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의 색은 유약에서 나온다. 82년 과학적으로 유약의 성분을 분석한 과학자들과 전통적인 방법으로 자연유약을 만든 도공들의 대결이 있었는데…
빛깔 오호 빛깔!/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빛깔아/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구멍뚫린 가을 하늘 한조각/물방울 뚝뚝 서리어/곧 흰 구름장 이는듯하다
월탄 박종화 선생이 고려청자의 신비한 비취색을 노래한 '청자부'(靑瓷賦)의 한 대목이다. 우리 조상의 문화유물 가운데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고려청자가 으뜸이다. 가냘프고 아리따운 선과 정교한 조각도 일품이지만 은은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의 정기를 품은 듯한 비취색에 우리는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청자의 아름다운 색은 당대에도 널리 알려졌다. 인종때(1123년)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서긍은 '고려도경'이란 책에서 "청자의 푸른색을 고려사람들은 비취색이라 하는데 근년에 이르러 그 제작기법이 더욱 정교하고 그 빛깔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며 도자기 기술에 관해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중국인의 솔직한 고백을 쓰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청자의 비취색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고증과 현대 과학기술을 동원해도 100% 그 색을 재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1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 품위를 흩트리지 않는 고려청자 비색(秘色)의 비밀은 무엇인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전남 강진은 고려시대 청자를 구운 가마터가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이다. 대구면 일대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1백80여군데의 가마터가 발견됐는데 이는 지금까지 확인된 3백여개 도요지 가운데 60%에 달하는 숫자다. 강진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초기 청자에서 말기제품까지 일관성있게 발견됐고 주로 관요(국가에서 쓰는 도자기)를 구운 곳으로 알려진다. 또한 이곳에는 강진군에서 운영하는 고려청자사업소가 77년부터 고려청자를 원형 그대로 구워내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고려청자는 10세기에서 14세기 후반까지 주로 제작됐다는 것이 이제까지 국사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장보고의 해상무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청자의 제작시기도 앞당겨지고 있다. 장보고의 교역항 가운데 하나인 중국 절강성 명주(明州)가 월주요 도자기 수출항이었고 대구면 일대에서 월주요와 매우 유사한 해무리굽 도자기 파편들이 수없이 발견됐다. 장보고의 근거지 청해진(지금의 완도군 장좌리)은 강진에서 해로로 불과 20㎞ 떨어진 곳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중국 도자기는 장보고의 교역품 중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전해진 도자기 기술을 발판으로 강진 지역에 도자기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자의 기원은 고려시대가 아니라 8-9세기경 즉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 외에도 강진이 청자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양질의 도토와 땔감으로 쓰일 나무가 풍부하고 기후가 따뜻해 겨울에도 작업이 가능하며 완성된 도자기를 수로로 개경까지 실어나르도록 해상교통이 편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강진에 청자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는 사실은 1914년 한 일본인에 의해 밝혀졌다. 그후 1928년 조선총독부가 이 지역을 조사해 1백여개 도요지를 확인했으며 일인들은 이곳의 청자를 헐값으로 사다가 마구잡이로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시대 일인들이 청자를 강탈해간 에피소드 한토막. 어떤 조선사람이 골수염을 치료하려고 옛무덤을 팠는데 그 속에서 청자가 수십점 쏟아져 나왔다. 색깔이 곱고 모양이 예뻐 집에 가져와 썼는데 이웃사람이 보고 "읍내에 청자만 모으는 일인이 있다"고 귀띔했다. 양식이라도 얻을 생각으로 청자들을 지게에 얹고 30리길을 찾아갔더니 그 일인이 문전박대하면서 하는 말 "무식한 조선인 같으니라구. 누가 그런 헌그릇을 사겠느냐. 냉큼 다시 지고 가거라." 낙담하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일인이 다시 "먼길을 메고 온 정성이 갸륵하니 술값이나 주마. 놓고가거라" 하면서 돈을 주는데 쌀 두가마니 값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하고 30리길을 줄달음쳐 돌아온 조선인은 그 일인이 행여 돈계산이 잘못됐다고 찾아올까봐 한달 이상 문밖출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후 1964년 국립박물관팀의 발굴조사결과 80여개에 달하는 도요지가 추가로 발견됐다. 70년대 들어 청자문화를 재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77년 이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몇년간의 시험제작과정을 거쳐 82년 재현품들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 전시해 수준을 인정받았다. 그후 강진군이 옛 가마터를 매입하고 시설을 확충해 86년 1월 '강진고려청자사업소'를 열었다.
규산제일철이 비취색으로 나타나
청자의 색은 유약에 의해 결정된다. 자기를 빚어 음각 양각 상감 등 문양을 넣은 다음 7백~8백℃로 초벌을 구운 후 여기에 유약을 발라 1천2백50~1천3백℃ 고온으로 구워낸다. 그러면 초벌때만 해도 도토와 비슷한 색을 띠던 것이 재벌구운 후에는 청자 본연의 비취색으로 완전히 색조를 바꾸게 된다.
82년 9월 이곳에서는 이색실험이 있었다. 서울대 임응국교수(요업공학과)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청자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유약을 만들고 이를 강진에서 개발한 자연유약과 비교해 본 것이다. 초벌구운 자기에 양쪽에서 만든 유약을 각각 칠하고 나란히 가마에 넣어 재벌구이한 결과, 승부는 과학자들의 패배로 결판났다. 강진요의 청자가 누가 보더라도 비색에 더 접근했던 것이다.
당시 과학자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이희수교수(연대 명예교수, 요업공학)는 이렇게 말한다. "장석과 도석을 기본원료로 하는 유약은 고온에서 그 속에 있는 철분(Fe)이 도토(${SiO}_{2}$)와 결합해 규산제일철(${FeOSiO}_{2}$)로 변한다. 일종의 불순물인 이 규산제일철이 청자로 하여금 은은한 비취색을 띠게 한다. 문제는 유약의 조성방법이다. 이 비법은 당대나 지금이나 비밀스러운 부분으로 남아있다. 유약에 철분이 너무 많아도 제 색이 나오지 않는다. 한때는 인(P) 성분이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다."
강진 고려청자사업소를 27년째 지켜온 도공 이용희씨는 "유약에는 기본성분 외에 초목분을 태운 회유가 포함된다. 이 배합을 과학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수많은 경험으로 만들어 낸다. 청자의 색은 유약 뿐만 아니라 가마의 온도, 불때는 연료, 소성방식 등에 크게 좌우된다"고 말한다. "요즘 만들어진 청자나 고려시대 청자 가운데 가끔 균열이 간 것이 눈에 띄는데 전성기 때 고려청자는 수천년이 지나도 균열이 보이지 않는다. '장인정신이 그 속에 깃들어 있느냐'가 관건이다."
국립과학관 정양모 학예실장은 이렇게 풀이한다. "고려청자의 비색과 아름다운 선은 그 시대문화와 관련지어 이해해야 한다. 사회 전체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으며 여유있고 유장한 문화풍토 속에서 직선적이고 화려한 도자기가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요즘처럼 각박하고 급변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은은한 색과 빼어난 곡선을 가진 청자가 구워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려청자 문화는 무신정권의 등장과 뒤이은 몽고와 일본의 침략으로 쇠퇴해갔다. 오늘날 발전된 과학기술을 동원하고 도자기 산업이 번성하더라도 그 시대정신이 담긴 청자의 비색은 100% 완벽하게 재현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