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은 삼림이 울창하고 햇빛이 잘들며 통풍이 잘되고 알루미나와 실리카가 풍부한 토양을 갖춘 쇠부리가마터로 옮겨져 제련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철 아닌 것이 없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철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제품들이 대다수다. 눈 앞의 책장, 의자의 뼈대가 모두 철로 이루어져 있고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등의 골격도 모두 철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모든 제품도 철로 만들어진 도끼나 톱이 없으면 지금의 형태를 갖출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플라스틱이 많은 부분 철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철은 인류 문명의 뿌리로서 그 위치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가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인류는 철을 얼마만큼 잘 다루었느냐에 따라 그 문명의 성쇠가 판가름났다고 할 수 있다. 쇠를 잘 관리한 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쇠를 무시한 나라는 곧 쇠퇴해 멸망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
우리나라 철기시대는 B. C.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근거는 중국 연나라(B. C. 323~B. C. 222)의 명도전(청동화폐)이 평북지방에서 여러 종류의 철기물과 함께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탈해왕조에도 "…나의 조상은 원래 대장장이…"라는 표현이 나와 기원전에 이미 철을 다루는 기술이 존재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철을 활용했는지를 알아보는 현실적인 방법은 삼한시대부터 철광 산지로 알려졌으며 지금까지도 철광석을 생산해내고 있는 경남 울주군 농소면 달천리에 있는 달천광산(현재는 대한철광주식회사 달천광업소)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각종 용광로(제철로)를 추적해보는 일이다. 영남대학교 권병탁 교수(경제학)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국 각지의 철산지와 철을 제련한 각종 가마를 추적한 바 달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권교수는"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지리적으로 불리했던 사로국이 신라로 승화되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은 철기 생산력이 경제적 지렛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고 평가하면서 "달천광산의 광석을 직접 제련했던 제철로가 주변의 토함산 치술령 운문산 지역에서만도 62기나 발견됐으며 90년에 발굴된 4~7C의 경주시 황성동 제철유적에서는 각종 제철 및 주물가마가 20여기나 모습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황성동 제철유적은 아파트 공사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달천광산 주변의 월성군 외동면 녹동리와 울산군 치술령 지역, 청도군 운문산 지역에서도 권병탁 교수팀에 의해 일부 가마터가 발견되었으나 원형이 보존돼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가마터(각종 제철로)를 직접 찾아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추적하는 방법과 함께 가마터 주변의 광재(slag, 권교수는 이를 쇠똥이라 부른다)를 성분분석해 당시 철제품의 성능을 알아보는 방법도 매우 효과적이다. 여러 실험을 통해 슬랙의 화학조성과 미세구조를 살펴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금속재료연구단 최주박사는 "고대철은 금속부식의 원인이 되는 유황(S)의 함량이 적은것이 특징"이라며 "아직 완벽한 로의 복원실험이 재현되지 않아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우리나라 제철법의 특징은 숯을 통한 저온환원을 가능케하는 메커니즘에 있다"고 말했다.
원광을 넣고 철을 제련하는 용광로 안에 진출을 바르는데 이 진흙 속에 포함돼 있던 알루미나나 실리카가 산화철과 만나면 융점(녹는 점)이 낮아져 저온에서도 쇳물과 슬랙이 형성된다는 것. 요즘은 1천8백℃ 이상으로 열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1천3백℃에서 1천4백℃정도까지만 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고로철(高爐鐵)에서는 환원제로 유황이 포함된 코크스를 사용하지만 고대철에서는 숯으로 환원하므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금속부식이 상대적으로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철이 현대철보다 부식이 잘 안되는 이유가 전적으로 유황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최주 박사는 밝혔다. 이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중국 등 각국에서는 철을 제련하는 로(가마)를 복원해 이를 밝히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튼 4세기에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전해준 칠지도가 1천7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고, 7세기에 백제의 철사(鐵師)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사천왕사의 칼이 한때 4백년간이나 바깥에 방치돼 있었으나 아직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제철기술은 고도로 발달돼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달천 철광의 지표원소, 비소
현대의 제철법이 정착되기 전 우리의 조상들이 철을 제련했던 과정을 달천광산 지역을 추적해보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달천광산에서 원광을 채굴했던 공식적인 기록은 17세기부터 눈에 띈다. 구충당(求忠堂) 이의립이란 사람이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짓밟힌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며 힘이 부족한 근본적인 원인은 쇠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자서전에 적고 있다. 그는 전국을 10여년 돌아다닌 끝에 달천광산을 발견해 철제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를 조정에 상납했다는 것.
