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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빠른 속도는 이제 의미가 없다. 얼마만큼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등장했다.

크레이컴퓨터가 무대위에서 번쩍거리고 있을 동안, 객석에서는 일본이 꿈틀대고 있었다. 일찍부터 과학기술경쟁에서 선두의 위력을 제2차 세계대전의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절실히 느껴온 일본은 몇가지 획기적인 결정을 했다.

1981년 10월 일본인들은 엄청난 계획을 전세계에 발표했다. 모두들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내심 두려워했다. 마치 열살짜리 소년에게 테러협박전화를 받는 기분을 미국은 느꼈을 것이다. 일본이 발표한 두가지 계획은 '내셔널 슈퍼스피드'프로젝트와 제5세대 컴퓨터개발프로젝트였다. 몇사람은 삭발까지 하고, 그중 한 책임자는 계획이 실패했을 경우 할복자살까지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말 목숨을 건 기술전쟁의 처절함을 실감나게 했다.

슈퍼스피드 프로젝트의 핵심 골자는 그 시대의 챔피언인 크레이-I 보다 무려 60여배나 빠른 초당 1백억회의 실수계산이 가능한 기계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5세대 컴퓨터계획은 더욱 엄청난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더러는 완전한 허풍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에 불안을 느낀 많은 나라들이 일본의 이러한 계획을 계기로 공동연대하는 시초가 되었다. 즉 도쿄선언은 컴퓨터개발경쟁을 회사차원에서 국가차원으로, 더 나아가 국가블럭간의 경쟁으로 확산시켰다. 일본인들은 그들 특유의 사무라이정신을 들먹이며 야심만만하게 일을 진척시켜 나갔다.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한 포스터가 있었다. 하늘에는 인류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도달할 궁극적인 목표를 상징하는 물체가 있고, 그 아래에는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두개의 탑 위에서 하늘의 별을 따기 위해 버둥대는데 한쪽은 미국을 상징하는 탑이고 다른 한쪽은 일본을 상징했다. 그리고 미국을 상징하는 탑의 높이는 일본보다 약간 높았다. 그런데 미국탑위에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별을 따기 위해서 서로 누르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탑위에는 무등을 탄 사람들이 손을 높게 뻗친 상태로 서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의 손이 미국측보다 높이 올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인 그림 이었다.

「반도체왕국」일본의 도전

일본의 컴퓨터산업을 강하게 만든 원천이 바로 수직적인 사회구조에서 나온다. 사회구조가 전통적인 수직구조였으며 기업 또한 수직하청구조였다. 예를 들어서 미국회사는 컴퓨터를 제조하는 회사와 반도체를 제작하는 회사들이 수평관계에 있다. 따라서 다양한 제품들 중에서 입맛에 맞는 부품을 싼값에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자신의 목적에 맞는 칩을 주문설계 하는데는 여러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다. 이에 비해 일본대기업은 반도체회사를 직접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빠른 시간내에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

세계 최초로 2백56KD램을 생산한 히타치는 이러한 저력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드디어 히타치 후지쓰 일본전기(NEC)가 슈퍼컴퓨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먼저 히타치가 제품을 선보였다. S810-20으로 명명된 이 컴퓨터는 약 6백메가플롭스(초당 실수계산을 6억번 수행)의 성능을 자랑했다. 연이어 후지쓰에서 발표한 VP-400은 약 1천2백 메가플롭스의 속도를 냈다. 스타는 뒤에 나타났다. 1985년 말에 소개된 일본전기의 SX-2는 VP—400보다 무려 10배나 빠른 1.3기가플롭스의 기절할만한 속도를 내보였다.

이제 크레이-I의 성능은 골목대장의 완력 정도로 밀려나게 됐다. 그러나 미국측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도대체 슈퍼컴퓨터에서 최고속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고속도라는 것이 실제 문제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컴퓨터회사에서 자랑하는 최고속도는 마치 경주용 자동차를 허공에 매달아 두고 헛바퀴 돌릴 때의 최고속도"라고 크레이사께서 비꼬았다. 문제는 실제로 현업에서 사용했을때 얼마나 제대로 굴러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더러는 자갈길도 가고 또한 질퍽대는 황톳길도 잘 달려야만 좋은 자동차가 되듯이, 펀치볼을 가장 세게 치는 사람이 복싱챔피언이 아니듯이, 사물의 평가를 한 가지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에튜드4번과 「린팩」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서 과학자들이 만든 문제가 있다. 마치 피아노음악에서 쇼팽의 '에튜드 4번'의 역할과 같이 컴퓨터 프로그램의 에튜드 4번이 있다. 린팩(LINPACK)이라고 명명된 패키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부터 성능을 비교하려면 자신이 즐겨 수행하는 레퍼토리가 아니라 린팩으로 성능을 검사해야만 한다.

