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틀 열기구 비행선 글라이더를 거쳐 라이트 형제의 동력비행이 성공한다. 이후 90년 동안의 '창공도전의 역사'를 소개한다.
현재 우리는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제트기시대에 살고 있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처음 동력비행에 성공하고 90년 밖에 안되는 사이에 항속시간은 1천배 이상(59초에서 17시간), 비행속도는 2천5백배 이상(초속 4.4m에서 마하 3.3) 그리고 항속거리는 5만배 이상(2백60m에서 7천2백km)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이제 멀지 않아 우주공간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비행체도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항공기가 1백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 것은 많은 과학기술자와 비행가들이 피땀어린 연구를 한 결과이지만, 그만큼 항공기가 군사용으로는 물론 교통기관으로서 또는 산업 문화 기타 여러 분야에서 그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흔히 항공기를 첨단 종합과학기술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항공과학기술 수준이 곧 그나라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항공산업의 시작이 좀 늦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선진화를 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현시점에서 항공역사 90년을 살펴보고 항공과학기술에 대한 젊은이의 꿈을 보다 새롭게 키우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새의 날개나 구름에 의지
옛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좋아하고 하늘을 날고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땅이나 바다 위를 수레나 배를 타고 달리는 것에 비해 하늘을 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신화나 전설 또는 소설에는 하늘을 날아보고자 했던 사람들의 꿈이 담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날개를 단 천사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야기, 새들의 힘을 빌어 달까지 날아간다는 내용의 공상소설 등 여러가지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산대사도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전해진다. 옛날 사람들은 공기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을 새의 날개나 구름에다 의지하는 생각뿐이었다.
이와 같은 공상시대를 거쳐 실제로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수단으로 생각해 낸 것은 날틀을 만들어 타고 나는 방법과,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방법 두가지였다. 그중에서 날틀은 오늘날 여러가지 종류의 항공기로 발달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있지만, 사람의 힘만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방법은 아직까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아마 하늘을 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새보다 인간의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인 것 같다.
날틀 연구의 길잡이들
1903년 라이트형제가 동력비행에 성공하기까지 날틀 연구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선두주자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만능 천재로 알려진 유명한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다.
그는 1500년경 새를 해부해 공중에 뜨는 힘(양력)과 공기의 저항력(항력)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여러가지 종류의 날틀을 설계했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사람의 팔과 다리로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날개치기 비행기'와 나사못의 원리를 이용해 수직상승비행하는 '헬리콥터'의 설계도다. 모형도 만들어 실험까지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후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발명가들이 여러가지 모양의 날개치기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프랑스에서 철물상을 했던 버스니에란 사람이다. 긴 막대에다 경침으로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그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내리는데 성공했으나, 센강을 날아서 건너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이때가 1742년. 이 시절에는 이와 유사한 모험비행을 하다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인간의 꿈을 제일 먼저 실현시킨 것은 열기구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래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날아보려고 열중하고 있는 사이에 1783년 11월 21일 프랑스인 제지업자의 아들 몽골피에 형제가 종이로 열기구를 만들어 사람을 태우고 5백m 상공까지 떠 오르는데 성공했다. 화톳불을 피웠을 때 뜨거운 연기가 힘차게 하늘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질긴 종이로 지름이 10m나 되는 큰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다 뜨거운 연기를 가득 채워서 2백kg 이상의 양력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파리에서는 열기구와 더불어 수소기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보다 열흘 늦은 12월1일, 샤를 형제가 수소기구를 타고 두시간 동안 43km 거리를 나는데 성공했다.
열기구에서 비행선으로
이와 같은 기구의 등장으로 사람이 하늘높이 떠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기구는 바람이 부는데에 따라 밀려 움직이기 때문에 원하는 비행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 연구개발된 것이 바로 기구에다 엔진을 단 비행선이다.
1852년 프랑스의 앙리 지파르는 공기저항을 되도록 적게 하기 위해 유선형으로 만든 큰 기구에다 35마력 증기기관을 달고 프로펠러를 회전시켜 어느 정도 마음대로 비행할 수 있는 비행선을 만들어 띄우는데 성공했다.
