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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불행한 수학자

수학과 레크리에이션의 만남

수학자들에게 수학자중 누가 가장 억세게 운이 나빴나를 물으면 한결같이 꼽는 사람이 있다.

풀어보고

1 레크리에이션 수학의 고전적인 문제를 한번 풀어보자. 다음식으로 표시되는 x의 값은 얼마일까?
X=$\sqrt{2+\sqrt{2+\sqrt{2+…}}}$
① 1 ② 2 ③ 3 ④ 4

2 레크리에이션수학의 또 하나의 큰 장르는 마방진(magic square)이다. 마방진은 정사각형의 칸에 정수가 배치돼 옆으로나 위아래로나 대각선으로의 합이 같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이 정수가 1부터 ${n}^{2}$까지의 숫자로 돼 있으면 n차의 마방진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3차의 마방진은 다음과 같다.


3차 마방진
 

또 4차의 마방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4차 마방진4차 마방진
 

다음의 4×4 크기의 마방진에서 빈 공간에 들어갈 숫자는 어느 것일까? 이 마방진은 특수한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특수한 4차 마방진
 

① 9 ② 256 ③ 1024 ④ 12564

3 수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여러 수학자들의 생애에 대해 평가해 볼 때, 누가 제일 행복했느냐 하는 것은 답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가장 불행했느냐 하면, 거의 공통적으로 한 사람을 지목한다. 다음의 네 수학자 중 가장 불행했던 사람은 누굴까?
① 뉴턴(Newton)
② 가우스(Gauss)
③ 베르누이(Bernoulli)
④ 갈로아(Galois)

맞춰보고

1 ② 다음과 같이 추론하면 2가 됨을 알 수 있다. 양변을 제곱하면 ${X}^{2}$=$\sqrt{2+\sqrt{2+\sqrt{2+…}}}$ =2+X
즉 ${x}^{2}$-x-2=0
(x+1)(x-2)=0
x=-1 또는 x=2
그런데 x는 0보다 크므로 x=2
또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일반화 시킬 수 있다.
X=$\sqrt{K+\sqrt{K+\sqrt{K+…}}}$
이것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풀면 ${x}^{2}$-x-k=0
근의 공식으로 양의 근을 택하면
X=$\frac{1}{2}$+$\frac{\sqrt{1+4K}}{2}$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k=2를 대입하면 x=2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① 독자들은 좌우상하의 합을 구한 뒤 그 차이를 구하면 쉽게 9가 답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방진은 이미 서력 기원 훨씬 전에 중국에서 시작돼 서방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에서 주어진 마방진은 연속된 숫자로 이뤄지지는 않았으나, 이 마방진은 다음과 같이 특수하게 모두 16개의 제곱수로 이뤄진 것이다.


제곱수 마방진제곱수 마방진
 

또한 공통의 합인 93025도 제곱수이다. 즉 93025=${305}^{2}$
또 색다른 마방진으로는 다음과 같은 순환수로 이뤄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순화숫자로 이뤄진 유일한 완전한 마방진이다.


순환수 마방진
 

3 ④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학문적으로도 성취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는 강의를 싫어해 대학강단에 서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불행했다고 볼만한 사실은 없다. 오히려 괴팅겐의 천문대장으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연구에만 몰두한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망한 뒤에도 가우스는 '수학자 중의 왕자'로 불리게 된다. 20세기 초의 수학자인 클라인은 '가우스에 견줄만한 과학상의 위대한 인물을 구한다면 다만 두 사람의 선구자, 아르키메데스와 뉴턴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베르누이는 어느 베르누이냐고 물어야 할 만큼 스위스의 베르누이 일가는 수학및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베르누이 일가가 수학적 재능이 풍부한 일족으로서 유전학상의 실례로 등장하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갈로아(Evariste Galois, 1811~1832)는 1811년 10월 25일 파리 근교에서 시장인 아버지와 유명한 법률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 출생 환경외에는 계속된 불행의 연속이었다. 갈로아는 12세까지 집에서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우다가 1823년에 파리 근교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런대로 잘 해냈다. 그러나 점점 뒤처져서 마침내는 낙제를 하게 되었다. 14세가 되면서 그는 르장드르(Legendre)가 쓴 수학교과서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그밖의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다. 16세에 프랑스의유명한 에콜 폴리테크닉(Ecole Polytechnique)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독자적으로 공부를 계속해 18세 때(1829년) 연분수에 관한 첫 논문을 썼다. 이때 프랑스 과학원에 발표할 중요한 논문을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코시(Cauchy)에게 보냈는데, 코시가 잃어버렸다. 18세에 다시 에콜 폴리테크닉에 응시했는데 이번에는 칠판지우개를 시험관에게 던져서 또 떨어졌다. 얼마 후 그의 아버지는 자살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세 때, 과학원에 보낸 논문은 역시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푸리에(Fourier)가 잃어버렸다. 정치적으로 꽤 활발하게 활동했던 갈로아는 1830년의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그해 5월 10일 체포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곧 무죄로 판결받았다가 1831년 7월 14일에 다시 체포돼 제복을 불법적으로 입었다는 우수꽝스러운 죄목으로 6개월형을 받았다. 이 즈음에 과학원으로 보낸 논문은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인 포아송(Poisson)에 의해 '이해불가'라는 판정을 받아 사장됐다.

갈로아는 1832년 5월 29일에 출옥했는데, 바로 이날 연애사건에 얽힌 결투신청을 받았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장을 관통당해 사망했는데 묘비명도 없는 묘지에 묻히고 말았다.

이처럼 스물한살의 짧고 불행한 생을 살았지만, 갈로아의 업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갈로아이론(Galois theory of equations)과 갈로아군(Galois group) 등으로 표출된 그의 사상은 전 수학을 꿰뚫는 한 줄기 흐름으로서 영원히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마방진
 

1992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유승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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