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다. 그의 옥사설과 백두산 7회등정설은 과연 타당한가?
올4월은 문화부가 정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달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였던 김정호. 국민학교 학생들도 다 아는 이름이다. 우리나라 과학자들 중에서 그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도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며 최고의 지도제작자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사람이다. 대동여지도를 본 사람이건 못 본 사람이건 그 지도가 19세기에 만든 지도중 가장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도이며 그것을 만든 사람이 위대한 김정호라고 배운 기억이 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황해도 출신이고 호는 고산자이고 30년이나 걸려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고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펴 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의 친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고종 때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찍어내서 대원군에게 바쳤다가 오히려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명으로 억울하게 잡혀 옥사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알고 있다. 이 대원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 그밖에 우리가 읽은 김정호와 관련된 대부분의 이야기는 거의 픽션이라 해도 좋다.
실학자 최한기와 교분 두려워
물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다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어느 집안의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래도 그만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으면 됐지 조선시대같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뭐가 더 알려질게 있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정밀한 지도를 혼자 힘으로 완성한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초인간적인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고작해서 몇줄밖에 안 된다면 좀 서운하지 않을까.
나는 김정호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황해도가 고향이라는데 왜 서울에 왔을까. 그는 정말 전해 오는 것처럼 만리재(지금의 만리동)에서 살았을까. 아내가 광주리장사를 했다는데 그렇게 가난한 형편에 어떻게 우리나라 지리학과 지도에 관한 그토록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었을까. 정말 30여년에 걸쳐 전국을 몇 번씩이나 답사했을까. 그가 너무 집안을 돌보지 않아서 살림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아내가 광주리장사로 나섰다는 소문이 난 것일까. 평범한 신분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최한기와 같은 이름있는 실학자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대원군이 아무리 지도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동여지도로 말미암아 나라의 기밀이 누설된다고 그를 잡아 가두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되었을까. 정말 그랬다면 그가 만든 지도와 그 목판은 왜 그대로 남겨두었을까. 그 많은 목판을 어떻게 혼자서 파낼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한이 없고 도무지 답답하다. 그러나 꼭 알고 싶다. 아무래도 그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결코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났을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서계(庶系)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언제 태어났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 최한기가 적어 놓은 몇줄의 글과 그가 엮은 지리지(地理志)와 지도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존경받는 사람.
그는 과연 족보에도 이름이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그의 생애를 알고 싶다. 그리하여 그 위대함을 기리고 그가 걸어간 고난의 길을 우리의 교훈이 되게 하고 싶다. 우리에겐 어렵게 살다 간 과학자나 기술자가 너무도 많다. 공적(公的) 기록에는 오르지도 못한 사람들. 김정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30년 걸린 지도
"친우 김정호는 소년 때부터 지지(地志)에 듯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섭렵했다.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고 한가한 때에는 매양 사색을 하여 간편한 집람식(輯覽式)을 발견했다."
1834년(순조 34년) 김정호의 절친한 친구였던 최한기가 김정호의 청구도(靑丘圖)의 제서(題書)에 쓴 글이다.
또 유겸산(劉兼山)은 그의 이향견문록(里鄕見問錄)에 이렇게 썼다.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 했는데 본래 기고한 재예가 있고 특히 지리학에 열중하여 널리 상고하고 또 널리 자료를 수집하여 일찌기 지구도(地區圖)를 만들었고 대동여지도를 손수 판각하고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그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 데가 없다. 나도 그 중의 하나를 얻고 보니 참으로 보배가 되겠다."
김정호에 대해 언급한 믿을만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그가 전국을 여러 차례 답사하고 백두산을 수차례나 등반했다는 이야기는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야기다.
1861년(철종 12년)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청구도를 완성한지 27년 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동여지도를 30년 걸려 만든 지도라고들 한다. 그만큼 김정호는 평생을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업적은 대동여지도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것은 지도제작자로서의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옥사설의 진위
과연 그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그가 황해도 출신이라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지방에서 태어났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까지는 황해도 봉산설이 유력했으나 최근에는 토산출신이라는 설이 그럴 듯하게 제기되고 있다. 김정호가 쓴 최초의 지지(地志) 동여도지(東輿圖志)에 기록된 '월성 김정호 도편'(月城金正浩圖編)이 토산설의 증거다. 토산의 옛이름이 월성이라는 것이다.
또 김정호가 언제 나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가도 의문투성이다. 역사학자 이병도교수는 김정호가 순조 헌종 철종 고종 4대에 걸쳐 생존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순조때 청구도를 만들었고 철종때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 또 고종 원년(元年)에는 대동지지를 썼다.
그가 황해도에서 서울로 옮겨온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남대문밖 만리재에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또 서대문밖 공덕리에서 살았다는 설도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가정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그가 어떻게 많은 지리서들을 섭렵할 수 있었을까. 여기 대해서도 의견이 갈려 있다.
