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5. 선배가 걸어온 길

입원실에서 떠오른 논문착상

연세대 이과대학 학장 임정대
 

디스크로 꼼짝못하고 누운병실에서 한순간 논문주제에 관한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직업도 다 그러하지만 과학자가 되는 길도 쉽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직업과 비교하여 그 길이 가장 어렵다고는 보지 않는다. 내가 걸어온 인생의 자취를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비교적 행운이었다고 느껴진다.

나는 일찍이 중학시절부터 논리적인 순수학문쪽으로 치우쳐 공부했으며 때로는 사색같은 것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중 어느 사이엔가 막연히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이 목표를 위해 대학의 학과 선택에 있어서도 모든 학문의 도구가 되고 기초가 되는 수학을 택하게 되었다.

6·25동란이 일어나기 두 달전에 지금의 연세대학에 입학하게 된 나는 수복이 되어 서울에 돌아와보니 입학정원이 30명이었던 수학과에 겨우 3명 남았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칠 무렵 하루는 갑자기 교수님이 불러 갔더니 신학기부터 부산분교에 내려가 강의를 맡으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처음 내가 잘 못 들었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내 귀를 의심하였다. 6·25는 분명히 우리 온 민족의 수난이었지만 나에게는 어린 시절의 꿈이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해방후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많은 대학들은 부족한 교수의 확보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으며 전쟁 이후는 그 도가 한층 더 심했다.

가르치며 배우며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으며 강단에 선 나는 무척 바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배운 것만으로는 강의할 수 없었다. 가르치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고 어떤 의미에서 참다운 공부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 몇년 후에는 고학년의 과목을 맡을 기회가 돌아왔다. 그러한 과목은 나 자신도 배워보지 못하였으므로 스스로 공부하면서 강의해야 했다. 그것은 강의가 아니라 내가 이해한 부분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교육이 허용된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강의하는 나로서는 월급을 받으면서 참다운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교수생활 초기에는 온통 강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불안의 연속이었다. 항상 강의 전날 밤늦도록 준비해야 했다. 때때로 어려운 대목에서 고생하여 이해를 하게 된 때는 보람을 느꼈지만 밤을 새우다 시피 노력해도 끝내 이해가 되지 않아 강의준비를 제대로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한 경우 어쩔수없이 아프지도 않은 병을 핑계로 휴강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는 그 다음 시간까지 도서관의 여러책을 뒤져 혼자 끙끙대며 힘들게 해결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강의가 시작되어 종강이 되는 한학기 동안 주말이나 휴일이 없었으며 24시간 강의 준비로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일년이면 긴 방학이 두 차례나 있지 않느냐고.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강의를 중요시해야 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교수에게 '강의는 전부가 아니다. 교수에게는 강의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다. 그것은 연구다. 연구야말로 교수의 참된 임무고 보람이다. 나의 초기 교수생활은 강의준비에 전력투구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에는 눈돌릴 겨를이 없었다.

향수병에 젖은 유학시절

교수 생활 5,6년이 지난 후 나는 진정한 교수가 되려면 더 연구해야 한다는 절실한 책임감을 느끼고 미국 유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병역의 미필로 3,4년을 끌어온 복잡한 수속끝에 겨우 1963년 8월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의 출국수속에 따르는 여러가지 고생은 우리 사회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임을 몇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유학간 곳은 워싱턴주 시애틀에 있는 국립대학이었다. 시애틀은 일년 내내 비가오고 날씨는 온화한 곳이다. 그것은 남태평양에서 미 대륙을 타고 북상하는 난류 때문이다. 나는 가족을 두고 멀리 이국땅에 온 것만도 고독한데 날씨마저 매일 비가 와서 더욱 더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이국땅에서 생활하며 서툰 영어실력으로 인한 긴장감 때문에 나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러한 여러가지의 복합적인 요인때문에 그곳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나면서 심각한 증세가 나타났다. 즉 소화불량증과 밤에 잠이 안오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한 달이 지났을 때는 연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증세가 심화되어 갔다. 그러나 출국수속 과정에서 그토록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대로 자포자기할 수는 없었으며 금방 귀국할 수도 없었다. 이른바 향수병(homesick)이란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고통속에서도 1년을 다 채우고 귀국하였을 때 체중이 8㎏나 줄어있었다. 연구를 위한 유학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당시에 얻은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건강과 강인한 정신력이 요구된다고 본다. 교수생활에 있어 논문을 쓴다든가 연구하는 것은 체력과의 싸움이다. 그러기 때문에 연구분야에 종사하는 교수중에는 만성 소화불량증과 불면증이 있는 분이 다른 업종의 종사자와 비교하면 많은 편이다.

