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학생들은 대학입시 접수창구에서 자신의 인생행로가 결정된다. 어떤 학생은 마지막까지 눈치작전을 벌이다 몇번씩이나 고친 후에 지망학과를 써넣기도 한다. 대학의 학부과정에 입학할 때 자신의 전공이 정해져버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더구나 요즘은 각 대학이 거의 과별로 신입생을 모집하기 때문에 진학을 앞둔 수험생들이 자신의 적성보다 학과의 인기도와 점수에 맞춰 일생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순간적으로 해버리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최근 서울대 전기공학과 전자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 등 전기(電氣)관련 3개학과가 자발적으로 통합을 결정한 사실은 이러한 측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학부과정에서 비슷한 과목을 배우는 3개학과가 '과'가 아닌 '학부'형식으로 합치면 학교 교수 학생 모두에게 유리한 점이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선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4년동안 기초적인 과목들을 공부한 후 석사과정에 들어갈 때 자신의 세부전공을 선택하므로 입시창구에서 시간에 쫓겨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 또 대학졸업후 진로선택시에도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학교측으로서도 80% 이상 중복 개설됐던 학과목을 통폐합시킬 수 있고 실험기자재의 중복구입문제도 해결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행정업무를 줄일 수 있고, 교수들의 공동연구도 한층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3과통합추진작업을 주도해온 한송엽교수(전기공학과)는 "3, 4년 전부터 3개과가 교과과정을 서로 조정한다든지 기초과목을 확대 한다든지 하는 준비작업을 해왔다"며 "앞으로 기계공학 화학공학분야의 학과들도 비슷한 과정을 밟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70년대 한때 단과대학 단위 또는 몇개 학과씩 묶어 계열별로 신입생을 모집했던 각 대학들은 80년대 이후 대부분 과별모집으로 선회했다. 게다가 다양화된 산업사회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학과들이 잇따라 설립됐다. 이러한 경향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잘못된 제도의 반영이기도 했다. 가령 80년대 대학 정원이 대폭 늘어났지만(지방대학이나 지방 분교에 한정) 과별 정원은 묶어두는 반면 학과수를 늘리는 쪽으로 진행됐다. 이들 신설학과들은 대개 우수한 학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첨단 학문에 걸맞는 명칭을 붙였지만 교과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존 학과들과 별차이가 없어 오히려 학문의 폭만 좁힌 꼴이 됐다.
대학마다 비슷한 학과들이 즐비한 원인으로 교수정원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립대학의 경우 학과당 교수 정원이 10명을 넘지 못해 교수를 더 초빙하려고 학과를 신설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사립대학에서도 '학과신설'이란 명분이 있기 전에는 재단에서 교수충원을 극히 꺼리는 실정이라고 한다.
기업들의 인력정책도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했다. 기업들은 곧바로 데려다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을 대학이 양성해 주길 바랬다. 그러다 보니 특정 학과의 졸업생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고 다른 학과 출신들은 반대로 구직난에 허덕이게 된다. 대학 4년동안 이들이 배운 내용이 기업에 들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날 리는 만무하다.
지금은 과학기술원(KAIST)의 학부과정으로 편입된 과기대는 설립 당시부터 '무(無)학과제도'를 표방하고 있다. 입학 당시 학과정원은 없고 전체정원만큼 학생을 모집해, 이들이 2년동안 여러 과목을 두루 공부해본 후 3학년에 올라갈 때 자신의 전공을 결정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면 졸업하기 전에 얼마든지 과를 바꿀 수 있다. 최종적인 전공결정은 석사과정에 들어갈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서울대도 자연대나 공대의 경우 대학원 진학률이 70%가 넘는다. 학부과정은 석박사과정을 하기 위한 기초과정 쯤으로 인식하는 게 요즘 풍토라는 것이다.
한송엽교수는 "학문이나 산업기술이 너무나 빨리 발전하기 때문에 기업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을 대학이 양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기업이 데려다 훈련시킬 수 있도록 기초실력을 단단하게 해주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라고 설명한다.
대학의 학부과정은 점차 본격적인 학문연구를 하기 위한 기초과정, 또는 기업에서 업무를 익히기 위한 교양과정 정도로 변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학과를 세분화하고 대학 진학과 함께 자신의 전공이 결정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군다나 이렇게 결정된 전공이 평생토록 꼬리표로 붙어 따라다니는 우리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