그가 읽은 책들이 자신의 소장본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대동지지에서 김정호가 인용한 65종의 사서는 아마도 그의 지기였던 최한기나 최성환에게서 빌려온 책들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의 신분을 엿보게 하는 자료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단지 몇가지 문헌을 통해 유추해 볼 도리밖에 없다. 김정호가 평민출신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이향견문록과 대동방여도 서문. 전자의 책은 하류층의 글을 싣고 있으므로 이 책에 수록돼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신분을 엿보게 한다. 또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에는 그를 김공(金公)이 아닌 김군(金君)으로 표기하고 있다. 신헌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김정호를 김군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김정호의 신분이 대단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김정호는 이렇다할 당호(堂號)도, 족보도 없었다.
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백두산을 일곱번이나 올랐다는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물론 이 '신화'가 김정호의 성과를 한층 높여준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김정호가 감옥에서 일생을 마쳤다는 설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한편에서는 일제가 그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병도 교수는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지지 중 어느 것도 몰수당하거나 손상당하지 않았음을 증거로 옥사설을 부정했다.
우리는 김정호의 업적하면 먼저 3대지지와 3대지도를 떠올린다. 즉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3대지지(地志)와 청구도(靑丘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 3대지도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수선전도를 그리고
그러나 이와는 약간 다른 흥미로운 지도도 제작했다.
수선전도(首善全圖)다. 수선전도는 1824년에서 1834년 사이에 김정호가 제작한 서울지도로 근대지도(近代地圖)에 가까운 실측, 세밀지도다.
수선(首善)이란 서울을 뜻하며, 그것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건수선 자경향시'(建首善自京鄕始)라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니까 수선전도란 수도(首都) 서울의 전도(全圖)라는 뜻이다.
이 지도는 크기 82.5㎝×67.5㎝의 목판본인데, 그 판목(板木)이 지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수선전도는 북쪽 도봉(道峰)에서 남쪽 한강에 이르는 지역을 오늘의 종로거리가 가로지르는 것으로 서울을 그렸다. 또 종로를 남북으로 하여 지명(地名)을 새겨 놓고 있다. 그래서 서울거리를 북쪽은 북악(北岳)을 중심으로 보고 남쪽은 목멱산(木覓山), 즉 남산(南山)을 중심으로 해서 본 것처럼 그렸다. 종로를 직선으로 그은 선을 기준삼아 그 북쪽의 지명은 바로 새기고, 그 남쪽의 지명은 남산을 위로 하고 봐야 바로 보이도록 지명을 새겨 놓았다.
이 지도는 1820년대 초의 서울을 정확하게 그린 도성도(都城圖)로 도성의 주요도로와 시설 궁전 종묘 사직 문묘 학교 교량 산천 성곽 누정(樓亭) 봉수(烽燧) 역원(驛院) 명승(名勝) 등을 빠짐없이 나타냈다. 또 부(部) 방(坊) 동(洞)은 물론이고 성(城) 밖의 동리와 산 절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4백60여 개의 지명(地名)이 나타나 있다.
수선전도의 제작자가 김정호라는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것은 명세총고(名世叢考)라는 책의 서적고(書籍考) 지리조(地理條)에 수선전도의 작자를 김백온(金伯溫)이라고 지칭한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국서음휘(國書音彙)라는 전적(典籍)에는 대동방전도(大東方全圖) 21장을 조선 철종 때 김백온이 만들었는데 이 지도를 세칭 고산자지도라고 했다고 적혀 있다. 또 이 책을 보면 남북항성도(南北恒星圖)와 동서지구도(東西地球圖) 등도 김백온의 지도임이 명기돼 있다. 이를 통해 김백온과 고산자가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목판제작솜씨도 뛰어나
그 제작연대는 비교적 면밀히 연구돼 있다. 김정배(金貞培)에 따르면 1824년에서 1834년 사이에 이 지도가 편찬되었다고 한다. 그는 수선전도교(首善全圖巧- '사총' 8집, 1963년)에서 김정호가 수선전도의 제작자임을 고증했다. 또 제작연대의 상한을 그 지도안에 경우궁(景祐宮)이 나타나 있음을 들어 그것이 창건된 순조 24년(1824년)으로 잡았다. 또 그 하한을 제생동(濟生洞)이 계생동(桂生洞)으로 이름이 바뀐 순조 34년(1834년)으로 본 것이다. 이찬(李燦) 교수도 순조 25년(1825년)경으로 보고 있어('한국의 고지도'에서) 대체로 비슷하다.
수선전도는 그 정확성과 정밀함에서 그리고 그 크기에서 서울도성의 지도 중 가장 훌륭하다. 지도제작뿐 아니라 목판 제작솜씨도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그 판목의 가치는 매우 크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목판지도가 제작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팔도총도(八道總圖)와 각도지도(各道地圖)를 비롯, 천하총도(天下總圖)가 들어있는 지도첩과 팔도각도의 큰 판본(板本)들, 여지전도(輿地全圖)와 해좌전도(海左全圖),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등은 훌륭한 목판지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