그후 가볍고 힘이 좋은 가솔린엔진이 나오고 비행선의 제작기술이 발달되면서 여러가지 종류의 비행선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독일에서 1900년에 만든 '체펠린 1호'와 1936년에 만든 '힌덴부르크호'였다. 체펠린 1호는 역사상 최초의 여객운송용 항공기란 점에서 유명하고, 힌덴부르크호는 747점보기 보다 훨씬 큰 거대한 비행선(길이 2백45m, 지름 41m)으로 피아노까지 있는 오락실과 호화로운 객실(90명 정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호화비행선은 1937년 5월 수소가스 폭발사고로 많은 희생자를 낸 후 점차 빛을 잃어갔다. 또 날개가 달린 성능좋은 비행기가 개발점에 따라 비행선은 장점을 가질 수 없었다. 현재 가끔 떠 다니고 있는 비행선은 수소 대신에 안전한 헬륨가스를 쓰고 있는데 선전용이나 기타 특수한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물속에서 뜨는 힘(부력)이 생기는 원리는 B.C.200년경 희랍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해냈다. 그러나 공기중에서 뜨는 힘(양력)이 생기는 원리는 그보다 훨씬 뒤인 1809년 영국의 조지 케일리(1773~1857년)가 '공중비행에 대하여'란 책을 펴내고 나서부터 학문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글라이더의 등장
이 책에서 케일리는 날틀에 관한 기본적인 공기역학적인 문제와 안정성, 조종성에 대한 내용까지를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후세에 큰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케일리는 1849년 3층날개 글라이더를 만들어 10살 난 소년을 태워 최초로 유인활공비행에 성공함으로써 글라이더 시대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케일리의 이론을 토대로 여러가지 모양을 한 글라이더를 만들어 실험했는데, 공중을 제대로 날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써 만든 글라이더가 바람에 날려 중심을 잃고 추락하는 바람에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2천회 이상 비행실험을 했다는 유명한 독일의 활공왕 오토 릴리엔탈(1848~1896년)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모래언덕에서 비행실험을 하다 약 50m 높이에서 떨어져 크게 다쳐 다음날 48세로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현재 그의 묘비에는 그가 평소에 말한대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글라이더가 제대로 날려면 양력을 제대로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의 균형을 잘 잡기 위한 조종날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 당시의 글라이더는 모두 오늘날의 행글라이더와 같이 사람이 몸을 움직여 조종하는 것이었다. 릴리엔탈이 6년 동안에 여러가지 모양의 글라이더를 18대나 만들어 2천회 이상 비행실험 하는 동안 최고 비행거리는 2백50여m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진 많은 사람들의 희생어린 글라이더 실험비행이 1900년부터 시작되는 라이트 형제의 겹날개 글라이더 실험으로 이어져, 1903년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59초 동안 2백60m
1903년 12월 17일은 라이트 형제가 노스캐롤라이나주 키디호크의 해안 기루디빌 힐의 밋밋한 모래언덕에서 인류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한 역사적인 날이다.
형제가 교대로 날았는데 먼저 아우인 오빌(1871~1948년)이 타고 비틀거리며 12초 동안 36m를 날았고, 네번째는 형인 윌버(1867~1912년)가 타고 59초동안 2백60m를 나는데 성공했다. 라이트 형제의 이와 같은 성공은 오랜 동안에 걸친 과학적인 연구와 뛰어난 기술 그리고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값진 것이다.
이때 라이트 형제가 만들어 성공한 날틀은 '플라이어'란 이름의 겹날개 비행기였는데 온폭은 12.29m, 온길이 5.96m, 기체의 무게는 2백74kg, 엔진은 12마력 4기통짜리 가솔린엔진 1대를 갖추고 있었다. 또 좌우 두개의 프로펠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시켜 기체의 자세가 바르게 유지되도록 했다.
이착륙에 필요한 바퀴다리는 되도록 기체를 가볍게 하기 위해 달지 않았고, 그대신 작은 바퀴가 달린 수레에다 기체를 얹어놓고 나무로 만든 레일 위를 달려 이륙하고, 착륙할 때는 기체 밑에 달려있는 썰매장치를 이용했다.
라이트 형제는 일찍이 두겹으로 된 큰 연을 만들어 실험을 하고, 겹날개 비행기의 모형을 만들어 연과 같이 끈을 매서 날려보는 실험연구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부터는 실물 글라이더를 세대나 만들어 공기역학적인 실험연구를 철저히 하는 한편 조종기술을 연마했다.