당시 임금이었던 현종은 이의립에게 정3품 벼슬인 평안도 숙천도호부사를 임명했으나 그는 이 벼슬을 사양하는 대신 철산(달천광산을 가리킴)을 하사해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이조말까지 이의립의 후손이 이 광산을 경영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대해 권병탁 교수는 이의립 자신이 광산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그외에 다른 얘기는 사실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철은 모든 흙에 5% 정도는 함유돼 있다. 흔히 사철이라고 불리는 모래광산에는 철이 20~30%포함돼 있어 바가지로 쌀을 일구듯이 일구어 철을 분리해내기도 한다. 달천광산에서 채굴되는 토철 및 광석은 철 함유량이 60% 이상. 다만 인(P)과 유황(S) 크롬(Cr) 등 제철에 해로운 요소들의 함량이 높은 것이 흠이라고 최주박사는 밝혔다. 이 중에서 비소는 달천광산의 지표원소로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에서도 발견됐다. 따라서 달천광산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노천굴이므로 더 고대로(삼한 시대까지)까지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 달천광산을 지나가다보면 금방 그 지역이 철광산지임을 알 수 있다. 흙속의 철이 산화돼 산이 벌겋기 때문이다.
철광석을 채굴한 다음 원광에서 순수한 철을 빼내는 제철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제철작업의 첫번째 순서는 용광로이다. 17, 18세기의 용광로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달천광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녹동리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이 용광로를 권병탁 교수는 순수한 우리말로 쇠부리가마라고 부른다. 녹동리의 쇠부리가마터는 현재 저수지가 돼 물이 잠겼으나 저수지 가의 산기슭에 가마 하나를 원형대로 복원해놓았다.
원광을 참숯과 섞어서(원광과 숯의 비율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 : 1에서 1 : 3까지 추정) 쇠부리가마안에 집어넣고 풀무장치를 이용하여 강한 바람을 집어 넣어 광석을 금속(철)으로 환원시킨다. 쇠부리가마터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울창한 삼림자원이 우선 필요하며 둘째는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는 아늑한 산기슭이 필수적이다. 또한 가마안에 바르는 진흙 성분에 알루미나와 실리카가 풍부해야 하므로 이러한 성분을 포함한 진흙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풀무에서 가마안에 강한 바람을 불어넣기 위한 바람구멍의 배치 등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숯은 보통 산화나트륨이나 산화칼륨과 같은 회분(재)이 적은 참나무숯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가마안의 진흙은 융점을 낮추기 위해 알루미나 실리카 생석회 등이 섞인 것을 사용했음이 원 가마터에서 발견된 진흙 잔해에서 확인됐다. 현대의 고로에서는 이러한 진흙을 대신해 풀럭스라 불리는 특수점토를 만들어 사용한다. 풀무바람은 강하고 잘 통할수록 빨리 쇠가 녹지만 그렇지 못하면 쇳물이 녹다말고 굳어버린다.
권병탁 교수에 따르면 쇠부리가마 작업에는 보통 27명이 동원되는데 이 중에 핵심적인 일은 주로 편수라 부르는 4, 5명에 의해 주도된다고 한다. 쇠부리가마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점화된 지 7,8시간이 지나면 원광이 녹아나기 시작한다. 이후 2,3시간이 지나면 아랫부분에는 쇳물이 고이고 윗부분에는 잡쇠가 떠오른다. 끈끈한 잡쇳물은 쇠똥(슬랙)으로 굳어지고 황금 빛 쇳물은 초롱구멍으로 흘러나와 봉쇳덩이로 굳어진다. 한번 작업을 마치고 약 2시간 후에 다시 작업을 하는데 두번째 쇠내는 일에 성공하면 '운수가 트였다'고 하며 세번째에 성공하면 '시우씨가 돌봤다'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는 운수가 트이는 일 조차도 매우 드물다고 한다. 따라서 쇠내는 일을 할 때는 편수들은 목욕재계하고 고사를 지내는 일이 상례화 돼 있다.