지적 호기심이 샘솟아야

탁월한 연구는 정신적으로 잡념이 없이 한 문제에 집중된 생활을 상당히 오랜기간을 지속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1970년대초 학위논문을 신청한 때의 일이다. 약 반년전부터 그 논문을 구상중이었으나 논문의 가장 핵심부에 속하는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은채 논문제출의 마감기일만 다가오고 있었다. 기한이 약 두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집에서 갑자기 허리를 삐어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되었다. 그로부터 병원에 실려간 나는 입원하고 말았다. 디스크 환자는 반듯이 누워서 다리에 무거운 추같은 것을 매달아 놓고 최소한 한 달을 기다리는 것이 치료 방법이다. 누워서 모든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

아파서 누웠지만 논문제출기한이 닥쳐오는 불안을 한시도 떨칠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한순간 번쩍하고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순간 나는 누운채로 종이와 펜을 들어 공중에서 겨우 몇자 적었다. 그리고 다시 그 착상을 정리하면서 하나씩 적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퇴원할 때까지 논문의 윤곽을 정리하고 논문제출 기한을 맞추어 완성된 논문을 제출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급한 일을 당하면 자기도 모르는 초능력이 발휘하게 된다. 나는 바로 그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이다. 논문을 기한내에 써야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정신이 한 문제에 집중되어 일거에 문제를 푸는 착상을 얻게 됐다고 본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연구가 직업적인 의무라고 생각한 일은 한번도 없다. 어떠한 고난을 겪더라도 연구는 나의 보람이고 지적호기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지적호기심이 항상 샘솟아야한다고 본다. 연구한다는 것이 명예나 직위나 경제적 목적을 위해 수행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과학자가 아니고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자가 되는 길은 마치 종교적인 고행자와 같은 정신으로 외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 미생물학과 교수 노정혜
 

눈물겹도록 고마웠던 타인의 인정

대학시절 이미 '학문의 길이 인간답게 사는 것과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는 체험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생물학을 공부하는 길로 들어섰는지 그 이유는 나 자신도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한때는 무용이 하고 싶었고, 한때는 노래가, 또 한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그런 오락가락하던 때가 있었다(그 꿈들은 아직도 내게 조금씩 남아있어 순간순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중학교때부터 생물공부가 재미있었다는 것외에는 뚜렷이 나를 이 길로 이끈 동기가 별로 없다고 기억된다.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셨던 부모님에게 나는 피를 보면 기절할 것 같다느니, 딸을 그렇게 고생시키는 게 좋으냐느니 하는 갖은 이유를 들어 무사히 나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서울대학교 생약계열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는 학과를 미리 정해서 입학하지 않고 계열별 모집을 하던 때라 내게는 1년동안 학과선택을 할 자유가 주어졌다. 역시 실용적인 이유에서 약대쪽으로 지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부모님은 조심스레 권유했지만 그때 막 미생물학이라는 흥미있는 분야에 대해 일어나고 있는 나의 호기심을 꺾지 못했다. 비록 당신들의 원대로 진로를 택하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주관을 세워가고 있는 딸을 부모님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고 생각한다.

