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자통신연구소가 소관부처를 체신부로 이관시켜달라고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5공시절 무리한 통폐합이후 내연되고 있던 부처간 영역분쟁이 재연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이공계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사회의 기술수요와 시대변화에 맞게 기능과 위상을 정립해가지 못하고 여전히 흔들리고 있어 과학기술의 자립적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소는 정부가 연구소의 경상운영비와 연구개발비의 상당부분을 예산으로 책임지는 공공연구기관으로서, 지난 66년 제3공화국이 월남전에 참전한 '피의 대가'로 미국 존슨대통령에게서 기부받아 서울 홍릉에 과학기술연구소(KIST, 지금 과학기술연구원)를 세운 이래 현재 21개로 발전했다.
KIST 전자통신연구소 기계연구소 화학연구소 전기연구소 인삼연초연구소 해사기술연구소 유전공학연구소 원자력연구소 동력자원연구소 표준연구소 해양연구소 항공우주연구소 원자력 안전기술원 천문우주과학연구소 시스템공학연구소 과학기술원(KAIST) 과학재단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과학기술정책연구소 원자력병원이 그 이름들이다. 이 가운데 KIST 등 앞의 8개기관은 산업기술관련 연구기관이고 원자력연구소 등 그 다음의 8개기관은 공공기술관련 연구소이며, KAIST등 나머지 5개기관은 교육과 연구지원을 주목적으로 한다. 이들은 KIST와 KAIST의 일부(서울), 전기연구소 기계연구소(창원)를 빼고는 대덕연구단지안에 몰려있다.
이들 21개기관에는 6월말 현재 1만 1백14명이 일하고 있다. 예산은 모두 5천3백10억원으로 정부출연이 34%(1천8백3억원), 한국전력이나 한국통신 등 투자기관이 13%(6백75억원), 기업 등이 55%(2천8백32억원)를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공계 정부출연연구소들은 아직도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요 심장인 셈이다. 80년대 들어 대학의 연구기반이 강화되고 10년 남짓만에 기업연구소가 1천개를 넘어 60, 70년대의 독점적인 지위를 잃었지만 이들 연구소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에 걸쳐 변함없이 한국사회 생산력발전의 견인차로 남아있다.
영역분쟁 재연시킨 전자통신연구소
그러나 이 심장과 견인차에 요즘 또다시 균열의 조짐이 엿보인다. 틈은 세 방향에서 오고있다. 첫번째는 컴퓨터 반도체 통신기술개발의 중심체인 전자통신연구소(소장 경상현)가 지난 5월 '정보통신기술진흥을 위한 우리의 제언'을 발표하면서 불붙은, 전자통신연구소를 지금대로 과학기술처 밑에 두느냐 체신부로 이관하느냐 하는 소관다툼이다. 영역분쟁이 재발한 것이다.
연구소쪽은 87년부터 91년까지의 출연금 현황을 살펴본 결과 주무 부처인 과기처로 부터는 출연금과 특정 연구비를 합쳐 7백35억원(20%)밖에 받지 못했다며 이럴바에는 전체 출연금의 70%인 2천6백40억원을 댄 한국통신과 체신부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81년 1월부터 이공계 출연연구소들을 통합관리해 온 과기처는 '통일적인 과학기술 행정과 연구의 중립성'을 이유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세다.
이 다툼은 81년 연구소 통폐합때 관할연구소를 과기처에 뺏긴 상공부 동자부 등으로 옮겨붙어 자칫 '제3의 영역분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소관을 둘러싼 '땅따먹기'다툼은 이전부터 줄곧 있어 왔다. 이 가운데 가장 크게 드러난 분쟁은 경제기획원이 88년 2월부터 7월사이에 모두 네차례에 걸쳐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기능재정립 방향'을 발표하면서 터졌다. 정부 예산권을 남용하여 막 결성되기 시작하던 연구기관 노동조합을 탄압할 목적으로 시도된 이 계획은 엉뚱하게 관할권 논쟁으로 번져 각 부처가 서로 연구소들을 가져가겠다며 치열하게 싸웠다.
이 싸움은 행정개혁위원회의 이름으로 89년 여름 행정조직의 재정비가 거론되자 재판되어 또한번 뜨거웠다.
