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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용어의 비과학적 사용 삼가야

퍼지 인공지능 가전제품, 과연 자격있나?

요즘 시중에 나온 가전제품들을 보면 하나같이 그 명칭앞에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가령 퍼지세탁기 인공지능TV 뉴로퍼지팬히터 등등 짤막하고 알쏭달쏭한 문구를 빠짐없이 챙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꾸밈 용어들은 제품의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들인데 대개가 일본에서 그 아이디어 따온다. 조어(造語) 잘 하기로 소문난 일본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급조어를 아무런 중간검증 절차없이 들여와 마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업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신조어는 판매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마구잡이 도용에 제동을 걸려고 해도 그리 수월하지가 않다. 아무튼 첨단이란 느낌을 주는 용어에 취약한 면을 보이는 소비자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한 이러한 용어의 '장난'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1956년 미국의 다트머스대학에서 열린 조그만 모임으로부터 시작된 인공지능 연구는 마빈 민스크, 존 맥커시 등 천재들과 수많은 관련연구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그동안 상당한 성과를 보였지만 아직까지 지능이 있는 컴퓨터를 만든다는 최종목표의 시발점에 머물러 있다. 비유컨대 세살바기의 지적 능력을 따라가는 것도 요원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최고수준의 학문이 지향하는 트레이드 마크인 AI(Artificial Intelligence)를 거침없이 가전제품에 붙이는 것은 다소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주 먼 훗날에 스스로 생각하는 컴퓨터를 개발할 경우, 그 앞에 다시 요즘 즐겨 쓰는 울트라(ultra) 또는 슈퍼(super)를 첨가해야 하지 않을까.

백번을 양보해 생각해도 단순히 마이컴 몇개 달려 있는 것을 인공지능제품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인공지능의 본래의 개념을 오도할 소지가 큰 것이다.

'애매한'이란 뜻을 가진 퍼지(fuzzy)도 모호하게 적용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자데교수(전자공학)가 1965년에 처음 제창한 퍼지이론에서 잽싸게 한 단어를 따온 일본인들은 퍼지란 용어하나로 한동안 침체했던 전자업계를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그 선두주자였던 마쓰시타전기는 90년 2월에 퍼지가전제품 제1호인 '애처호(愛妻號) 데이퍼지(Day fuzzy) 세탁기'를 선보였는데 판매가격이 종래의 세탁기보다 1만엔이나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날개돋친 듯이 팔렸다. 그들은 퍼지제품이 곧 일본을 평정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판매에 성공을 거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봐줄 수 있다.

그러면 국내사정은 어떤가. 가전 3사가 비슷한 시기에 퍼지제품을 시장에 내놓았고, 서로 자기 것만이 진짜 퍼지라고 주장, 소비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어느 것을 진짜 퍼지적용 제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퍼지이론 자체가 완성된 이론이 아니고 국내에서 퍼지연구를 시작한 지 불과 2, 3년 밖에 안됐는데 퍼지적용 가전제품이라고 내놓고 선전한다면 과대망상적인 표현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일본제품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에서는 작년에야 비로소 퍼지관련학회가 설립됐고, 현시점에서 퍼지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학자가 10명 내외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한 퍼지학자는 "퍼지가전제품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언급, 실제 연구와 제품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나를 대변해 주었다.

"뭐든지 알아서 척척 해준다." 이는 퍼지제품과 인공지능제품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는 모토다. 하지만 이런 선전문구는 실제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 제품을 직접 쓰고 있는 대다수 주부들의 푸념이다.

또 최근에는 뉴로(neuro)란 표현도 종종 등장한다. 차세대컴퓨터인 뉴로컴퓨터(신경망컴퓨터)에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첨단의 느낌이 물씬한 단어다. '신경의'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독자적으로 사용돼 퍼지 인공지능 등과 동격이 되기도 하고, '뉴로퍼지' '뉴로인공지능' 등에서처럼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이때는 인공지능 또는 퍼지보다 더 앞선 느낌을 주는 것이 그 임무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 '뉴로'와 '퍼지'의 장점만을 취했다는 '퓨전'(fusion, 융합이라는 뜻)이라는 신조어가 서서히 전면에 나서고 있다. 퍼지라는 단어에 식상한 소비자들을 새롭게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인 용어가 영업측면 또는 광고측면으로 다뤄지는 것은 극히 곤란하다. 원래의 개념을 완전히 혼란시키기는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이런 과장광고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실제 내용의 1천분의 1 정도를 가미한, 다시 말해 맛만 살짝 보인 것을 전혀 새로운 제품으로 오인, 부적절한 소비행위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퍼지이론을 처음 소개한 자데교수는 최근 서울을 방문해 "내 이론이 이처럼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른바 퍼지적용 가전제품은 퍼지이론의 극히 일부만을 활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어쩌면 퍼지와 인공지능은 침소봉대의 상혼이 낳은 이 시대의 기형아일지도 모른다.

1992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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