끈끈했던 선후배 관계

미생물학과에서의 교육과 훈련은 내게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재미있는 강의시간도 더러 있었지만 내겐 선배나 동기들과 그룹을 만들어 전공서적을 읽고 토론하느라 하루가 멀다하고 어울려 얘기하는 그런 시간들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내가 찾아서 하는 공부는 그만큼 내게 새로운 만족을 안겨주곤 했다. 유난히 선후배 관계가 끈끈한 정에 감싸여 있던 학과 분위기로 인해 마음에 있는 말을 터놓기에 더없이 좋았다.

나는 그때 이미 학문을 하는 길이 인간답게 사는 것과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체험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치열하게 공부할 때도 있었고, 밤을 세워 어려운 인생론을 설파할 때도 있었으며 목이 쉬어라고 노래를 부르며 산속의 공기를 휘젓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채집을 한다는 명목으로 봄 가을 산행을 하던 우리에겐 많은 얘깃거리가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있다.

대학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학과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보내던 나는 4학년이 가까워 오면서 나름대로 진로를 모색하느라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공부는 계속하고 싶은데, 당시 서울대의 형편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이 못되었다. 유학을 결심한 나는 미국의 대학들을 알아보고 편지를 보내고 필요한 시험들을 치르면서 바쁘게 4학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한 해 여름, 지원했던 몇군데 학교로 부터 입학허가 통보를 받았고, 그중 생물학 교수가 가장 많은 학교로 손꼽히는 위스콘신 대학을 선택했다. 난생 처음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의 막막함이란.
큰 트렁크 두개를 들고 학생회관으로 무작정 들어가서 기웃거리던 나는 곧 지나가던 한국학생의 눈에 띄었고, 연줄로 알게된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낯선 환경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고

학교공부는 정말 어려웠다. 매일 쏟아지는 과제와 읽을거리들로 인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 날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말잘하는 미국학생들은 왜 그리도 똑똑하고 자신있어 보이던지…. 더듬거리는 말솜씨가 불편해 본의아니게 조용한 성격이 되어버린 나는 열등감과 구겨진 자존심, 피곤함과 부러움으로 범벅이 되어 몹시 힘든 한해를 보냈다.

우리나라에 있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했던 나는 내가 정말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때에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태껏 우쭐대며 자신만만히 살던 내가 이제는 말도 못하는 초라한 외국인으로 남의 눈에 비친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이를 악물었다. 크고 작은 호수로 둘러싸여 경치가 기막히게 좋은 캠퍼스였지만 나는 호숫가를 피해 다녔다. 감정이 북받쳐 오를까 겁이 나서였다. 의기소침해져 하마터면 자신을 통째로 잃어버릴 지경에까지 갔던 나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기대와 끊이지 않고 날아드는 친구의 편지, 그리고 교회에 가서 만난 몇몇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과 기도 덕분이었다. 이해해 보려고, 땅에 떨어진 내 자신감을 살려내 보려고, 나는 아침에 눈뜬 순간부터 도서관 열람실의 문을 닫는 새벽 1시까지 끈질기게 버텼다.

지도교수를 정하고 실험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는 점차 내 자리를 찾게 되었다. 내 생각을 점점 자신있게 표현하게 되고 적어도 내 실험과제에 대해서는 내 주장이 인정받는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남에게 인정받고 이해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눈물나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아, 역시 쓰디쓴 노력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구나 하는 평범한 깨달음을 나는 6년이 넘는 대학원 공부를 통해 서서히 체험하고 있었다.

철저히 구겨진 자존심을 펴고 학문적인 자신과 소견을 어느 정도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의 쓰라림이 있었지만, 나는 공부하면서 겪는 좌절이 나의 생활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신조를 실천에 옮기는 연습을 또한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우울했던 기억들을 지우고도 남을 소중한 체험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마음맞은 친구들과의 만남, 우정의 깊이를 배워가던 시간들, 틈만 나면 호수로 숲으로 캠핑을 다니면서 알게된 자연의 냄새와 소리…. 이런 기억들은 내가 몸담고 있던 캠퍼스 주변 곳곳에서 살아 숨쉬며, 오늘도 나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학위과정을 마쳤다.

