름이 끼어 햇볕을 가려주었기 때문에 발한량도 비교적 적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천은사. 완개서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완개서나무는 발견할 수 없었고, 그 나무가 서 있었던 자리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이어서 늙은 시어머니를 연상시킨다는 노고단(1천5백6m)에 올랐다. 매우 느린 속도로 등산하면서 길 주변에 서식하는 식물들을 채집하고 살폈다. 버스를 타고 정상근처까지 간 뒤 등정을 했기때문에 노고단까지 올라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은 사정이 달랐다.
지리산국립공원 관리소의 배려로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을 하산로로 택할 수 있었다. 노고단에서 피아골산장에 이르는 계곡은 산악휴식년제에 의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으나 탐사단에게만 특별히 통과를 허용 한 것. 하산로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탓인지 매우 깨끗한 상태였으나 이끼가 많이 끼어 발내딛기가 조심스러웠다.
저녁 7시 쯤이 돼서야 구례군 숙박장소에 도달했다. 이날의 수확은 지리산에서 서식하는 국내특산식물 50종중 18종을 발견한 것.
■ 셋째날
밤새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비는 연신 내려 과연 오늘의 탐사가 예정대로 이뤄질지 의문시되었다. 다행히도 노고단 주차장까지 버스로 올라가는 도중 빗방울이 거의 멈추었다. 불과 5m 앞도 안보일 정도로 깊게 낀 안개 사이로 탐사단은 행군을 계속했다. 목표는 반야봉(1천7백52m). 정상을 2,3㎞ 앞두고 비가 다시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70대의 노 교수가 이끄는 탐사팀은 '고집스럽게' 정상 만을 향했다. 열매가 땅쪽을 향하고 잎이 정반대로 벌려져 있는 가문비나무를 반야봉에서 찾아낸다는 일념 하에. 결국 가문비나무는 전문가(지도교수)의 눈에 띄었다. 지리산의 특산식물중 하나인 가문비나무는 열매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구상나무나 분비나무와는 쉽게 구별됐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막바로 하산을 했다. 거의가 등산화 비옷 등으로 '무장'했으나 신발에 물이 들어와 발이 물러지는 등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하산로인 뱀사골계곡은 10㎞ 이상의 긴 거리였다. 자연 선두와 후미는 상당한 간격으로 벌어지고, 탐사보다는 하산이 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산시간만 6시간 남짓 걸렸다. 이날 탐사팀은 뱀이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뱀사골 주변에서 민박을 했다. 모두 피곤했음인지 이날 만은 토론시간도 갖지 못했다. 측보계를 몸에 지닌 한 탐사자는 그날 4만2천보를 걸었다고 얘기했다.
■ 넷째달
오전에 지프를 타고 벽소령에 올랐다. 지리산의 경남쪽 사면을 차로 등반한 것이다. 한번 오르는데 한 팀(4,5명)당 6만원씩 받는 이 지프는 아슬아슬하게 벽소령까지 다달았다. 여기서 세석산장까지는 표시거리로 5.5㎞였으나 훨씬 멀게만 느껴졌다.
과거에 빨치산들이 PRI(사격술예비훈련)를 받았다는 세석산장은 소문대로 꽤 넓은 장소였다. 등산 도중 지도교수와 탐사단원간의 1문1답이 벌어지기도 했다. 왜 신갈나무는 주로 산 정상에서 군락을 이루는가, 해안가에서 사는 신갈나무는 어떻게 다른가 등등.
세석산장 주변에는 철쭉이 많이 피어 있었다. 하기야 지리산의 각 봉우리 정상부근에는 거의 예외없이 철쭉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라고 있었다. 하산코스는 원래 험난한 한신계곡으로 잡혀 있었지만 그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출입이 통제됐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 반대방향인 거림계곡을 택했다.
거림계곡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환경이 잘 보존돼 있었다. 인적과 스레기가 거의 없고, 주변경관도 좋아 이 계곡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탐사단원이 많았다.
거림계곡을 빠져 나온 탐사단은 버스로 지리산을 반쯤 돌아서 전북 남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긴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지난 사나흘 동안 맺어진 우의를 돈독히 했다.
■ 다섯째날
아침식사를 마친 후 막바로 좌담에 들어 갔다. 모두들 진지한 표정으로 탐사성과와 의의, 개선할 점 등을 3시간여 동안 쏟아 놓았다. 좌담을 끝낸 시간이 오전 11시 40분. 전국에서 모였던 탐사단은 다시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