다행히도 키디호크의 모래언덕은 언제나 일정한 바람이 알맞게 부는 아주 조건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1년 동안에 약 1천회에 가까운 비행실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독일의 릴리엔탈은 바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5년동안 약 2천회 비행실험).
한편 공기역학적인 실험을 보다 과학적으로 하기 위하여 라이트 형제는 '풍동'장치를 만들어 여러가지 모형에 대한 실험연구를 했고, 네모난 길쭉한 종이상자를 비틀어 보고 비행기의 날개도 그 일부를 비틀어 방향을 바꾸어 주면 바람을 받는 면적이 달라져 비행기의 자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즉 조종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와 같은 원리에 따른 것이 바로 라이트형제 이후에 등장한 보조날개와 꼬리날개에 달린 방향키나 승강키와 같은 조종날개다.
또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의 기체를 만드는 기술은 물론 자동차용 엔진을 개조하여 프로펠러를 돌리는 항공용 엔진까지도 개발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1904년에는 플라이어 2호기를 만들어 약 80회정도 비행했고, 다음해인 1905년에는 3호기를 만들어 38분3초에 39km를 8자비행하는 아주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뿐만아니라 1908년에는 그간에 축적된 기술을 토대로 30마력 엔진을 단 새로운 '라이트A형'을 만들었는데, 아주 훌륭한 비행기였기 때문에 주문을 받아 여러대를 양산까지 했다(1909년 라이트 항공회사 설립).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인류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선구자일뿐 아니라 비행기를 양산하는 비행기 제작사업의 원조이기도 하다.
두번의 세계대전이 기폭제
라이트형제의 동력비행이 성공한 이후 마치 댐의 수문이 열리듯이 꿈많은 엔지니어들이 여러가지 모양의 비행기를 만드는데 열을 올렸다.
1909년 항공사에서는 기념할만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불해협의 횡단에 성공한 사건이다. 프랑스의 블레리오는 홑날개 비행기를 만들어 32분 동안에 약 40km를 날아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다른 기술사도 마찬가지지만 비행기의 역사도 전쟁을 통해 급격히 발달했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비행기는 적진을 정찰하는데 쓰이기 시작했고 전쟁이 심해지자 기관총을 단 전투기가 등장했다. 당시의 비행기는 엔진과 프로펠러를 달고 천을 붙여 만든 목제비행기였다. 불과 5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여러나라에서 18만대나 되는 목제비행기를 만들어 사용했다고하니 얼마나 공중전이 치열했는가를 알 수 있다. 뒤집어 해석하면 그만큼 항공기술이 발달했다는 말도 된다.
1917년 알루미늄합금의 일종인 두랄루민(가벼우면서도 강도가 세고 부식되지 않음)이 비행기 기체를 만드는데 쓰임으로써 금속비행기 시대가 열렸다. 첫 금속비행기의 별명은 '양철로 만든 당나귀'. 이 희귀한 이름의 비행기가 외형상으로만 보면 현대 비행기의 원형이 되고 있다. 이후 기체의 소재는 강도가 많이 보강되고 더욱 가벼워진 두랄루민의 후예들이 등장, 첨단항공기를 구성하고 있다.
1차대전이 끝나자 전투기보다는 사람이나 화물, 우편물을 실어나르는 본격적인 민간항공기 시대가 열렸다. 전쟁이 끝난지 3개월이 안되서 유럽에서는 정기항공편이 개설될 정도. 한편 우편물을 실어나르던 무명의 린드버그란 미국 사람이 1927년 뉴욕과 파리간(5천8백9km)을 33시간30분만에 중간에 한번도 쉬지않고 횡단하는데 성공해 세상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30년대는 바다에서 뜨고 내릴 수 있는 큰 비행정도 만들어졌다. 6백마력짜리 엔진을 앞뒤에 12대나 달고 1백70명이나 태울 수 있는 이 대형 비행정은 고장이 자주나 정기항로에 취항하지 못했지만 현재의 A-300에어버스나 747 점보여객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은 공중전이 성패를 가를 정도로 전투기가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연합군측이 47만대의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20만대의 비행기를 전쟁에 동원했다. 이때 등장한 대부분의 비행기는 프로펠러식. 특히 미국에서는 소형 전투기뿐만아니라 프로펠러식 대형 여객기를 만들어 여러 용도로 사용했는데 DC-3, DC-4, B-307 등이 이 때 만들어진 여객기다.