이번의 전자통신연구소 사태를 비롯한 이런 소모전은 정부의 연구개발정책전반과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 계획 수립에 파행의 주름만 더할뿐 생산적인 논의와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다. 소관공방은 필연적으로 같은 분야의 연구개발계획을 각 부처별로 각각 수립하게 만들고, 수년에 걸친 위상개편 논의로 연구원들도 확실한 연구방향을 잡지못하는 해독을 낳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소유 보관 감독 등의 개념에서 탈피해 정부출연연구소에 대한 범국가적 공동활용체제가 정착 된지 오래됐고, 산·학·연 공동의 기술컨소시엄 또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선진 여러나라와 많은 기술격차를 보이면서도 해묵은 부처 이기주의에 빠져 출연연구소들이 대형·복합연구개발사업의 구심체 역할을 못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부출연연구소들이 80년대 중반이후 재벌 그룹들의 연구소들에 밀려 2류연구소로 전락했다. 예비과학기술자들이 선망해 마지않던 전자통신연구소도 88년과 90년의 경우 이른바 서울의 일류대학출신 신입연구원이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 정부출연연구소가 처한 오늘날의 모습을 전해준다.
두번째로 정부출연연구소들의 흔들리는 위상은 최근 총리실 지시로 서정욱 과기처차관이 합동평가단장이 되어 추진했던 출연연구소 평가작업의 소용돌이속에서도 감지된다.
이번에 평가대상으로 지목된 연구소는 KIST 등 과기처산하 19개 연구소와 생산기술연구소(상공부) 건설기술연구원(건설부) 식품개발연구원(농림수산부) 등 22개 기관이다.
김진현 과기처장관은 이번 평가의 목적으로 △출연 연구기관의 미래지향적 기능과 역할 정립 △연구개발 사업의 성과분석 및 연구개발 투자정책의 대안제시 △인사 회계 조직관리 등 기관운영의 효율성평가 등 셋을 들고 있다.
그러나 한창 진행중인 합동평가의 와중에서 흘러나온 소식은 이와는 궤가 다르다. 어느 연구소를 무슨 부처로 보낸다는 잠정결정이 새어나와 이를 막거나 이 중간결정을 가속시키기 위한 연구소 기관장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선도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역할을 재정립한다'는 평가초기의 취지는 이미 뒷전으로 밀려났고, 뺏느냐 뺏기느냐의 소관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출연연구소의 기능전환과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는 세번째의 불건강한 징후는 기술과 사회를 잇기위해 국내 처음으로 세운 생산기술연구원(원장 박우희)의 운영과정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상공부는 이른바 제조업의 경쟁력강화를 위해 산업계에 생산기술을 보급한다며 89년 11월 이 연구소를 세웠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당초의 설립목적과 달리 상공부의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발판으로 고품위텔레비전(HDTV)등 인기가 있다는 대형연구개발과제에만 분야를 가리지 않고 도전장을 내고 있다. 이같은 과욕은 급기야 남이 개발한 신경망칩을 자체개발품이라고 허위 발표하는 난센스를 빚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정부출연연구소들은 이제 연구의 주관 및 조정자와 민간이 할 수 없는 대형 복합기술의 개발자로 자신의 역할을 질적으로 수정할 시점에 와있다.
60, 70년대의 정부출연연구소들은 기업과 대학의 연구개발 능력 부족으로 산업계에 대한 기술지원을 맡았고, 80년대에는 중소기업 기술지원과 첨단기술개발이 임무였다.
그러나 우수공학센터(ERC)와 우수과학센터(SRC) 등 우수연구집단의 집중 설치로 대학의 연구기반이 탄탄해져가고 기업부설연구소와 산업기술연구조합 또한 급증하는 현시점에서 공공연구소들이 이전의 틀속에 갇혀 소관다툼만 벌이고 있을 수는 없으며 과감한 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다.
말단관료가 연구소 운영 좌지우지
먼저 정부출연연구소를 모든 정부부처와 기관기업이 공동활용할 수 있는 범국가적 활용체제가 구축되지 않고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하기 곤란하다. 정부가 지원해야할 기본경비는 현행과 같이 지원하되 연구기관의 활용과 육성은 모든 수요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젝트 계약방식으로 자유롭게 하는 방안이다.