가슴이 저릴 정도의 흐뭇함

86년 가을, 8년만에 돌아온 나는 내가 졸업한 모교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데 어느틈에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 사이에 학교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학생운동의 열풍이 한바탕 홍역처럼 학교를 휩쓸고 지나간 캠퍼스 분위기는 70년대 나의 학창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점차 나는 진지한 학생들의 눈망울을 주시할 수 있게 되었고 배우려고 애쓰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배운 것들, 이해하게 된 것들을 부지런히 전해주면, 즉시 되돌아오는 그들의 반응은 가슴이 저릴 정도로 흐뭇하다.

최근 몇년 사이 학교엔 많은 연구용 기계들이 들어차게 되고, 실험하는 대학원생들로 밤에도 불이 환하다. 학창시절의 나보다 몇배나 똑똑한 요즘의 학생들은 70년대의 우리처럼 외국유학을 당연시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우리도 창의적 아이디어를 실험에 옮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우리 두뇌를 외국에 봉사시키지 말자는 야무진 각성이 학생들의 입에서 공공연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이들과 어울려 생명을 논하는 것은 참으로 신난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표정보다 더 다양한, 오묘한 생명현상들을 엿보고 이해하는 것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재미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학문이 참으로 좋다.


과학기술연구원 기능금속재료연구실 책임연구원 김희중
 

미지의 과제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연구소에 들어와 실제 연구과제를 접해보니 18년간의 교육과정이 무용지물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일었다.

'과학동아'로 부터 원고 요청을 받고 나 자신 한동안 난감한 심경에 빠졌다. 왜냐 하면 현재 재료공학의 한 분야인 금속을 전공하고 있는 나를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과학자라 할 수 없고, 재료공학을 영어로 'materials science' 라 부르고 있으므로 과학의 일부로 보더라도 내가 과연 그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 10여년간 우리나라에서 재료분야의 과학기술에 관한 정책수립과 연구현장에 있었던 체험과 생각이 장차 과학한국을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감히 몇가지 의견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아직 자신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결정하지 않은 청소년 중에는 자신의 미래상으로 뉴턴 아인슈타인 에디슨과 같은 훌륭한 과학기술자를 그려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훌륭한 과학기술자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질문 받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당황하여 제대로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지금까지 배운 교과서나 참고서에 없고, 가정에서 부모님이나 다른 연장자로 부터도 들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청소년기에 필자도 유명한 과학자의 전기에서 가끔 간접적으로 힌트를 얻었을 뿐 이렇게 막막한 고민에 빠진 때가 있었다.

훌륭한 과학기술자는 뛰어난 암기력을 보유한 사람만이 되는 것은 아니며,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과학기술자는 본인의 과학기술에 관한 탁월한 능력(지식 탐구욕 등)은 물론 훌륭한 스승과 좋은 환경이 삼위일체로 갖추어질 때 배출될 수 있다. 여기에서 훌륭한 스승이란 본인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지식들을 전달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에게 정확한 지식의 현주소를 전수시킬 수 있고, 미지의 세계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탐구정신이 풍부한 인물을 말한다.

한편 좋은 환경이란 돈이 많아 많은 참고서를 제공하고 비싼 과외를 해주는 가정이 아니고, 매스컴에 쓸데없이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교수들이 많은 세칭 일류대학도 아니다. 과학기술에 대해 진정한 열정이 있는 동료들이 있고, 독창적인 발상을 스스로 제약없이 실험해 볼 수 있는 연구시설과 최소한의 연구비가 갖춰진 상황이 좋은 여건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에는 왜 노벨상을 수상할만한 훌륭한 업적을 가진 과학자가 없을까'란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한 것이다. 국민학교 코흘리개부터 입시위주의 암기식교육을 강요당하는 교육환경, 황금같은 대학시절정치문제에 골몰해 있는 대학생, 가시적인 단기적 연구 결과를 요구당하는 교수, 선진국제품을 복사하는데만 여념이 없는 기업가들, 이러한 환경에서 훌륭한 연구업적을 가진 과학기술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독창적인 발상에 약해

