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과서가 아무리 좋은 과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해도 일선교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알맹이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눈앞에 다가온 2천년대, 한국이 과학기술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전국민의식의 과학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부쩍 강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눈뜬 후 부터 잠들 때까지 온갖 첨단과학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생활을 지탱하고 있지만 흑백 TV를 보던 20년전이나 오늘에나 '과학대중화'는 변함없이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과학'을 어디서 어떻게 만났습니까? 컴퓨터 자동차 TV 신문 잡지 등 온갖 매개체들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사실 그 첫대면은 국민학교 자연시간의 '각설탕'이나 '민들레'가 아니었는지요?
대다수 국민이 거쳐가는 과학대중화의 가장 너른 터, 교실. 그러나 오늘의 과학교실은 과연 '탐구와 발견의 기쁨'에 어린 눈빛이 반짝이는 산 교육장일까요?
「과학동아」는 올 92년 한해에 걸쳐 과학교사가 직접 쓴 글로 한국과학교육의 현실을 진단하고자 합니다. 수업현장의 기쁨과 고뇌, 동료교사와 교육부에 대한 제안 등 교실에서 보내는 어떠한 편지도 이 페이지를 통해 소개될 수 있습니다. 채택된 원고에는 소정의 원고료와 글이 실린 「과학동아」를 보내드립니다. 원고는 10매 내외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우리는 학력고사를 무슨 과목으로 보아야 해요?"
이제 막 수업을 시작하려는 참에 한 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자꾸 바뀌는 입시안과 교육과정 때문에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정신을 못차리는 판에 학생들은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선생, 지금 3학년 올라가는 애들은 지구과학을 선택해도 수업시간이 배정되지 않아 못 배운다는 거야, 글쎄." 내년 수업계획을 짜던 이선생의 말이다. "아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시험을 보게 해야지 학교에서 선택한 교육과정에 따라 강제로 수업을 받게 해서야 됩니까?" "아니 이선생, 그럼 과학선택따로, 사회선택 따로, 남녀따로 그 복잡한 수업시간표를 짤 수 있어? 만약 학생들이 한쪽으로 몰리면 어떻게 하구?" 학생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이선생과 학교 입장을 고려해 달라는 교감선생의 토론이 한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지만 좀처럼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 것 같지 않다.
이런 장면은 요즘 어느 학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교육과정 개편 및 입시제도 개선안을 놓고 현장에서는 대단한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다. 특히 교사들은 학생들의 질문에 이렇다하게 말해줄 정보가 없다. 교육부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처지인 것 같다. 과학교육의 수준이 날로 형편없어진다는 근거자료를 들이밀며 교육혁신을 요구하는 과학교육연구가들의 주장과 입시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학생 학부모들의 주장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현행 교육과정에 의하면 인문계고등학교의 문과학생들이 선택해야 하는 과학Ⅰ은 사실 그전까지 분리됐던 생물(과학Ⅰ상), 지구과학(과학Ⅰ하)을 둘다 포함한 것이다. 새과학Ⅰ은 문과 학생들이 교양으로서 과학과목을 배운다는 의미로 개설된 과목이었으나 짧은 준비기간에 쓴 교과서는 말만으로 통합이지 생물과 지구과학을 기계적으로 압축해 놓은데 불과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가르칠 때는 서로 다른 선생님이 따로따로 가르치고 단지 시험만 같이 보는 실정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6차교과과정을 적용하면 학교의 과목 선택범위가 더욱 넓어져 당분간 혼란이 가중되리라 생각한다.
이미 다섯차례에 걸쳐 과학교육과정의 개편이 있었지만 개편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혼란은 그 정도가 더욱 깊어만 간다. 이제 현장 과학교사들은 대부분 '어떻게 바뀌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교육과정 개편이 현장교사들의 입장을 반영해서 된 적이 없고, 몇몇 학자들이 외국에서 들여온 이론을 시험대에 올려 놓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육과정은 위에서 결정한 행정명령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씁쓸함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런 경험은 교육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커가면서 교과서보다는 참고서 중심으로 가르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교과서는 대충 시험에 나올 요점을 찍어 가르치고, 문제집을 선택해 훈련시키면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 적응에 익숙한 교사들은 그간 쌓아 온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참고서를 쓰게 된다. 이 참고서는 알게 모르게 입학시험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교과서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악순환은 벌써 교육현장에 뿌리내린 지 오래다.
'과학은 좋아하지만 과학수업은 싫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과학을 많이 배울수록 과학이 싫어진다. '이런 말들은 몇몇 소수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입시난이도에 맞는 문제풀이를 잘하면 그만이라는 교사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 학생들도 조금 색다른 수업방식은 사절이다. 입시문제는 너무 골치 아프고 이야기해 봐야 끝도 없으니까 피해 보자는 경향이 이제는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과학교육이 진정 바른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교육연구자라면 어느 누가 입시를 염두에 두지않고 과학교육에 대한 입안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진행되고 있는 6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는 이와같은 점에 대한 고려가 결여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 현장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느끼고 있는 문제점 몇가지를 지적해 보겠다.
먼저 6차교육과정의 특징으로 과학과목의 시간수가 다소 줄어들었고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기 위해 8가지 계열로 과목을 세분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변화는 획일적인 과학교육의 틀에 식상한 현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개정방향의 장점인데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가 선택한 대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현실에 맞는 교재개발은 제대로 될지, 새로운 방향으로 집필된 교과서가 현장 교사들의 따돌림으로 사장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중학교 과학교사들이 교과를 가르칠 때 자기 전공부분은 어느 정도 자신을 갖고 가르치지만 다른 부분은 결과중심의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은 과학교사들이 준비하지 못한 지식은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현장의 학생들에게 전달이 안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6차개편을 통해 '현대과학과 인간'이라는 과목을 만들겠다는 시도는 과학의 사회성을 무시한 채 가르쳐온 현장에 신선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선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만들어진 교과들은 교육현장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새로운 교과를 설치하려면 그것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교사가 길러져야 하고 이미 현장에 있던 교사들은 몇년에 한번씩이더라도 바뀐 교과서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먼저 마련했어야 한다. 이런 준비는 적어도 십년은 걸리지 않을까?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 허리에 매어 쓸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문제점은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고 또 하루에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장교사들이 과학교육 정책을 세울 때 철저하게 소외당했다는 사실이다. 현장교사들은 절대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과학교육문제해결의 첫 걸음은 현장교사의 자발적인 움직임 없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책입안자들은 모르고 있는 걸까? 이제 현장 과학교사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을 할 때가 되었다. 과학교사들도 어디에서 손 내밀어 과학교육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감을 떨치고 서로서로 힘이 되어 함께 하는 과학교육을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교사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고자 모인 과학교사모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떠들고 난장판인 아이들, 입시경쟁에 눈을 번뜩이는 아이들, 대학에 한명이라도 더 붙이는 것이 지상목표라고 외치는 교육관료들을 사이로 한채 오늘도 교사들은 교실문을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