두번째는 연구소의 자율적인 운영이다. 사실 70년대에는 오히려 이사회의 임원선임권을 정부에서 존중하고 재정관리와 연구과제 선정과정에서 연구소의 자율성이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인사 재정 연구 관리의 모든 면에서 정부의 직접개입이 강화되어 각 연구기관의 인사직제 내용이나 인사위원회 개최횟수 등에도 관의 입김이 미쳤다. 88년 11월 동력자원부가 동력자원연구소에 시달한 '에너지 자원정책 연구과업 수행지침'은 그 좋은 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연구소는 동자부가 정책연구과제를 작성해 과업 요구서를 통고하면 이에 따라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고, 연구수행 단계에서도 일일이 동자부 담당관에게 보고 해야 하며, 공무원이 연구를 평가 수정하고 보고서 발간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권도 갖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연구소는 정부의 연구과업 수행을 위한 충실한 '꼭두각시'일 따름이다.
이런 연구통제는 몇년전에 과학기술원으로 하여금 있지도 않은 '북한의 금강산댐으로 인한 예상피해 보고서'를 만들게 해 "금강산댐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서울 63빌딩이 물에 잠긴다"고 국민을 위협, 연구소를 정권 유지와 이데올로기 조작에 악용하기도 했다. 미래학회 회장인 이한빈 박사는 "연구관리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는 2000년대를 준비하는 현단계에서 더이상 쓸모가 없으며, 정부관료의 지식이나 판단만으로는 연구소를 꾸려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기관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의 구성원을 정부 관료나 관변인사로 채워 연구소 소속원들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는 제도도 불식되어야할 우선 과제로 꼽힌다. 권한과 책임이 불명확하고 전문성과 관심이 결여된 인물로 구성하는 이사회는 결국 의사결정기능의 요식화를 불러 출연연구소치고 대리참석한 '가짜이사' 들로 붐비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 대부분의 연구기관 설립자가 박정희 전두환 등 설립당시의 대통령으로 되어 있고, 이사장을 퇴임관료나 현직 장관의 선배로 채워 연구소를 정부부처의 하부구조로 전락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부처의 말단관료조차 각 연구소를 자신의 하부기구인양 마음대로 통제하려 드는 현실이 이를 웅변해 준다.
연구원들이 해결주체로 나서야
연구기관 설치목적과 연구내용 수행 사이의 괴리도 극복되어야 할 숙제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에 의해 또는 정부주도로 설립된 모든 연구기관들은 설치법령이나 정관에 분명히 '사회공익적 연구수행'을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주무부처가 정책 집행에 필요해서 지시한 연구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불편부당하고 중립적인 연구가 아닌 정치적 연구수행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같은 구조 아래에서 정부출연연구소들은 기관장을 중심으로 모인 친정부적인 소수인물들에 의해 파행적인 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직 노동자들은 전체 연구의 의미와 틀을 모른채 소외된다.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한순간이라도 연구를 게을리하면 대열에서 탈락되던 외국의 연구풍토에 길들여졌던 과학자들도 국내의 정부출연연구소에 유치되어 오면 그때부터 일손을 놓고 골프나 주식얘기로 소일하는 것이 현실의 슬픈 단면이다.
부분적인 연구성과와 낙관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인들이 대외 기술종속의 틀을 아직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정부가, 예산권을 남용해 연구자율성 확보를 위한 연구기관 노동조합의 활동을 억제하고 국민들에게 사용주와 노동자간의 임금분쟁으로 왜곡시켜 문제의 건강한 해결을 더욱 어렵게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부출연연구소들이 국가과학기술체제의 핵심주체인 만큼 이번에 제기된 일련의 현상들을 계기로 이들 연구기관의 올바른 방향성을 잡아나 가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임에는 틀림없다.
'모방의 천재'로 알려진 일본도 자체 기술개발로 오래전에 방향을 선회,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달리 '창조도 하는 천재'의 대열에 올라섰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일하는 1만여 과학기술자들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한국사회의 올바른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국민대중이 자립적 생산기반의 확보를 첫번째 임무로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는 데서부터 매듭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