마치 음악대학 입시에서 에튜드 4번이나 무반주 샤콘이 그러하듯이, 린팩은 슈퍼컴퓨터가 부려야 할 갖가지 기교들이 담겨있는 악보와 같다. 린팩을 시원스러이 풀지 못한다면 골목대장으로밖에 취급받지 못할 것이다. 1988년 한 연구소에서 린팩으로 조사한 각 슈퍼컴퓨터의 성능평가는 (표)와 같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다. 에튜드를 잘 쳐서 음대에 입학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음악 전부가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린팩과 같은 표준문제를 잘 풀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유일한 성능평가 기준으로 대치될 수는 없다. 여하튼 일본전기에서 생산한 SX-2의 강펀치에 미국업체들은 한동안 얼얼했을 것이다. SX-2가 허우대만 멀쩡한 슈퍼컴이라는 풍문을 불식시킬 좋은 기회가 왔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어느 연구 기관에서 슈퍼컴퓨터 공개입찰 공고를 냈다. 그 행운을 SX-2가 차지했다. 입찰에서 탈락한 회사들이 일본전기를 미국 상무부 무역분쟁실에 제소했다. 그러나 결과는 일본전기의 승리로 돌아갔다. SX-2의 승리는 덤핑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싼 제조가격과 풍부한 소프트웨어가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SX—2가 획기적인 구조나 첨단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때까지 발전된 병렬처리기술을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결합한 결과로 얻은 승리였다. 그것도 크레이 컴퓨터의 거의 절반가격이므로 구매자들은 당연히 SX-2를 선택 했다. SX-2의 구조에 혁신적인 아키텍처를 기대한 많은 사람들은 다소 실망했다.
 

(표) 린팩으로 평가한 슈퍼컴퓨터의 성능
 

준(準)슈퍼컴 「코스믹큐브」

슈퍼컴퓨터를 개발한 사람들은 궁극적인 문제가 병렬처리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폰노이만 구조는 이제 완전한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의 병렬 처리를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 연결구조와 이를 지탱할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큰 장애물이 됐다.

오랫동안 인간의 뇌를 연구한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는 강력한 처리기를 수십 개 정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두뇌는 개별적으로 보면 참으로 보잘것 없고 간단한 신경세포(뉴런)가 수십억개 얽혀있는 구조다. 다시 말해서 단순한 기능의 집합은 개별 기능의 단순한 총합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고무받은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간단한 기능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1백만개 이상 연결해서 동작시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 각 프로세서를 직접 관장하는 중앙처리기도 없고, 오로지 주위의 입력만 받아서 그 결과를 되풀이한다고 하자. 아마도 이 과정을 하나하나 측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여간 인간의 뇌가 그러하듯이 무엇인가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많은 기대를 한다. 대규모 병렬처리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선두주자는 일리노이대학의 데이비드 쿡이었다. 쿡은 1백28개의 프로세서를 연결하여 세다(Cedar)라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세다의 궁극적인 목표는 X-MP의 성능과 맞먹는 값싼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어서 코스믹큐라는 상품명으로 생산 된 캘리포니아공대의 컴퓨터가 소개됐다. 코스믹큐브의 연결구조는 초큐브(hypercube)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985년 인텔사에 의해 발표된 코스믹큐브는 1백28개의 독립된 처리기(processor)를 가지고 있었다. 가격은 크레이의 1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성능은 절반정도에 도달했으니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초큐브구조를 이용한 대용량의 병렬처리기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소개됐다. 준슈퍼컴퓨터라는 다소 묘한 이름을 가졌지만 상당한 속도를 낸다.

데이터플로 컴퓨터

그러나 문제는 바로 어떻게 대용량 병렬처리 프로그램을 작성하는가 였다. 흔히 병렬처리기를 소개할 때 기존의 직렬처리기에 비해서 몇배가 빠르다고 소개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그 처리기를 통하면 바로 몇배로 속도 증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해서 10개월 걸리는 일을 열사람이 하면 한달정두 걸릴까. 물론 그러한 일도 있고 그렇지 않는 일도 있다. 임신해서 아기를 낳는데. 한 여자가 열달 걸린다고 해서, 열명의 여자를 동원해서 한달만에 출산할 수는 없다. 계산문제도 그렇다. 병렬화가 잘되는 문제는 병렬처리기에서 빛(?)을 보지만, 그렇지 않고 자체적으로 병렬화가 어려운 문제는 병렬처리기가 아무리 좋아도 오히려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이 있다고 하자. 다섯명의 주방장이 달려들어 한 그릇의 된장찌개를 만든다. 어떻게 일들을 나누어야 하며 어떻게 주방용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없이 빨리 끝낼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시간이나 걸린다면 이것은 완전히 코미디감이다.