내가 재료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공과대학에 입학한 해는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추진되던 1972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막연히 전자공학자를 꿈꾸던 나는 대학에 진학한 선배들로 부터 3학년때 학과 소개를 듣고 금속공학을 전공해 보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당시 1단계 건설의 마무리단계에 있던 포항제철이 금속공학 영역이란 점과 금속을 전공하면 우리나라 산업에 기여하는 바도 크고 엔지니어로 수입도 보장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의 4년간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우선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인해 휴교가 잦았던 탓도 있으나, 거의 원로급으로 구성된 교수들의 강의가 너무 피상적이고 학문적 깊이도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방학 기간 중에 가졌던 포항제철 용광로 2주간 실습을 통해 '금속공학은 할 만한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논문의 실험을 하면서 겨우 금속학에 관한 감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직장인 연구소(KIST)에 들어와 실제로 금속재료에 대한 연구를 해보니 또 다시 난감해졌다. 국민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8년간 배운 지식이 무용지물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일어났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의 현상과 이론을 경험에 의해 연결시킬 수 있는 방안도 찾으면서 미지의 과제에 대해서도 두려움이나 당혹감을 가지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도 어느 정도 생기게 됐다.

나의 체험을 통해 볼 때 결국 우리나라 교육에서의 기본 문제는 미지의 영역에 당면하였을 때 이를 어떻게 분석하여 대응할 수 있는가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는데 있다. 이 과제는 학교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심사숙고하여 해결해야 할 최우선과제라고 생각된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이공계대학을 졸업한 웬만한 사람이면 이미 선진국에서 개발된 제품을 복제하는 일은 자신의 암기실력을 잘 활용하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이나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는 거의 힘을 쓸 수 없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데는 새로운 발상능력, 이미 알고있는 지식을 효과적으로 조합하는 능력,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불굴의 신념과 과감한 추진력이 필수적이다. 즉 새로운 과학기술의 영역을 개척하는 선구적 과학기술자가 되려면 남이 구축한 지식까지 도달한 후 그 위에 독자적인 사고를 형상화한 새 지식이나 기술을 부가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현재의 교과서에 있는 저명 과학자의 이론에서 허점을 찾아 이를 과감히 부인하고 다른 이론을 스스로 체계화할 수 있는 신념과 능력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저명한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지금은 과학기술이 점차 영향을 증대하고 있는 시기이며, 앞으로 21세기에는 과학기술의 변혁이 우리 인류문명을 보다 큰 폭으로 좌우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정보화사회로의 변천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벽을 허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최근 인공지능(AI)컴퓨터와 가전제품의 결합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와 같은 변혁기에는 자연과학지식에 인문과학 지식을 겸비한 새로운 능력을 보유한 과학기술자가 큰 역할을 담당해 나아갈 것으로 생각된다.

30대 후반인 필자가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현재 여건은 우리 앞세대가 거의 황무지에서 경제부흥을 위해 땀흘리던 때보다 몇 배나 양호하다. 또한 최근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인재들이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그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고 있고, 국내의 대학들도 실력있는 젊은 교수들을 많이 유치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지도능력이 있는 우수한 선생들도 많아질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과학기술자가 많이 배출되는 데는 무엇보다 미래세대인 청소년의 분발이 필요할 것이다. 탁월한 과학기술 업적을 성취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독창적인 사고능력은 가급적 어릴 때부터 계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담당자인 학교, 가정에서의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며, 정부와 기업 등 사회 전체에서도 각별한 배려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토가 협소하고 자원도 거의 없는 우리나라가 신흥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는 인적자원의 효율적 활용이 관건이며, 과학기술이 21세기 미래사회의 중추가 될 것임이 자명한 이 시점에서 독창적인 사고능력, 신념과 패기를 갖춘 훌륭한 과학기술자의 양성유무는 한국의 향후 진로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청소년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열정을 가질 것을 기대해 본다.

199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노정혜 교수
  • 김희중 책임연구원
  • 임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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