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출신들도 산업현장에서 자신의 전공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과학자가 될 것인가. 기술자가 될 것인가.
어릴 적부터 과학자의 꿈을 키워온 학생들은 대학입시원서 접수창구에서 다시한번 망설이게 된다. '내가 결정한 과가 내 적성에 맞는 것일까.' 대개 대학에서의 전공이 결정되면 이에 따라 평생 살아갈 방향이 정해진다. 졸업후에 어디를 가도 '○○과 출신'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학에서의 전공선택이 중요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과학고에 진학해 일찍부터 진로를 결정짓고 마음 편하게 공부에만 열중하는 경우도 있다. 또 대학진학후 과가 적성에 맞지않아 다시 입학 시험을 준비하거나, 대학에서 과를 바꾸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대학원진학이나 유학을 갈때 자신의 전공을 바꿔 궤도수정을 하는 수도 있다. 이 경우 '경제학과'에서 '전자공학과'로 바꾼다든가 하는 식의 영 딴판으로 전공을 바꾸기는 어렵다.
접수창구에서 바뀐 전공
아무튼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학에서의 학과선택은 자신의 장래와 직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학과는 언제 결정되는가.
어릴 적에 장래희망을 말하라면 과학자 군인 정치가 법관 의사 등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때 과학자란 기초과학을 연구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학까지를 포함한 '과학기술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꿈은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구체적으로 다듬어진다. 유전공학을 하겠다거나 로봇연구를 해보겠다거나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이론물리학자가 되겠다거나하는 등등.
무언가 선택해야 하는 첫번째 순간은 고1이 끝나갈 무렵에 발생한다. 대부분의 학교가 고2 때부터 문과 이과로 나눠 반편성을 하므로 '이과냐, 문과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과를 선택하면 자연대(또는 이과대)공대 농대 의대 약대 가정대 등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세부전공을 대학입시를 치르는 막판에 가서야 결정한다. 현대 과학사에서 최근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37.8%의 학생이 자신의 희망학과를 3학년 2학기 때, 즉 입학원서교부직전에 결정짓는다고 한다. 평소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마음속으로 찍어놓고 있다가도 주위의 권유나 학교성적에 따라 원서접수 창구에서 순식간에 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자신이 선택한 학문에 대한 확신이 없고 학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얘기도 된다.
뭉뚱그려 「과학기술자」
과학과 공학의 구별은 점차 어렵게되어가고 그 의미도 없어져가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 이래 과학은 철학의 일부로서 자연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사고체계를 이루었고, 기술은 과학과는 밀접한 관련없이 기술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전수돼왔다. 근대에 들어서도 과학자는 우주와 자연에 관한 문제를 풀어내는 이론과 실험적 작업에만 몰두했다.
반면 중세 장인(匠人)의 맥을 이어받은 기술자는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되면서 그들의 숙련된 기술을 돈버는데 활용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적 지식이 공학에 이용되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았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의 구분은 대체로 용이한 편이었다.
그러나 과학적 실험이 공학에도 점차 적용되면서 새로운 기술과 기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열역학적 지식이 증기기관을 발전시켰고 전자기이론이 산업에 응용되면서 전기에 관한 수많은 발명들을 가능하게 했다. 기술자들은 과학지식의 무장없이 숙련된 기능만으로는 산업사회의 경쟁에서 배겨나지 못했다. 과학과 공학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새로운 과학이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공학은 세분화되고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공학의 발전에 획기적 계기가 됐던 사건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의 커다란 비극이었던 두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모든 나라가 무기를 만드는데 총력을 경주한 결과 실험실 수준이나 이론에 불과했던 과학이 현실세계에 쓰이는 기술로 전환된 것이다.
핵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이론이 핵공학을 낳았고, 전자기학에 대한 기초이론을 모태로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이 성립했다. 생물학은 유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지만 백신을 만들고 품종개량의 방법을 제시한 것은 유전공학이었다. 이밖에도 플라즈마이론 초전도물리 고분자화학 등 과학적 이론들이 힌트를 제시할 때마다 공학자들은 최초에 그 이론을 만든 과학자도 예측못한 결과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과학과 기술은 서로 용해되어 그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과학자와 기술자를 구별하지 않고 그냥 '과학기술자'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허약한 기초과학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선비를 귀히 여기고 장인이나 장사치들을 천시했다. 따라서 해방이후에도 오랫동안 이과계는 우수한 인재들이 몰린 반면 공대로 가는 것은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50~60년대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 1세대'들은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 그 중에서도 이론쪽을 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한다. 여기에는 당시 국내산업이 미미했던 관계로 귀국후 상대적으로 자리가 많았던 대학교수를 목표로 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60년대말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경제개발의 첫발이 울산에 정유공장을 건설하는 것이었으므로 60년대에는 화공과가 가장 인기있었다. 70년대 석유위기와 더불어 원자력발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핵공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유학생들이 많아졌다. 70년대말부터 전자공학이 부상하더니 80년들어서는 컴퓨터 반도체 신소재 유전공학 등 첨단산업관련 학과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이들 분야에 많은 학생이 몰리고 있다.
