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충격'으로 미국의 자존심을 짓밟은 소련의 우주과학은 한때 로켓기술의 열세로 미국에 추월당했으나 무인탐사기술에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주공간에 날렸다. 이 보도에 접한 온 세계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 사건은 그때까지 모든 분야에서 정상임을 자부해 왔던 미국인의 콧대를 하루아침에 납작하게 만들었다.
무게 83.6kg, 근(近)지점 2백27km, 원(遠)지점 9백47km의 타원궤도를 도는 이 스푸트니크1호는 누가 뭐라해도 소련의 승리를 알리는 상징임에 틀림없었다.
소련은 이어 한달후인 11월 3일에 무게가 1호의 6배나 되는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했을 뿐더러 거기엔 타이카라는 개까지 탑승시켰다. 우주여행은 인간보다 개가 먼저한 셈이다. 미국은 겨우 애견협회회원들이 "불쌍한 개를 왜 추운 우주공간에 보내 고생을 시키느냐"며 시위하는 것으로 자위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우주분야에서 미국의 필사적인 추격이 시작되지만 향후 10년간 미국은 모든 면에서 소련의 뒤만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은 달 탐사선을 보내는데 성공했고, 또한 최초로 달뒷면의 사진을 촬영했다.
「인류최초」의 신기록행진
소련의 '인류최초' 기록은 60년대에도 계속된다.
61년 4월 12일, 38m 길이의 보스토크로켓은 드디어 인간을 우주공간에 띄웠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90분만에 돈 우주비행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유리 가가린. 그가 지구를 내려다 보면서 우리에게 보낸 "지구는 푸르도다"란 말은 역사에 남는 명언으로 기록되었다.
66년 3월엔 사상처음으로 소련 탐사선 베네라3호가 금성에 도착했다. 베네라 4호는 금성표면에 연착륙했고, 그후 메네라 14호까지 이들 위성이 금성에서 보내온 자료와 사진은 우리들에게 금성에 대한 귀중한 지식을 제공했다.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도 소련인이었다. 소련은 이밖에도 우주실험실을 75년 5월에 띄워 우주공간에 63일간 체류시키는 기록도 세웠다.
우주탐사의 선각자, 티올코프스키
인간의 우주여행이 로켓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최초로 간파한 사람은 소련인 콘스탄틴 티올코프스키(1857~1934)다. 그는 9세때 열병으로 귀머거리가 되어 학교에 갈 수가 없었지만 22살에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의 교원자격을 따냈다.
티올코프스키가 로켓에 관심을 가진 것은 프랑스의 공상과학작가 베르느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83년 로켓이 진공속에서도 날 수 있으며 그것은 뉴턴의 운동법칙의 하나인 '작용과 반작용'원리를 이용한 것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1897년엔 로켓의 비행원리를 유도했다. 즉 로켓의 최종속도를 발사한 순간의 전(全)중량과 발사후 연료를 다 소모한 뒤의 최종중량 및 분사가스의 속도 등 세개의 변수로 명쾌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의 공식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로켓 비행공학의 근본원리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또 다단식(多段式)로켓도 구상해냈고, 액체수소와 액체산소의 혼합체 또는 케로신과 액체산소 등이 로켓추진제로서 적합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우주정류장,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한 로켓, 이온(ion)로켓, 태양광선을 반사하면서 나는 로켓까지 예측했다. 그의 고독한 연구생활은 마침내 정당한 평가를 받아 62세때 소련의 과학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됐다. 그가 탄생한지 1백주년이 되던 날, 그가 구상했던 로켓으로 소련은 인류최초의 인공위성을 하늘높이 날렸다. 그리고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뜻에서 1964년 소련정부는 모스크바 동북쪽에 7m나 되는 석상과 높이 96m의 티타늄으로 된 기념탑을 건립했다.
미국이 소련을 추월
1969년 7월 21일, 미국은 드디어 소련을 추월했다. 세사람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한 것이다.
불행히도 소련은 아폴로우주선같은 무거운 짐을 우주공간에 띄울만한 강력한 로켓이 없었다.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려면 최소한 세명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소련은 눈물을 머금고 패배를 자인했다.
그러나 달 탐사를 미국의 독무대로 만들어놓기에는 소련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무인탐사선을 발사하여 달표면의 흙을 수집해 오는 것. 이와함께 소련은 무인지프차를 달에 보내어 넓은 지역을 탐사하는데 성공했다.
미·소의 우주탐사경쟁은 달보다 더 먼 곳에 있는 행성으로 뻗어 나갔다.
금성탐사에서는 소련의 독무대. 소련은 앞서 언급한 금성탐사선 베네라 3호부터 14호까지 발사했다. 1980년에 보낸 베네라 14호는 X선을 사용하는 금성의 토양분석기마저 갖추어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금성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을 제공해 줬다.
미국은 75년 8월에 화성탐사를 위한 바이킹계획을 세웠다. 이 해에 발사한 바이킹 1,2호는 76년 7월과 9월에 무사히 화성에 연착륙했다.
반면 화성탐사에 소련은 번번히 실패했다. 미국보다 훨씬 앞질러 시도했지만 모두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88년에 날린 소련의 화성위성 포보스 1,2호도 결국은 관제탑의 실수와 고장으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우주왕복선에 승부를 건다
미·소의 우주개발경쟁은 우주왕복선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미국이 스페이스셔틀(space shuttle, 우주왕복선)에 성공하자 소련도 에네르기아란 새로운 로켓을 개발해냈다. 그 위에 탑재되는 왕복선은 '부란'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부란이란 '눈보라'를 의미한다고 한다.
88년에 첫선을 보인 소련의 우주왕복선은 전장 65m로 모습이 미국 것과 거의 비슷하다. 이것은 필요에 따라 65~2백t의 짐을 우주공간에 나를 수가 있고 40m나 되는 긴 물건도 운반할 수 있다. 미국의 우주왕복선이 최대 1백9t까지 실을 수 있으니까 이것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임에는 틀림없다.
소련은 현재 우주기지(space base)를 갖고 있다. 그 이름은 미르.
89년 9월 6일 두사람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소유즈 로켓은 지난 2월에 지구로 돌아올 때까지 확장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소유즈18호를 중심으로 하여, 옆에 계속 여러가지 모듈(module)을 나뭇가지같이 이어가는 일의 하나인데, 현재까지 4개의 모듈을 십자(十字)로 부착시켰다. 이것이 장차 달개발을 위한 소련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다.
소련은 태양계탐사에 계속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지난해 9월2일~24일 미국의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열렸던 '제2회 태양계 탐사국제회의'에 소련대표로 참석한 발스코프박사는 "소련은 1996년엔 화성의 달 포보스, 1998년엔 금성, 2002~2003년에 수성의 무인탐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화성의 달 포보스탐사계획엔 그곳의 흙을 지구로 퍼오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이 목성탐사를 위해 갈릴레오계획을 세우는 동안 소련도 이에 못지않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