따라서 초대형(대규모)병렬처리기의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것은 병렬처리기 만드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안된 개념이 데이터플로(dataflow)컴퓨터다. 즉 어떤 직렬프로그램을 넣더라도 컴퓨터가 최대한의 병렬성을 찾아서 수행해 준다는 아이디어다. 이는 1970년대 MIT의 잭 데니스가 제안했지만 하드웨어의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값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등장으로 그 실현을 보게 되었다.

데이터플로 컴퓨터에서 모든 데이터는 각기 기억장치속을 떠다니 다가 자신의 계산이 가능한 시기가 오면 언제든지 계산된다. 그러나 최근 연구동향에 따르면 이렇게 멋있는 개념이 실제로는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세기의 베비지, 힐리스

데이터플로구조가 약간 시들 해질 무렵 처리기의 숫자에서 한 단계를 넘는 새로운 기계가 등장했다. 커넥션 머신(connection machine)이라는 이름의 이 기계는 젊은 공학도인 다니엘 힐리스가 만들었다. 힐리스는 전형적인 공학도는 아니었다. 대학 시절 신경생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MIT에 입학했다. 그후 마빈 민스키라는 인공지능계 거물의 충고에 의해서 컴퓨터로 관심을 옮겼다. 인간신경생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공부한 것이다. 힐리스의 엔지니어링기술은 일찍부터 유명했다. 한때 찰스 베비지의 후예를 자처한 그는 장난감 블록으로 간단한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설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덩치가 보통 크기의 냉장고 만한 이 장난감컴퓨터는 '틱 택 트'라는 게임을 곧잘 했다. 힐리스는 그 제작목적이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19세기에도 컴퓨터제작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자기가 베비지보다는 한 단계위인 엔지니어라는 뜻을 은근히 흘리는 말이었다. 베비지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콜룸부스의 달걀이라고 펄쩍 뛰겠지만. 힐리스는 각 처리기의 기능을 단순화시키는 대신 처리 개수를 수만개 단위로 증가시켰다.

1983년 힐리스가 사장으로 된 싱킹머신(Thinking machine)사가 설립되었다. 회사이름이 암시 하듯이 긍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두뇌에 필적하는 대규모 병렬처리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에 몇대 얻어맞는 것을 갚아주는 기분으로 싱킹머신사에 5백만달러나 되는 연구기금을 지원 했다. 국무부의 지원을 받은 새끼 호랑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드디어 1985년말 무려 6만4천개의 독립된 처리기를 가진 커넥션머신이 시장에 나왔다. 일반에 공개테스트를 거쳤는데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무부 관계자들의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특정한 분야, 예를 들면 영상처리에서 커넥션머신이 보여준 속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기상관측자료분석에서 이 기계는 종횡무진 활약하여 여타의 모든 슈퍼컴퓨터를 압도했다.

직렬컴퓨터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싱킹머신사는 다음 단계에 1백만개의 처리기를 연결시킨 컴퓨터를 생산해 내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가장 편리한 컴퓨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듯이, 가장 빠른 컴퓨터가 무엇이냐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그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져야만 한다. '문제를 가장 빨리 풀 수 있는 컴퓨터는 어떤 것인가.'
 

0싱킹머신사에서 개발한 커넥션머신「CM2」
 

인간 자신이 최종 목표

최근에 와서 컴퓨터의 구조는 단순한 처리기의 개수가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다. 많은 컴퓨터과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똑똑한 몇개의 처리기 보다는 단순하지만 잘 조직된 처리기가 더 강력하다. 인간의 뇌가 그러하듯이 기계에서도 그럴 것인가는 큰 과제다. 그렇지만 과학발전, 바로 그러한 기계를 개발함에 있어서는 어중이떠중이 1백만명을 모아 둔다고 해서 독창적인 것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판에서 시작하여 톱니바퀴식 파스칼계산기를 거쳐서 결국 종착역에 도달한 컴퓨터는 인간의 두뇌구조에까지 왔다. 최근 들어서 인간두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보다 대용량의 병렬처리기를 만들기 위해선 동물 가운데 생리기능이 가장 복잡한 인간을 연구해야만 하게 됐다.

어떤 현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인간에게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결국 '인간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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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환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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