쇠둑과 무질부리가마
쇠부리가마 작업이 끝나면 크게 단조와 주물작업을 하게 된다. 단조는 말 그대로 잡쇠나 봉쇠를 달구고 두드려 쇠의 질을 높이는 일이며 주물은 쇳물을 주형(틀)에 부어 원하는 모양의 제품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경주 황성동 유적에는 쇠부리가마를 비롯해 단조나 주물을 한 흔적이 있는 여러 종류의 가마가 발견돼 이러한 일련의 공정이 한꺼번에 이루어졌음이 밝혀졌으나, 녹동리에서 쇠부리 작업을 마친 잡쇳덩이와 봉쇳덩이는 녹동리와 산 하나 사이를 둔 치술령 부근의 두들못가와 청도군 운문산 지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치술령 부근의 두들못가에는 쇠부리가마에서 나온 잡쇳덩이에다 다시 높은 열을 가해 녹이고 망치질해 불순물을 줄이는 강엿쇠둑(권교수가 찾아낸 우리말 표현, 금속학계에서는 이를 아직도 일본과 같이 소단야라 부른다)과 여기서 나온 강엿쇠를 다시 달구어 탄소 등 불순물의 농도를 더욱 줄여 판장쇠를 만드는 판장쇠둑(대단야)이 다수 발견됐다. 즉 탄소 농도가 1% 이하인 강철을 만드는 단조작업이 두들못가에서 이루어진 것. 판장쇠둑을 거친 철은 대장간화둑으로 옮겨져 비로소 칼이나 문고리 등 원하는 형태의 철 제품이 만들어진다.
운문산 솥계골에서는 주로 주물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물이란 도가니 안에서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넣는 일. 권교수가 찾아낸 우리말로는 무질부리라고 부른다. 무질부리 가마에다 봉쇳덩이나 판장쇠를 숯과 함께 넣고 가열해(여기서의 온도는 8백℃) 쇳물을 만들어 거푸집에 붓는다. 무질부리의 특징은 숯을 많이 넣고 침탄을 일으켜(탄소를 많이 스며들게 하는 것) 융점을 낮추는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탄소가 2% 이상인 선철(무쇠)을 만들어낸다. 무질부리에서 만들어낸 제품은 주로 가마솥류처럼 형태가 복잡하고 깨지지 말아야 하는 것들.
안내판 하나 없는 가마터
이처럼 쇠를 만들어내는 일은 과거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여러 공정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여러 공정이 한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경주 황성동) 여러가지 조건을 따라 장소를 옮기기도 했다(달천광산-녹동리 쇠부리가마터-두들못가의 쇠둑-운문산 솥계골의 무질부리가마터-전국 각지의 대장간). 좋은 숯을 구하기 위해서, 천연의 풀럭스를 찾기 위해서, 또 햇빛과 바람의 조건을 맛추기 위해서 좋은 장소를 찾아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제철법을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과거의 제철법을 연구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비법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고대철이 현대철보다도 부식이 잘 안되는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정밀한 복원실험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경제사적 문화사적 의미가 복합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피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나름대로 철 유적지를 보존하고 제철로를 복원해 과거의 철기문화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발굴된 철유적지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가고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은보화에는 관심을 쏟아도 도끼나 철 제품에는 눈 한번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녹동리 저수지 가에 복원돼 있는 쇠부리가마도 안내 푯말 하나 없이 숲속에 웅크리고 있는 현실. 두들못가나 솥계골도 지금은 가마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권병탁교수가 유적을 찾아 헤매던 60년대만 해도 과거 쇠부리작업을 직접하던 편수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이들 모두 세상을 떠나 철 문화의 잔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도 권병탁 교수는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에 그동안 채집하고 연구한 자료와 유물을 바탕으로 고대 제철 전공정을 약식으로나마 복원해놓은 '두두리집'을 만들었다. 더군다나 맥이 끓기다시피한 편수 집안을 찾아 어려서부터 쇠를 다루어온 신종수(62)씨를 두두리집에 데려다놓고 계속 쇠를 다루게 하고 있다. 현재 신종수씨는 인간문화재 지정을 신청해놓고 있다. 여기서 '두두리'의 의미는 과거(신라 시대 이전) 철을 다루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권력의 핵심부에 있을 때 그들을 칭하는 이름이라고 권교수는 설명했다.
금속학자도 과거 우리 철의 제철법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일에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 다만 한국과학기술원(KIST) 최주 박사팀이 유일하게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KIST 실험실 한 켠에 약식으로 제철로를 복원해 실험을 하기도 했으나 만족할만 결과는 얻지 못했다. 달천광산에서 가져온 60% 함유 철광석 50kg을 써서 철 2.8kg밖에 얻지 못했다. 최박사 팀은 앞으로 계속해 유적지에서 가져온 슬래그의 성분분석은 물론 제철로의 복원실험을 계속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