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일본 과학계는 독창성이 없을까. 흔히들 일본인들을 '모방의 천재' 또는 '응용의 천재'라고는 하나 창조성이 뛰어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개량은 할 줄 아나 스스로 만들 줄은 모른다는 것이다. 과학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국서 탄생한 갖가지 첨단과학기술이 일본인의 손에서 꽃피는 경우는 많으나 일본에서 탄생한 첨단과학기술은 그리 많지 않다. 트랜지스터는 미국인들 손에서 탄생했지만 이를 이용한 전자산업은 일본인들에 의해 만개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코울만박사가 1년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의 과학단체 과학자 과학정책 등을 연구한 결과를 '과학아사히'에 발표했다. 그는 만인의 입에 회자되는 '독창성이 없는 일본의 과학' '기초연구보다는 응용연구가 앞선 나라' '기초과학과는 거리가 먼 일본인의 국민성' 등에 대해서 특히 미국과 비교, 연구결과를 밝힌 것.
1989년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스'는 1989년 3월호에 일본의 과학기술 연구조직과 연구양식을 미국과 비교해서 '일본이 가부키(歌舞伎, 일본의 전통적인 가무)라면 미국은 브레이크댄스'라고 표현했다. 일본의 과학이 주어진 일정한 양식에 따라 춤을 추는 가부키라면 미국의 과학은 마음 내키는 대로 스텝을 밟아 나가는 브레이크댄스라는 것이다.
일본의 과학자나 평론가들 사이에는 일본의 종교철학이 자연과학연구의 성격과 방향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유일신(唯一神)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같은 과학은 결코 육성될 수 없다는 것. 그들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의 과학자들은 유일신적인 멘탈리티에 기초해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를 추구한다는 것. 그러나 일본 신의 숫자는 8백만이나 되며(神道) 자연계와 일치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교의 사고방식이 영향을 주어 분석적인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코울만박사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과학도 기본적 원리를 추구하는 면에서 미국이나 유럽과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만약에 일본의 과학자들이 분석적이지 않았다면 오늘의 일본과학기술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인 과학자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무저항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논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또한 연구테마나 접근방법을 결정하는데 있어 적극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한다. 또 일본이 창조성을 발휘해야 하는 기초과학의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국민성'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코울만 교수가 1년동안 만난 일본의 과학자들은 미국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취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과 의견이 다를 때는 논쟁도 마다하지 않는 적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결국 코울만 박사의 연구결과는 어떤 문화권의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창조성이 떨어진다는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어떤 인류학자도 '국민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문제는 아직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질서를 우선하는 사고방식은 기초과학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점. 미지의 첨단분야 연구는 가능한한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참가, 아이디어를 내놓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다. '관계자라면 누구든지 명답을 가질 수 있다'. 이 말이야말로 효과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수천번 되뇌어야할 명제다.
그러나 일본의 의사결정은 상층부에서 이루어진다. 하위연구자들은 평가나 비평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일례로 연구비를 책정하는 과정이 미국의 과학재단(NSF)이나 국립보건원(NIH)과 다르다. 일본의 문부성 과학기술 책정제도에는 연구비 취득자에 대해서도, 기각된 측에 대해서도, 왜 그렇게 됐다는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결국 코울만 박사의 결론은 일본의 과학이 현상적으로 기초과학이 떨어지고, 일부에게나마 독창성이 결여됐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국민성'이 아니라 '사회제도'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