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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김양식구 만든 윤유택

윤'씨에게 뉴욕발명전 은상의 영광을 안겨준 태양열 집열식 온수기 앞에서


"발명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다리 뻗고 편안히 잘 수가 없어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기 마련이며 양지 반대편에는 그만큼의 음지도 있다는 세상사의 이치가 발명계라고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단 한건의 발명으로 순식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평생을 두고 연구를 거듭해도 이렇다할 상품 하나 세상에 내놓지 못한 채 발명인생의 끝을 맺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달에 만나본 발명가 윤유택(尹有澤·한국수산대표)씨는 성공이란 잣대만으로 재자면 우리 발명계에서도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의 비탈길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라면 하던 일조차 정리하고 여생(餘生)을 즐길 일흔다섯 나이에 '무엇에 씌인 것'이라며 고개를 내흔드는 주위의 만류와 비난을 감수하며 발명가의 길을 걷고있는 그의 삶을 소개하지 않고 비켜간다면 그것은 '우리시대의 발명가'가 발명계의 양지만을 애써 비추는 편파를 저지르는 것에 다름 아니리라.

현대사 굴곡따라 인생유전

윤유택씨는 기미 독립만세사건이 있기 한해전인 1918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어떠한 개인사도 결코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던가. '세대적으로 불행한 사람'이라는 그의 한탄이 없다해도 윤씨의 살아온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일제의 식민지배와 광복 6·25전쟁 4·19혁명으로 이어진 숨가쁜 현대사가 아니었던들 발명가로서의 그의 삶이 퍽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왜정시대에 독립운동하다가 잽혀서 이름도 못 남기고 맞아죽고…. 우리는 그런 것 봄서 국민학교도 못 나온 에디슨이 성공했듯이 이런 처지에서는 발명으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변변한 과학기술교육의 혜택 한 번 받지 못하는 식민지민의 설움을 안고 열여섯살이 되던 해 고향을 떠난 그는 학업을 더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오오시카(大阪)항에 첫발을 디뎠다. 그로부터 7년간 윤씨는 동경전기 학교등을 다니며 고급 전기기술을 익힌 뒤 당시 경성을 제외한 전국 전기사업의 독점경영체인 남선합동전기회사에 자리를 구해 금의환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45년 광복과 함께 그는 좌우가 대결하는 혼미한 정치판 속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휘말려 들게 된다. 단지 도면그리는 기술이 뛰어나 작전도면을 잘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여수·순천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편제된 임시경찰조직에 발탁된 그는 얼떨결에 경찰이 됐다가 그곳에서 주민들의 인심을 얻어 순천세무서직원으로 눌러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류에 떠밀려 자신의 장래가 손바닥을 뒤집듯 하루아침에 변하는 일을 겪으면서도 그의 발명욕은 꺽이질 않았다. 어느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자 기차에 대한 관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전쟁직후의 어수선함 속에서는 나라의 동맥도 만신창이가 됐다. 기차바퀴의 브레이크노릇을 하는 선철이 철도청보다는 암시장과 주물소에 더 많고 지금의 베어링 대신 썼던 모사와 면사로 만든 기름뭉치는 군불거리로 시장에서 공공연히 팔렸다. 부속을 제대로 못갖추고 달리던 기차에서 불이 나거나, 탈선을 하는 사고까지 생기는 걸 보면서 윤씨는 철도환경을 개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전기만 알던 그가 기차를 연구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시밭길을 걷는 일이었다. 기차를 알기위해 기차에서 살다시피하다보니 무임승차로 쫓겨나기도 한 두번이 아니었고 가장구실을 못하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3년간의 각고끝에 그는 신형 제륜자(制輪子)와 기존의 기름천덩어리를 대신할 차축급유기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 발명품이 교통부에 관납품으로 지정돼 그는 순천에서 서울로 옮겨앉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두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행운은 결코 오래 그의 곁에 머물지 않았다. 겨우 3번째 납품을 한 직후 4·19혁명이 터져 정부가 바뀌자 전(前)정부와의 약속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있는 일을 선택한다. 새로 시작한 일은 바로 특허법률사무소의 기술부장. 이미 일제시대에 까다롭다는 일본특허의 관문을 뚫고 자동손전등과 방독면으로 두건이나 특허를 획득한 바 있고 기차관계로 우리 정부에서도 특허를 받아본터라 다른 사람이 특허를 딸 수 있게 하는 일에는 지신이 있었다.

고용된 입장으로 몇년을 일하다가 변호사를 한사람 초빙해 앉혀놓고는 직접 사무소를 차렸다. 그의 수완이 녹녹찮아 사무소는 곧 명성을 얻게됐고 66년에는 현장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특허 실용신안 의장 상품 수속의 실제'라는 책도 엮어 내놓았다.
 

윤씨의 김양식구로 만든 시범양식장. 만조가 되면 누웠던 양식구들이 곧추서 김발을 들어올린다.


'이생 다하기 전에 큰 발명을'

그러나 특허사무소를 차린 지 17년만인 지난 78년 그는 자기생애에 기장 커다란 안정을 가져다줬던 이 사무실의 간판을 내린다. 발명연구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내나이 육십하나였습니다. 특허사무실이 잘 돼서 돈을 꽤 벌었어요 강남 여기저기에 노른자위 땅도 있고 집도 네 채나 됐습니다. 돈 이만큼 벌어놨으니 더 늙기 전에 우리나라를 위해 훌륭한 발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는 기차대신 바다로 눈을 돌렸다. 완도에 실험실 역할을 하는 양식장을 조금 사서는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양식기구로 김 기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김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높아 어디서 질좋은 김이 나온다는 소문만 퍼지면 일본수산업자들이 어떻게든 알고 찾아와 '싹쓸이' 구매를 해가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벌이가 좋은 만큼이나 김농사는 보통으로 손이 많이가는 일이 아니다. 자라는 동안 매일 일정시간은 햇볕을 보아야하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김발을 들어올려줘야 했다. 일본인들은 햇볕을 안쬐어도 김이 썩지않고 파래등이 끼어들지 않는 염산처리 방법을 개발해냈지만 양식장 주변의 바지락까지도 몰살시키는 염산의 유독성 때문에 이 방법은 일본에서도 금지되고있다. 윤씨는 일본인들이 외국인투자기업의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이용해 우리 바다를 염산으로 더럽혀가며 대량으로 김 양식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의 발명품은 '신형부류식(浮流式) 김 양식구'. 이름 그대로 바닷물이 들고나는데 따라 플라스틱 양식구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발을 자동적으로 세우고 눕히기 때문에 일손을 훨씬 줄일 수 있다는 것. 이미 일본특허도 받아놓은 터라 일본수산기업에 특허실시권을 팔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지만 계약단계가 되면 이런저런 트집이 생겨 생각만큼 일이 쉽지는 않다.

10여년 연구생활 끝에 있던 가산은 급할 때마다 처분하고 남은 것은 집한채. 당장 연구비 몇십만원이 아쉬운 나날이지만 오늘도 그는 연탄보일러실 한켠의 자기 책상을 지키고 있다. '발명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편안히 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도 인생에 후회나 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후배들은 자기처럼 나라를 위해 큰 발명을 하겠다고 일을 벌리지만 말고 조그만 아이디어에서부터 출발하라는 당부를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온 날이 어쨌다해도 발명에 신들린 그의 삶은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같다.

"나 곧 성공할 자신 있습니다."
다시 돈을 벌면 가난하고 아이디어 좋은 발명가들의 뒤를 돌보고 싶다는 윤씨의 간절한 다짐이었다.

199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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