제3세대 제트 여객기
프로펠러 비행기 시대를 마감하고 제트기 시대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 것은 2차대전에서 결정적으로 일본을 항복시킨 B-29. 이 폭격기의 항공기술사적 특징은 고공비행을 위해 여압실을 만든 것. 사실 비행기의 발달은 보다 높이, 보다 빨리 날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압실이란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여객기 안의 공기압력이 떨어지는 것을 공기를 압축시켜 보안해주는 장치다.
B-29 이후 곧바로 제트엔진 시대가 열린다. 피스톤식 엔진을 단 프로펠러 비행기로는 음속 이상으로 날아보려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엔진이 필요하게 됐다. 제트엔진은 압축기로 공기를 압축해 연소실에 집어넣고 연료를 분사시켜 폭발하게 하고 여기서 얻어진 팽창압력으로 터빈을 회전시키는 원리로 작동한다. 1930년 제트엔진(가스터빈엔진)이 영국의 프랭크 휘틀에 의해 개발되고 이를 이용해 독일에서 하인겔이란 제트기가 1939년에 만들어진다. 그 후 피스톤식 전투기는 모두 제트기로 바뀌어 시속 1천km 시대가 열리게 됐다. 6.25 동란은 피스톤식 전투기의 마지막 고별 무대가 됐다.
1950년대부터는 여객기도 제트시대가 열렸다. 영국의 코밋이 첫비행을 한 후 한때 추락사고로 암흑시대가 오는 듯 했으나 1958년에는 보잉707이, 1959년에는 더글러스사의 DC-8이 정기취항함으로써 본격적인 제트여객기 시대가 개막됐다. 이때의 여객기를 1세대라 부른다.
1950년대에 개발된 제트여객기에 탑재됐던 엔진은 모두 터보제트. 그런데 터보제트는 초음속여행에 적합하나 저속에서는 추진 효율이 좋지않고 연료소비율이 높으며 배기소음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결점을 보완한 터보팬 엔진이 등장하는데, 이는 앞부분에 팬을 달아 많은 양의 공기를 비교적 낮은 속도로 분사시키기 때문에 아음속(음속의 0.6~0.9배)에서도 추진효율이 좋고 연료가 적게 든다. 보잉727, DC-9, 트라이덴트 등은 모두 터보팬엔진을 탑재한 대형여객기다. 이들이 2세대여객기로 지금까지도 일부에서 운행되고 있다.
3세대의 서막을 연 것은 1970년에 보잉747이 등장하면서. 안에서 영화감상도 할 수 있는 보잉747은 총무게가 3백60t이나 나가는 대형여객기(탑승객 4백명)로 공해가 적은 개량형 터보팬 엔진을 장착했다. 747점보기 이후에 나온 여객기는 맥도널더글러스사의 DC-10과 록히드사의 L-1011, 유럽에서 공동개발한 A-300 등이다.
터보팬 엔진 이외에 터보프롭이나 터보샤프트 엔진이 개발되기는 했으나 터보팬처럼 널리 활용되지는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날틀 따오기 모양의 비차(飛車)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날틀을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약 1백50년 전 헌종시대 고증학자 이규경선생이 쓴'오주연문장전산고'란 책에 '비차변증설'이란 대목이 있다. 여기서 비차란 날틀을 말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주에 사는 정평구선생이 따오기 모양을 한 비차를 만들어 날개로 배를 치며 바람을 일으켜 공중에 떠올라 백척을 능히 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맞바람(양각풍)이 불 때는 앞으로 날아갈 수가 없으며, 회오리 바람(광풍)이 불 때는 날지 못하고 떨어진다."
또 호서지방의 노성에 사는 윤달규선생도 비차를 만들어 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가 바로 그 연대로 보아 새를 모방한 날개치기 비행기를 꿈꾸던 시대인데, 우리나라 항공의 역사자료로 아주 자랑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보다 자세한 내용의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