이에 비해 기초과학분야는 상대적으로 정체상태에 놓여있다. '천재들이 택하는 학문'으로 알려진 물리학과에는 여전히 실력있는 학생들이 지원하고 있지만 나머지 분야는 공대쪽의 학과에 비하면 별로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이과계 출신들은 '기초과학을 하면 배고프다'고 농담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순수학문의 성격이 짙은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등을 전공으로 할 경우 박사과정까지 밟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국내기업들은 당장 제품생산에 필요한 연구이외에는 투자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이에 비해 IBM이나 AT&T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은 산하에 왓슨연구소 벨연구소 등을 두고 기초과학연구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있다. 이들 연구소 연구원들 가운데는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도 상당수 포함돼 있을 정도다.
80년대를 통털어 정부도 기초과학의 지원에는 소홀했다. 당장 외국기업들과 경쟁에 필요한 응용기술을 개발하는데 급급하다보니 첨단과학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과학에는 투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첨단과학기술 우선정책은 80년대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선진국들의 기술보호주의로 인해 그 허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한국이 그들의 경쟁상대로 떠오르자 기술이전을 기피하는 한편 특허공세를 통해 이미 확보한 기술에도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했다.
뒤늦게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절감한 정부와 업계는 부랴부랴 대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기처는 89년을 '기초과학육성 원년'으로 정하고, 대학의 기초과학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기초과학지원센터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기업들도 기초과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근들어 규모는 적지만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서로 힘을 모아
과학기술의 발전은 학문들간의 벽을 허물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지행하는 목표가 점점 높아져 거대과학(big science) 프로젝트들이 생겨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각 분야의 과학기술자들이 힘을 뭉치지 않으면 이러한 연구자체가 불가능하게 됐다.
컴퓨터의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의 원리를 연구하고 프로그래밍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컴퓨터과학자의 몫이다. 그러나 컴퓨터과학이 성립하기 이전에 '계산하는 기계'를 꿈꾼 사람들은 라이프니츠 튜링 등 수학자들이었으며, 전자기학을 확립한 물리학자들과 진공관 트랜지스터 등을 개발한 전자공학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컴퓨터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은 또한 다른 과학기술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건축공학자는 건물의 설계에 컴퓨터를 이용하며, 천문학자는 인간의 손으로 하기 어려운 복잡한 계산을 하기 위해 컴퓨터의 도움을 얻는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경우에도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뿐아니라 전기공학 금속공학 산업디자인학 인간공학 재료공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최근에 등장한 학문으로 '의공학'이란 것이 있다. 인공장기나 의료용 기기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이 분야의 연구에는 의학 전자공학 재료공학 기계공학등 각 분야의 지식이 망라된다. 과학과 공학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학문내에서도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쪽으로 나눠지는 경향도 최근 두드러진다. 물리학의 경우 입자물리 고체물리 같은 전통적인 이론물리학이 있는가 하면 레이저 반도체 초전도 등 물리이론을 산업에 응용하려는 응용연구가 최근 활발하다. 이에 따라 기초과학을 전공한 물리학자들도 산업현장에서 곧바로 쓰이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동원된다. 한편 전자공학의 경우 전자제품들을 직접 생산하는 생산기술 뿐아니라 제어이론 물성이론 통신공학 등 이론적인 작업도 중시된다.
첨단과학, 허점은 없는가?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80년대 이후 이른바 '첨단학과'들이 대거 등장했다. 자동화공학과(로봇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도 이와 비슷하다) 생명공학과(유전공학과) 정보통신공학과 고분자공학과 분자생물학과 물리광학과 환경과학과 의공학과 등등.
첨단산업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져 이들 분야의 전공자들이 대거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학과의 등장으로 첨단산업의 인력난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생긴지가 몇년 되지 않아 졸업생수가 아직 얼마 안되는 탓도 있지만 '수도권대학 정원동결'이라는 방침에 묶여 학과신설이 지방대학이나 분교에 집중됐기 때문에 기업체나 연구소에서 이들을 탐탁치않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또 유전공학 같은 분야는 개설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졸업생들의 진로가 불투명하다. 연구성과가 단기간에 나타나지않는다는 핑계로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인력의 수급에 관해서 '이만한 국민소득일 때 일본은 전자공학자가 이만큼 필요했다'는 주먹구구식의 계획을 짜고 있는 정부의 안이한 태도도 문제다.
학부과정에서는 전공을 너무 세분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과학기술원 학사부(종전의 과기대)의 경우 출범당시부터 '무학과 무학년제도'를 채택해오고 있다. 미국 등 외국대학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학부에서는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마음껏 골라 듣고 논문을 쓸 때만 전공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논문 쓴 분야를 계속 세부전공으로 선택한다.